[묵상글]

그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전봉석 2021. 12. 7. 05:25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출 32:1

 

이는 그의 거룩한 말씀과 그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시 105:42

 

 

신앙이란 기다림의 훈련인 것 같다. 기다림은 소망으로밖에 감당할 수 없고, 소망은 믿음으로만이 이를 키워 자라게 한다. 믿음은 사랑으로 얻어진 거저 됨이다. 내 안에 주를 믿음이 나는 가장 불가사의한 것도 그 때문이다. 나름 논술을 평생 가르치면서, 논술의 기본은 논증이고 논증은 타당한 논거와 추론으로 가능하다. 그래서 늘 문과적인 사고와 이과적인 이해충돌이 있었다. 가령 누구를 대하는 데 있어서도 이해타산이 전제하는데 어떤 감정이 개입되어 혼자 갈등하기도 한다.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혼자 어려워하는 처지에 빠지고는 하는 것이다. 그런 내게 신앙이란 마치 신기루와 같아서 무모하고 허황된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나는 저들의 처신과 그 대응이 인간적이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 32:1).” 범접할 수 없는 산 아래에서 저들이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정체성을 잃고 충분히 애굽에 길들여진 삶이었는데, 덩그러니 광야에 던져져 한 치 앞도 장담,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놓였다. 불안은 가중되고 뭐라도 취할 상징물이 필요하다. 이를 이해하고 아론은 저들의 금으로 하나님을 상징하는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4).”

 

우리는 눈에 보이는 무엇, 상징적인 어떤 형상을 원한다. 손에 쥐고 만지고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형태를 바란다. 이를 종교화하면 묵주나 염주가 되고 십자가 목걸이나 액세서리가 된다. 목탁을 치고 향을 피워 맡으며 뭔가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소리로 형상화한다. 예전에 나는 실제 종교적인 어떤 형태를 귀하게 여겼다. 어디를 가면 꼭 들르는 것이 가령 중남미문화원이라든가, 산에서는 절에 들러 누구의 어느 벽화를 보며 오랜 시간 그 아름다움에 마음을 달래기도 하였다. 그래서 나는 늘 염불소리나 향냄새를 좋아하기도 하였다. 이는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데 있어 나름의 상징물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이를 신성시하고 그 의미를 새기며, 그것으로 위안을 찾듯 주를 바라겠다는 게, 왜 나빠? 하고 자주 생각하기를, 왜 나빠? 하고 반문하기도 하면서.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여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하고 엄히 정하셨다(출 20:4-5). 이는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5).” 하시며 그 이유도 분명히 밝히셨다. 곧 우리는 단지 저것들을 사물의 하나로 보는 게 아니라 의미화하고 상징화해서 이를 숭배한다.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소원을 빈다. 스스로의 나약함을 그리 해소한다. 성경을 바로 알기 전에까지 나는 그러는 게 가장 인간적이라 여겼다. 돌 위에 돌을 얹고 소원을 빌고, 어떤 기념일을 기억하여 트리나 종, 별이나 어떤 문양을 보며 엄숙한 마음을 갖는 일. 이 모두는 우상숭배라. 일찍이 하나님은 예수님의탄생일도 숨기셨던 것은 우리의 그와 같은 엉뚱한 숭배를 우려하신 것이다.

 

우리 곁에 우상을 두고 산다는 일이 일종의 문화가 되어 곧 크리스마스, 성탄절이 다가오면서 여기저기 반짝이는 오색찬란한 것들이 무분별하게 세워지고 팔려나가 그 앞에서 탄성을 낸다. 솔직히 나는 개인적으로 성탄절 날을 따로 정하여 그날에 예배를 드리지는 않는다. 엄연히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이교도의 문화에서 따온 날로 사람들의 숭상심리를 만족시키려는, 오늘 아론의 결정과 다를 게 없다. 성탄 주일로 하루를 기념하여 주일을 지키는 것으로 족하다. 새벽송을 돌고 밤새 축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은 이교도적인 교회 문화다. 그러한 숱한 우상들이 교회 안에도 너무 많이 스며 있다. 나는 이를 적대시하며 격렬하게 무시하거나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다지 옳지 않다는 데는 생각을 같이 한다. 은연중에 우리 주변에 두는 상징물들과 그것에 머리를 조아리는 행위가 얼마나 하나님을 모욕하고 욕되게 하시는지 모른다. 다만 우리가 주께 감사할 수 있는 배경은, 그리스도 예수 이후 주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뿐이다.

 

개인적으로 월요일의 과제인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다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렇게 첫 구절에서 한참을 머문 것도 그 때문이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시 75:1).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란 이중 의미다. 늘 주의 기이하신 도움과 긍휼이 함께 하심이고, 다른 하나는 주의 날 곧 심판의 날이 임박함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가까웠음을 알게 한다. 그래서 성경은 이를 대비하는 데 있어,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여기서 범사란 타당하지 않은, 납득이 안 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드려질 수 있는 것이 감사다. 오늘 우리 현실은 이를 증명하게 한다. 일상으로의 회복은 여전히 묘연하고, 특히 내년 초 대선을 앞둔 정국은 역겨울 정도로 사람들이 들끓으며 그 본색을 감추고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정치를 외쳐대고 있다. 다시 4단계 조정을 하루 앞둔 어제는 마치 마지막 자유를 즐기려는 듯 유흥업소마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장관을 벌였다고 하니 다들 참 어지간하다. 기어이 당해야 안다!

 

우리의 범사란 우리가 어찌 해보려는 어떤 심사의 애씀이나 노력으로가 아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이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13).” 하나님은 그 어떤 독재자보다 독점하시고 그 어떤 권세자보다 막무가내시다. 이를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그 설명을 정립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두 가지,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어떠하든지 선하시다는 것. 이 두 전제가 버팀을 잃으면 한 쪽으로 기울어져 모두가 쓸려 내려가기 십상이다.

 

반드시 그에 따른 때가 이를 것인데,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마 13:49-50).” 믿거나 말거나. 맞서 반론을 제기하며 새로운 논지로 공격하거나 말거나. 누구나 나이 들고 병들어 죽는 이치와 같이 확실하다. ‘전두환이 죽었다.’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자신의 옳음을 스스로 붙들고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위인이 상수도 채우지 못해 죽었다. 사람의 한계는 정하신 바,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실현된다.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7-9).” 믿거나 말거나,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살거나 어쩌거나!

 

그러므로 우리에게 감사는 인내를 연마하게 한다. 우리의 인내는 하나님의 기약을 붙드는 믿음의 행위다. 시인은 이를 알고,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시 75:2).

 

하는, 성경의 절대 정의를 붙들게 하고 있다. 곧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7-8).” 그 때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이처럼 내 안에 이를 알고 준비하며 기다리는 마음이 성령으로 더하시는 마음인 것은 확실하다. 지금도 종종 나의 고질적인 논리성은 의심부터 하고 상대를 반박함으로 나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를 원한다. 나도 모르게 방어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누가 혼자 와서 늘 같은 말을 맴도는 게 안타까워, 가장 이상적인 것은 부부가 같이 와서 말씀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니면 차선책으로 같이 할 길동무가 있게 해달라고 서로 기도하였다. 나는 그 말을 잊고 있었는데 저는 이를 두고 실행으로 옮기고 있었는가, 잘하면 돌아오는 목요일부터 누가 같이 올지 모르겠다. 하나님의 계획이 어떠하신지는 알 수 없으나, 그래도 돼요? 하는데 나의 대답은 의외로 그래야 한다면! 하고 받아들였다. 이 모든 게 주가 하실 일이고 나는 그저 그 자리에 놓인 가구 같이 쓰임에 적합하면 될 일이었다. 또한 우리와 같은 건물에 청소년 언어치료 상담교실이 있는 것 같은데, 아이가 방학하고 어찌 가능하겠나… 알아보기로 하였다. 돼도 않을 일이어서 나는 우선 겁도 없다. 돼도 그만인 까닭은 내가 하는 게 아니란 걸 이제는 확신하기 때문이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하는 지혜서의 정의를 나는 믿는다(전 3:1). 이를 열거할 필요도 없지만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1-8).” 이는 가만히 소리 내어 읽는 것만으로도 고개가 저절로 끄덕거려진다. 이 모든 때의 주관자가 우리 하나님이신 것을!

 

세상의 반응은 엄연하여서,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알거나 몰거나, 관심이 있거나 없거나, 부인하고 외면하거나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준비하거나… 모든 사람의 질병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이 땅의 관문이다. 이를 온전히 묵상할 때 ‘여기’ 말고 ‘저기’ 저 먼 것 같은 아니 가까운, 우리의 믿음은 ‘미래를 회상하게 한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이와 같은 엄위하심 앞에서 너는 어느 쪽이냐? 누구를 지지하냐? 우리를 인도할 증표를 보이라, 하는 따위의 요구의 갈망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럼에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종말이 유보되고 하루라도 더 우리의 미래를 남겨두심은 모두에 대한 유익이다. 살아서 아직 산 자로 살 때 기회가 있다. 이 또한 더는 기회가 오지 않을 텐데, 그래서 자살이 죄악 중에 가장 참담한 까닭은 더는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여느 종교에서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도 하고 이를 유도하여 여러 상징적인 성물을 오물조물 만지막거리고 거룩히 다루며 종교화하기도 하는데, 이는 참 가증스럽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직 산 것은 그 자체로 은혜이고 축복이어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아직은 전할 수도 들을 수도 있는 기회가 있다.

 

홀로 남은 친정엄마를 성심껏 모시며 주말이면 서로들 시간을 내어 찾아보고 위하는 일은 기특하나, 그 영혼의 문제를 두고 서로들 살아서 슬피 울고 이를 갈며 주의 은총을 구하여야 한다. 아내에게도 자주 권하는 말 중에 한국여성 평균 수명 이상을 살고 있는 장모의 남은 생을 두고 이 땅에서 젊어서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리게 하고, 몸에 익은 위안으로 즐거움을 삼게 하는 것으로 효도가 아니라고 늘 강조한다. 하루하루 그 남은 날들 매순간이 죽음을 준비하고 영생을 사모하며 들어갈 천국의 삶을 대비하는 것으로 복에 복이 있다. 예수님은 죽음을 직전에 두시고도 ‘보내신 이의 뜻’을 헤아려 그 일을 준행하시는 데 전념하셨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그러므로 오늘이 하루 더 내게 주어짐은 그 의미가 귀하고 벅차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벧후 3:15).” 결국 우리 삶의 기둥, 그 중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으로다.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셀라)

(시 75:3).

 

세우신 이도 이를 소멸하게 하실 이도 하나님이신 것을. 곧이어 코로나를 능가하고 변이바이러스를 능가하는 새로운 전염병이 연이어 출몰할 것이란 연구결과 앞에서 때가 가까움을 느낀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 16:8).

 

이 위기, 엄중한 사태에서 우리가 중심 잃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영적으로 육적으로나) 방법은,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잠 18:10).

 

그러니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이 사회에서, 저들과 같이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고 누구를 지지하며 호소하는 따위로 인생을 소진하는 일은 어리석다. 기도하고 마음에 두고 주가 주시는 마음으로 누구를 선택하면 그만이다. 누가 된들? 누구의 말마따나 이번 선거는 나쁜 놈 덜 나쁜 놈, 더 악랄한 놈 덜 악랄할 놈을 고를 뿐이다. 하늘이 이미 정하신 바라. 우리나라를 얼마나 귀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은 그간 우리가 세운 대통령들이 이를 증명하였다. 하나같이 불운한 결과를 맞이한 까닭은 그만큼 뿌리 깊은 우상과 불의와 부패와 타락이 만연하였었다는 증거다. 저들을 감옥에 두고 누가 더 나은지 키 재기 하는 것들이 정치인들이라. 그 밥에 그 나물들을 다 같이 솎아 한데 가두어야 하는 것인데…. 그러므로 성경은 일러 우리의 자세를 교정하고 엄히 지시하신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사 26:3).

 

어떠한 결과라 해도 주는 선하시다. 진영논리에 따라 내가 지지하던 이가 아니었다 해서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이는 그를 세우신 이를 모욕하는 일이다. 다만 우리의 시선은 ‘소멸될 날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이 모든, ‘봄날은 간다.’ 그리하여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오늘 우리는 이를 지연시키고 하루라도 더 이 땅의 삶을 추구하는 게 우리의 과업이 아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12-13).” 너무 냉정하고 냉혹한 말씀인가? 각자의 현실을 들여다볼수록 어쩔 수 없는 것들이란 명목으로 주를 멀리하기를 언제까지 할 것인지.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계 6:12-16).” 이 얼마나 두렵고 또 두려운 일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21:1).” 주가 이루실 나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우리는 이를 앎으로, 오늘 또 하루를 허락하신 이의 뜻을 헤아린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이에 오늘 시편의 말씀으로 나의 또 한 날을 감사히 열어,

 

여호와께서 낮에는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로 밝히셨으며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를 가져 오시고

또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셨도다

(시 105:39-40).

 

오늘도 나의 필요와 모든 갈증을 가져가시며,

 

반석을 여신즉 물이 흘러나와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

이는 그의 거룩한 말씀과 그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41-4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