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전봉석 2021. 12. 8. 05:1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출 33:14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시 106:47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질문 앞에 종종 세워지는 것 같다. 엎친 데 덮친 듯 누군가 겪는 일이 안 됐고 어려운데, 그럼에도 주를 멀리하고 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심이 저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일까? 그 부친이 연세가 많아 곧 죽을 날을 기다리는데, 죽는 일도 일이라고 기도삽관을 하고 요양원에 들어가 계시다 코로나에 걸렸다. 그러니 가족들은 애가 타고 속이 탄다. 그럼에도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눅 8:10).”

 

우리가 주를 안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출 33:14).” 주가 앞서 함께 하시는 삶으로다. 이는 주의 영예를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시 106:47).

 

이에 소멸될 날을 염두에 두고 사는 것이 복이다. 이 땅의 삶은 그 끝이 처절하여서, 치매에 걸린 조부를 모시고 정신과를 찾은 이가 마침 자신의 우울증 약을 어찌할까? 생각하다 이를 알게 될 친정식구들을 생각하여 다음 날로 미루었다. 사는 일이 이처럼 복잡다단하여 누구라도 홀가분하니 살아갈 수가 없는 일이다. 그야말로 얽히고설켜 뭐 하나를 잘못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지고 말 것처럼 위태롭다. 이에 소멸의 날이란 우리 인생의 끝이 도둑 같이 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다들 이를 두려워하고 멀리하지만, 우리의 삶은 다르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12-13).”

 

그때의 일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나만,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계 6:12-16).” 누구는 누워서 의식은 있는데 꼼짝도 못하고, 이를 지켜보는 가족은 마음은 애가 끓는데 어떻게 손 쓸 수 있는 방도는 없고… 그러할 때 주를 곁에 모심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소망을 두셨다. 저들이 알 수 없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는 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이를 알면 알수록 우리가 하루를 살아도 겸허함을 잃지 않고 날마다 매순간 겸손하여 교만하지 않도록 주의하려 한다. 곧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매사에 주의 역사하심을 알고 자신을 쳐 복종하게 하는 것이겠다.

 

내가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게 행하지 말라 하며

악인들에게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시 75:4-5).

 

설교문을 정리하고 이를 통해 묵상하며 주변의 일들을 통해 주의 살아계심을 목격하는 일은 특권이다.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 우리들은 주께서 우리게 두신 ‘뿔’ 곧 그 권위와 능력과 자부심을 가지고 함부로 휘둘리지 않는다.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않음이다.’ 그러나 “이 열방의 신들 중에 어떤 신이 자기의 나라를 내 손에서 건져냈기에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하니라(사 36:20).” 저들이 아는 자부심과 자긍하는 마음으로는 주의 뜻을 알 수 없으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누구를 의식하고 말씀을 접하다 내가 그 자리에 있다는 데서 화들짝하고 놀란다. 아,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우리로 이런저런 일련의 주변 일들을 돌아보며 주가 행하시는 일을 보고 주의 인자를 사랑하게 하신다. 겸손하게 주께로 향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한데 이를 보면서 알지 못하는 우리의 아둔함과 어리석음은 당장 그 부친이 사경을 헤매다 코로나에까지 감염되어 저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 심정이 안타까운데 저들은 이내 주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하루는 죽은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부탁하였다. 죽은 나사로를 보내어 아직 죽지 않은 남은 가족들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려주십사 하고 말이다. 죽고 난 뒤 당하는,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에도 생각은 있고 의식은 살아서 감정이 있다는 소린데, 아브라함은 저의 말에 단호하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눅 16:29).” 이미 저의 곁에서 주를 알게 하는 ‘모세와 선지자들’ 같은 이들이 충분하다. 믿음의 가족이 있고, 같이 일하는 사람 가운데 교회 다니는 사람도 여럿인데, 그럼에도 저들은 듣고자 하지 않는데, 그러니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간들 저들이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까? 죽은 부자가 애가 타서 다시 고한다.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30).” 그럴 거였으면 벌써 그랬을 것을,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31).”

 

그러니 당면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곁에서 아무리 말하여도 알려하지 못하는 일은 기묘할 정도이다. 한때 내가 주를 멀리하고 살 때, 저들의 그러한 태도에 대해 나도 좀 안다. 그때는 ‘나의 뿔’을 높이 듦이었다. 내 생각과 판단이 옳고 나와 같이 하는 여럿이 그렇게 다들 잘들 사는데, 하여간 예수쟁이들의 허풍은 가히 점입가경이라 여겼었다. 이제와 그때를 돌아보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아찔하다. 그때 만일 내 목숨을 부자와 같이 거두셨더라면 나 또한 고통 중에 애원하며 영원히 후회와 탄식으로 보냈을 것이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바울의 지혜로운 설교에 아멘, 한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곧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자리는 ‘어쩌다’ 그리 된 게 아니다. 어느 프로에서 어느 심리학 박사이며 정신과 의사가 나와서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랍시고 하는 말이 그 소리였다. 인생이란 매순간이 어쩌다 일어나는 일이라, 어쩌다 그런 것처럼 또 어쩌다 보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란다. 그러니 포스트코로나 세대를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러니 참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시 75:5-6).

 

성경의 가르치심은 저 정신과 의사의 권면과 위로와는 다르다. 어쩌다 우연히 주어지는 삶이란 없다. 그런 것처럼 여겨지나 어쩌다 우연히 닥쳐오는 그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조성되고 완성되어 간다. 또 저들이 말하는 곧 나아질 거라는 거짓 희망은 수천 년 전에부터 있어온 거짓말이다. 엄연히 우린 각각의 받은 은사대로 주신 삶의 현실을 산다. 그 맡기신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또 그 모양이나 형편은 달라도 이루어 바라는 주의 뜻은 하나다. 오직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를 신뢰하는 것이 복이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이를 인정할 때 주신 삶이 어떠하든, 비록 그 자리가 어느 부자의 대문 앞에서 저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헌데를 앓음으로 개가 와서 핥는 멸시와 조롱을 당한다 해도,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로도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말씀을 비유로 하실 때 일체 익명으로 하시다 딱 한 번 본명을 거명하셨는데, 이는 그 이름의 뜻이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다. 어찌 그런 지경에서 그처럼 그와 같이 묵묵히 주신 날을 다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믿음의 놀라운 위력은 우리의 의지를 능가한다. 정작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힘이다. 하면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며 사는가? 당장의 그 수모와 수치와 어려움과 고통과는 비교도 안 될, ‘하나님의 진노는 발효된 술잔과 같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꺼기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시 75:8).

 

이를 두려워할 줄 모르면 모든 게 허사다. 이 땅에서 누리고 떵떵거리며 호사를 누리며 산들, 그 인생의 끝은 다들 거기서 거기라, 기도삽관을 하고 생을 연명하다 코로나에까지 걸려 자식들로부터 배웅조차 받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하는 신세가 아주 특별한 경우인가? 죽음이란 모두에게 초라한 것이다. 무력하게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게 생의 마지막이다. 이와 같은 생의 허망함을 두고, 여전히 자긍하며 교만한 삶을 사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도 없다. <교만은 ‘영적인 암’>이다. C. S. 루이스가 말했다. 저의 말이 옳다. 아무렇지도 않고, 전혀 알아채지도 못하고 살다, 어느 순간 더는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 교만이다.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들에서 떠나는 자들을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

(시 119:21).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무릎 꿇는 우리가 복이다.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잠 21:4).” 성경은 일러 오늘의 이 모든 문화의 함정을 꿰뚫었다. 돈과 권력이면 모든 게 다 제 손 안에 있는 듯하나, 그래봐야 인생이란 게 상수 곧 백 세도 제 마음대로 채울 수 없는 주제이면서! 우리는 이와 같은 주변의 소식을 접할 때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것이 우리의 특권이고 지혜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곧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가 아니라 주를 찬송함으로 우리를 짓누르는 환경을 초월할 수 있다.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시 75:9-10).

 

안 믿는 자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허풍 같이 들리겠지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그럴 수 있는 저력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숨겨진 병기와 같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서도 주를 찬송할 수 있는 저력,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그런 가운데 교만이 오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그리 평생을 애써 노력하였던,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다들 악착같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어디 주식에 잘만 투자하면 대박이라고, 누구를 부러워하고 또 어떤 이처럼 살고자 그리 악랄하게 굴기도 하지만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삼하 22:28).”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남은 생을 무엇으로 살 것인가? 다시 한 번 이 질문 앞에 서서 욥의 진언을 들어본다.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되,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며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을지니라(욥 40:11-12).”

 

우리 곁의 일련의 사태는 교훈이다. 쯧쯧, 하고 혀를 차고 동정하고 마치 남의 일 보듯 할 게 아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이 모든 날들은 훈계다. 들려주고 다시 보여주고 이르고 또 권하는 가르치심이다. 이를 한사코 외면하고 부정하는 데는 별 수 없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 10:14).” 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내 마음도 다스릴 수 없는 존재인데, 누가 누구를 권하여 저의 영혼을 구원하겠나? 우리는 다만 주를 신뢰함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이의 곁에서 끝까지 주의 긍휼하심을 바랄 뿐이다. 이처럼 오늘의 현실은, 그 처한 다른 모든 이들의 상황은 마치 시청각교재와 같아서 일련의 사태를 두고 주의 사랑을 익혀간다.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이르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들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시 36:11).

 

우리는 이를 알면 알수록 주께 아뢰고 주만 신뢰할 따름이어서,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40:4).

 

덩달아 저들처럼, 아니 남부럽지 않게 이 땅에서 잘되고 잘 사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하나님이여 교만한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의 무리가

내 영혼을 찾았사오며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아니하였나이다

(86:14).

 

그래서 우리는 주께 아뢰고 주의 도우심만을 의뢰한다. 그리고 주께 고하여 우리가 당하는 원통함을 호소한다.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

(94:2).

 

아니면 저마다 다를 게 없어서,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언제든 우리들이다. 그렇게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사 2:11).” 반드시 돌아보며 후회하고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 그날이 오면 모든 게 늦었다. 교만의 끝은 되돌릴 수 없는 때이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12).” 그러므로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17).”

 

오늘도 말씀 앞에서 인생이라는 광야를 생각하며 앞선 저들 선민 이스라엘이 어떠했는지, 그러는 저들 사이에서 모세만은 어떠했는지, 우리로 주목하게 하시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을지어다.' 어느 길을 따를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이에 오늘 시편도 이를 주목하고 있다.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시 106:7).

 

수천 년이 지난 오늘의 이 애굽과 그 광야에서도 다를 게 없으니, 다시 똑같은 질문이 던져지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어느 쪽이냐? 여호수아가 대답하였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이런저런 파국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세상은 아무리 요지경이고, 사람들은 아무리 가관이라 해도, 나는 어느 쪽인가?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시 106: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