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전봉석 2021. 12. 9. 05:18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출 34:6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07:1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43).

 

마지막 구절의 말씀을 여러 번 되새긴다. 일련의 사태가 우리 생활을 위협하고 있다. 공부방으로 오는 아이 가운데 같이 전날에 놀던 친구가 확진이 되어 어제 그 아이도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혹여 아이가 양성으로 판명되면 가르치던 아내와 같이 공부하던 아이들 모두 비상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들도 모두 검사를 받아야 하고, 딸아이는 당장 그 직장에도 여파가 미칠 것이다. 곧 어느 한 사람의 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저를 중심으로 평소 행동반경의 모든 사람에게 그 영향이 미치게 된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이를 두고 주께 기도하였다. 이제는 누가 언제 어디서 걸릴지, 그것으로 어떤 결과가 생겨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모두는 적당히 ‘설마’ 하고 산다. 이때에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43).” 하는 말씀 앞에 가만히 마음을 누이고 등을 기댄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오직 주의 인자를 사랑하는 그것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이와 같은 말씀이 새삼 크고 귀하게 다가온다. 아니면 무엇으로 주 앞에 나아가며 주를 바랄까?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6).

 

저마다의 생에 겨워 다들 사느라 정신이 팔려 하루하루 사는 일에만 급급하다. 그러느라 일련의 사태를 통하여 주가 행하시는 일의 근거를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사 13:11).” 주께서 죄를 벌하고 거만을 낮추실 것이다. 이는 이 땅에서의 일로 우리가 그토록 살고자 하던 날들을 두고 행하시는 일이다. 이에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교만한 자여 보라 내가 너를 대적하나니 너의 날 곧 내가 너를 벌할 때가 이르렀음이라(렘 50:31).” 전후좌우 정방위로 압박을 해오는 오늘의 사태를 두고 언제까지 안이하고 막연하게 굴 것인지. “교만한 자가 걸려 넘어지겠고 그를 일으킬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그의 성읍들에 불을 지르리니 그의 주위에 있는 것을 다 삼키리라(32).”

 

이러한 때에 ‘신앙의 기술’은 기도다. 기도는 효과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행동이다. 그저 막연한 기대나 바람이 아니라, 자신을 살펴 주의 뜻을 되새기며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신앙의 절정이다. 가만히 주의 이름을 되뇌며 주 앞에 진정하는 일, 하나님께 마음을 연다는 것은 내 속의 모든 말들-염려, 근심, 우려와 걱정, 실제의 고통과 신음하는 것들을 내어드리는 일이다. 이때에 하늘 문이 열린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51).” 곧 기도는 우리 영혼을 신실함으로 쏟아 붓는 일이다.

 

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시 66:17-18).

 

내 안에 죄악을 품고는 기도가 나올 리 없다. 그때의 기도는 소원이나 바람으로 안 믿는 이들의 막연한 기대와도 다를 게 없다. 신앙의 기술은 기도인데 기도로 우리 안의 죄악을 진단하고 이를 주께 쏟아 낼 수 있다. 그러할 때에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도다

(19).

 

다소 신기한 일은 나의 더러운 죄악을 쏟아 부을 때 하나님으 오히려 기뻐하신다. 아뢰고 고하며 이를 인정할 때 주가 이를 즐거워하신다.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암 6:1).” 우리로 그릇 행하게 하는 것들을 하나님은 미워하신다. 이를 알면 알수록 주께 바라는 마음은,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시 16:1-4).

 

이는 오늘 말씀에서와 같이 우리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주목하여 알면 알수록 그 고백은 신실하다. 즉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 34:6).” 그러니 이 땅을 사는 동안 무엇으로 새 힘을 얻고 무엇을 의뢰하고 살 수 있겠나?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07:1).

 

감사가 드려질 수 있는 통로가 기도뿐이다. 기도는 내 마음의 소원을 주께 아뢰고 또 고하다 이내 주의 뜻을 구하고 바라는 자리로까지 나아가는 일이다. C. S. 루이스가 뒤늦게 얻은 아내를 잃고 쓴 글, <헤어려 본 슬픔>에서 말하였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뜻을 바꾸지는 않으신다. 그런데도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뜻을 바뀌어 하나님의 뜻에 동조하게 하기 때문이다.’ 재혼하는 여인이었고 저이에게는 아들도 하나 있었다. 루이스의 형편은 몇 년 사이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남겨진 아이만을 맡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얻은 기도의 의미는 새로운 것이었다. 

 

또는 일반 목사로 설교을 한다는 이유 때문에 국교회로부터 고소를 당해 감옥에 갇힌 존 번연은 오히려 12년동안 자신의 억울함을 <천로역정>에 담아냈고,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때 저의 말이 기도는 곧 ‘하늘 문을 여는 열쇠’라고 하였다. 기도는 우리로 거짓 없이 신실한 삶을 살게 하고, 분별 있게 행동하게 하며, 애정 깊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한다. 기도는 우리 영혼을 신실하게 쏟아 붓는 일이고, 성령의 힘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재촉하며 말씀을 근거로 하게 한다. 기도는 교회의 유익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이기도 하다. 단지 개인의 소원으로 그치는 정도가 아닌 것이다. 저녀 입시를 놓고 비는 기도, 나라와 민족의 안녕을 비는 기원 정도의 것이 아니다.

 

일련의 사태가 우리로 더욱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한다. 우리의 요구는 늘 표피적이고 단순 무식하여 당장의 문제로 전전긍긍할 따름이지만 그처럼 주의 이름을 부르다 보면 어느새 주의 뜻을 바라게 된다. 내가 살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 장소, 기회는 오직 기도할 때이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렘 29:12-13).

 

아내는 가정예배를 드리며 그 아이와 아이엄마를 두고도 주께 아뢰었다. 특히 아이엄마는 기저질환이 많아 일 년에 몇 번씩 병원에 입원을 할 정도로 몸이 약하다고 들었다. 부디 이러한 계기가 저들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 앞에 더욱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화 있을진저

그들이 나를 떠나 그릇 갔음이니라

패망할진저

그들이 내게 범죄하였음이니라

 

내가 그들을 건져 주려 하나

그들이 나를 거슬러 거짓을 말하고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로 말미암아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

(호 7:13-14).

 

누구는 그 부친을 결국 요양원으로 모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에까지 감염되었으니, 그럼에도 저들은 주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인생이 허무하려니 하고 그 부친의 영혼을 두고 생각할 줄 모른다. 오늘의 실상은 이와 같아서 현상을 그대로 담아 주의 살아계심을 현실 곳곳에서 보여주고 외쳐 소리치는데도 ‘노아의 때’와 같아서 ‘설마’ 하고 ‘농담’으로나 듣고 만다. 당장의 선거가 중요하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집을 늘려 하루라도 편히 사는 게 삶의 전부이니, 이내 방주의 문이 닫힐 터인데, 사느라 사는 데 정신 팔려 영원히 죽을 줄을 알지 못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전파될지 모르는 전염병이 암시하는 바를 오늘의 현실은 전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일상은 여전히 돌아가니까, 갈 데까지 가려는 것인지. 누구에게 이를 일러 기도를 당부하고 말씀을 권하면 귓등으로 듣고,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그 소원은 세상에서다. 그러니 누구에게 말 한들. 공연히 싸움만 되고 감정만 상할 뿐이어서, 나는 자꾸 주께로 아뢴다.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렘 31:18).

 

그저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는 빠르게 대응하고, 어디 돈 벌 궁리에는 혈안이 되어 눈이 벌건데, 정작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데는 마음두기가 싫다. 주 앞에 앉기가 그렇게 어렵다. 그럴수록 말씀을 가지고 주의 약속을 의뢰하는 일, 기도란 나의 남은 생을 두고 주께 바라는 것,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루에 열두 번씩 마음은 둔갑을 하고 요동치는 현실에 덩달아 널뛰기를 하지만, 그러느라 들볶이던 마음은 며칠째 숨 쉬기가 답답할 정도로 가슴을 짓눌러서 정신과 약을 겹쳐서 먹는데도 갑갑하기만 하다. 신기하지? 그래서 주를 바란다.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기도하고, 더는 다른 길이 없어 말씀을 준비한다. 그럴 때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왜? 아니면 대체 무엇으로 살 것인가? 자식? 아내? 나의 신념이나 친구, 어떤 의지하는 무엇? 나는 나의 막장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기도뿐이란 생각을 한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은 도리어 안도가 된다.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잠 15:8).

 

그리하여 부디 나의 마음이 주께 정직할 수 있기를. 그러할 때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별로 무엇이 더 중요한지, 사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나은지, 죽을 것을 대비하는 게 나은지. 이 땅에서의 안위와 평안을 바라는 게 나은지,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는 게 나은지. 또한 누구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도 가족이든 그 누구, 사랑하는 일이 나은지, 저의 일을 두고 주께 고하고 주를 의지하는 게 나은지. 주의 인자하심을 사랑하는 일이 기도다. 헤아려 알고자 하는 게 기도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시 69:3).

 

나로 이 괴로움을 통해 알게 하시고자 하는 바,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시 38:8-10).

 

그러하기까지 주를 바라게 하심이 곧 은혜였다. 기도란 비로소 참 은혜의 의미를 알게 하는 신앙의 기술이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존중이라면, 믿음에 있어 <신앙의 기술>은 기도다. 둘 다 오랜 기간 연마와 수련으로 얻게 되는, 숙련된 사랑이 존중이듯 숙련된 신앙이 기도다.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어도 모든 게 하늘 문을 열지는 못한다. 단지 믿음으로가 아니라, 신앙으로 성장하는 우리 영혼을 두고 그 차이는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믿음의 분량에까지 자라가는 결과를 낳는다. 예레미야의 기도처럼,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렘 31:18).

 

오직 주만이 나의 모든 것, 나의 구원자. 곧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이는 우리 주님 그리스도 예수께서도 본이 되신 일이다. 기도란 그리하여,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시 116:3-4).

 

오늘 이 아침, 말씀 앞에 앉아 가만히 주가 행하시는 일을 묵상한다. 그것이 나의 기도라. 비록 현실은 어떠하고 나의 육신은 어떠하다 해도,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시 107:1, 4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