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속건제니 그가 여호와 앞에 참으로 잘못을 저질렀음이니라
레 5:19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시 118:6-7
부지불식간에 죄를 범하게 된다. 이때 속죄제로 드린다. 대표적으로 네 가지 잘못에 대하여 레위기 4장에서는, 제사장의 허물로 인하여(2-3), 부지중에 백성이 계명 가운데 하나를 범하였을 경우(13), 족장이 계명을 범하였을 경우(22), 평민의 한 사람이 계명을 범하였을 경우이다. 부정한 것들에 대하여는 마땅히 여호와의 계명 중에 하나라도 범하였을 경우이다. 이에 대해 오늘 본문은 먼저 자복하고,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5:5)”, 그 형편에 따라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나 고운 곡물가루로 하였다(7, 11). 이는 여호와께 화제물로 드려졌다. “그것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기념물로 한 움큼을 가져다가 제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속죄제라(12).”
속건제로는 7장 서두에 자세히 기록되었는데, “제사장은 그것을 다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 것이니 이는 속건제니라(5).” 즉 이는 배상 제사라 불렀는데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속죄제와 속건제는 상호 호환하였다. 가령 레위기 6장에서 누구의 것을 훔치면 20%를 더해 돌려주었다(2-5).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누구에게 피해를 끼치거나 부지중에 주의 계명에서 이탈할 수 있고, 이를 자복하고 그에 따른 처분을 달게 받는 제도이다.
중요한 것은 이를 인정하는 일이겠다. 동시에 우리 안에는 이를 은폐 왜곡하여 자신을 합리화하고자 하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법인데, 이는 결국 다 아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경우가 된다. 하나님은 이를 매우 싫어하신다.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시 50:7-8, 10-11).
내가 무엇으로 얼마나 드리는가, 하는 게 중요하지 않다. 우리 형편과 사정을 아신다. 다만 성심으로 주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이르시기를,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12-13).
곧 우리가 무엇 때문에 무엇으로 드리고 하는 일은 순전히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이를 안다면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14-15).
이 모든 제사와 제단과 그 행위는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이 된다. 이는 곧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봄이었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합 2:14).
주일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금을 보며 저의 상태나 그 심보를 점검할 수 있는데, 어제는 서로가 불편할 수 있겠으나 십일조나 주정헌금, 감사헌금에 대해 인색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이는 쉽지 않은 일로 그 모든 게 하나님이 더하신 것을 인정할 때에 인색하지 않을 수 있다. 이를 자기 것, 내 것으로 여길 때는 왠지 아깝고 계산하게 된다. 이는 모든 사람의 공통된 욕심이기도 하겠으나, 하나님은 우리의 무시와 함께 인색함을 싫어하신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6-17).
정작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헌금의 종류나 드려지는 금액의 정도가 아니다. 우리의 상한 심령으로 주께 드려지는 마음일진대 나의 모든 것이 주가 더하신 것임을, 심지어 부지불식간에 저지르고는 하는 허물과 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인정을 기다리신다. 누구에게 이를 알게 하기란 저의 오랜 습관에 몸에 밴 어린 아이 같은 습성 때문에도 쉽지 않다. 하나님의 소원은 오직 하나,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호 5:13)
자신의 병듦과 상처를 깨닫는 것이고, 이에 상한 심령으로 주 앞에 나아오는 것을 그 어떤 제사보다 귀히 여기시는데도 저들이 찾는 것은 앗수르로 가서 그 땅의 왕, 권세 잡은 자에게로였다. 흔히 친구나 여행, 스스로의 위안이나 도덕적인 기준의 삶으로 그 허물과 실수를 바로 잡으려고 하나 이는 하나님 앞에 가증되다. 이에 하나님은 저를 뜯고 탈취하실 것이다.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바로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14).
이보다 더 두렵고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가장 가까운 아내에게 또는 가족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전달하기가 쉽지 않다. 자주 느끼는 일은 가족사역의 어려움이다. 너무 잘 아니까, 나의 허물과 실수를 속속들이 다 아니까. 남들에게는 한 꺼풀 또는 한 마디 거리가 있어 좋게 보이는 어떤 것으로 말이나 권함에 힘이 있는데… 그래서 나는 평소에 말하기를 줄이고 설교 중에 말씀으로 전달하는 것으로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려고 애를 쓴다. 어제는 그 중에 헌금에 대한 것이었다. 때론 너무 계산적이고 자기 유익을 우선하는 것이라, 궁벽한 살림 때문이려니 하고 이해는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것에 대해 말씀으로 전달해야 했다. 이에 하나님이 하시면,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호 10:11).
주께서 그 목에 멍에를 메우신다. 자신들의 유익을 구하는 일에는 아낌없이 쓸 줄 알면서 정작 교회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남보다 못한 인색함으로 하니, 이를 어찌 가르쳐 알게 할까? 앞서도 말한 것처럼 가족사역이 일반사역보다 어려운 것 같다. 다른 이들은 멀리서도 찾아와 듣기 원하고 자신의 문제를 내어놓는데 이는 주의 종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한데 가족으로서는 늘 보고 곁에서 아는 선입견이 우선이라, 나도 나의 부끄러움에 더욱 소심하게 되고 듣는 저들로서는 그저 그런가보다 하는 것 같다. 이에 다들 흩어 내보내는 게 옳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하게 된다. 나로서는 점점 침묵하고 거리두기를 하게 되는 것도 그래서다. 아니면 나 또한 감정이 먼저 올라오니까. 그러다 하나님의 침묵에 갇히면 숨을 쉴 수가 없다. 하나님이 외면하시면 가족이 가장 어려운 적이 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흔들림이니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틀거리게 하는
포도주를 우리에게 마시게 하셨나이다
(시 60:1-3).
그리하여 가족을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 하였는지 모른다. 아무리 가까이 가려 해도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가 있고, 아무리 멀리 떠나 외면하려 해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예배 전 아이와의 줌으로 대화에서 현재 우쿨렐라를 배우는 곳을 그만두라고 일렀다. 몇 번 말로 돌려서 했는데 한 주 쉰다, 한 달 쉰다, 두 달 쉰다 하며 여전히 그 끈을 두고 있어서, ‘다락방’은 이단이라 설명해도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의 마음에는 저들에 대한 고마움이 크다. 함께 해주었던, 저들 가족들과 같이 안산 어디 전시장에를 다녀온 것도 매우 따듯하고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은 모양이다. 나의 말에 늘 그 이야기를 들며 난감해한다. 또한 아이의 이성 문제나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더는 아이와의 대화에서 한계가 느껴진다. 내가 하라마라 할 문제가 아니어서, 엄마에게 말씀드리기를 몇 번 권하여도 이를 듣지 않는다. 설마 전달하였는데 아이엄마가 외면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스스로 아이가 싫어하는 것은 알고 있다.
가족이란 그렇듯 서로가 징글징글하게 어려우나 그렇다고 남처럼 외면할 수도 없다. 스물다섯 살의 아이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이르고 가르친다 해도 엄마의 영향이 크다. 내심 내가 어려워서 차일피일 미루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단지 아이를 맡긴 것으로 더는 바라는 게 없다는 말에 나도 상처를 받은 셈이니, 움츠러든 마음으로는 선뜻 나설 수가 없다. 다른 것(영적인 영혼의 문제)은 바라는 게 없다는데 뭐라 내가 더 끼어들 수 있을까? 그저 고마움이나 면목 없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거면 세상 어디 좋은 제단이니 복지관도 많다. 굳이 내게, 교회로 아이를 보내는 것은 내게 맡김이 아니라 주께 맡김이고, 나에게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아뢰고 의지하고 부탁하는 것일 텐데. 아이는 그렇고 실은 엄마가 문제다. 같이 교회를 오거나 줌으로 예배드리는 것조차 꺼려한다.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누구의 이해가 무슨 소용이겠나?
이제 아이는 청소년도 어린 아이도 아니다. 간혹 이성에 대한 관심을 보일 때 나도 긴 한숨에 젖는다. 그 가족들인 형과 엄마, 아빠에 대한 어떤 감정을 드러낼 땐 안타까움도 앞서지만 저들 탓도 크다. 다시 말하지만 저들도 힘들고 지칠 일이고 이해는 하나, 누가 이해를 하는 게 무슨 소용이겠나?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 사리분별이 어려운 아이를 두고 대체 저들은 어쩌려는 것일까? 잔인한 소리지만 자신들이 죽을 때 같이 데려갈 것인지? 아이 인생을 책임질 것인가? 그러니 본인들도 힘에 겨워 쩔쩔매는 것이겠으나 그래서도 우리가 합심하여 주께 아뢰고, 맡기고, 의지해야 하지 않겠나? 이를 어찌 전달하고 그 위중함을 알려야 할지 나는 참으로 어렵다.
누구는 발달장애로 불안지수가 99를 기록하였고, 그런 아이를 떠안고 있는 본인은 오히려 100을 기록하였으니, 백날 얘기해도 소용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아이로 인해, 자신으로 인해 주를 더욱 바라고 구하는 수밖에. 대체들 어쩌려는 것일까? 나이 들면 좀 나아지려니, 하는 것일까? 그런들 지금 아빠의 모습일 텐데?? 어리니까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겠지만 순간 포기하지 않으면 감당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어도 소용이 없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아이 문제인가, 자기들 문제인가? 이 또한 분간하지 못하면서 어찌들!! 말로는 다 안다. 이해한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것보다 불신앙도 없다. 그게 다 자기애다. 스스로의 애착이나 집착이 그리 안달을 부리는 것이고, 정작 그 아이의 영혼을 다루시는 주를 인정하기는 싫은 것이다. 못 믿겠으면서도 믿는다는 착각.
우리의 거짓 신앙은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인다. 어떤 장애가 있어서가 아니라, 요즘 소위 평범하고 정상적이라는 말이 무색한 시대를 살고 있다. 정상적인 아이도 어른도, 부모도 자식도 없다. 그러다 말겠지, 나아지겠지, 하는 따위의 안일함으로 아이 영혼이 곪아가고 자신들의 영혼은 해이해진다. 희한하지?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면서 그게 그러니까 그리 쉽지가 않은 것은 못 믿겠다. 그러니 저렇듯 애쓴다. 자기가 벌고 가르치고 살아서 사는 동안 책임지겠다고 저 난리들이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그 속에 불신앙이 가득하다. 하나님은 도대체가 미덥지가 않다. 그러느니 앗수르에 있는 전문가를 찾고, 바벨론에 있다는 어디 용한 이의 도움을 구한다. 그게 다락방이면 어떻고 무슨 이단이면 어떻겠나? 저들은 또 교묘하게 장애인과 함께하는 교회, 자살방지 운동 등을 펼치며 선한 일을 하는 듯 믿음의 자녀들을 현혹한다.
아이에게 이단인 곳을 설명하다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 엄마에게 전화를 달라고 아이에게 전하라 해도 소식이 없다. 나는 가만히 주의 이름을 부른다. 아주 가끔… 너무 어렵다. 내 가족과의 관계도, 가깝다고 하는 이와의 교류도, 나의 행실이 온전치 못함이겠으나 나 역시 누구에게 듬직하기나 하겠나? 왜 하나님은 일처리를 이렇게 하실까? 나 말고 좀 더 권위 있고, 능력도 되고, 거룩이 처벌처벌 넘치는 이를 택하셔서 저들을 다루시면 훨씬 더 나으실 텐데. 그렇게 어제는 의기소침하였고 시무룩하게 오후를 보냈다. 그러다 이 아침,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18:28-29).
하시는 말씀이 귓가를 맴돈다. 아내가 곁에 있는데 외롭고, 자식이 앞에 있는데 어렵다. 때론 저들을 피해 멀리 도망치고 싶다. 같이들 공부한 신대원 친구들도 있고 믿어라 하고 맡겨주는 이도 있는데 저들이 더 힘들다. 저들의 신앙을 위해서도 어디 다른 교회, 아니 내가 그만두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나를 괴롭힐 의도인지 나는 자꾸 나를 부르신 이의 시선을 피해 도망치고만 싶었다. 그러고 있는 내게,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50:15).
그렇게 나는 또 주밖에 내가 의뢰하고 의지할 이가 없다는 사실 앞에 앉는다. 아내나 자식들도 아니고, 누구 어디 믿을마한 사람으로 위로를 받는 일도 아니어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각대로 일하실 것이고 나는 여전히 그런 주 앞에서, 부지불식간에 죄와 허물을 일삼으면서도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118:24).
이 날, 주의 날로 나는 주일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그 사이사이 누구를 마주하고 위하고 저와 함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 날, 이 날은 주가 정하신 것이라는 데 오래 머문다. 오늘의 일련의 모든 상황을 두고,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
이 난감한 진리 앞에서 나는 언제쯤 명징한 사고와 반듯한 신앙으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4).
주께서 나를 어떻게 여기까지 인도하셨던가? 모세의 고백처럼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신 1:31).” 저들이 인정하거나 말거나, 누가 같이 동조하거나 말거나, 나는 주의 품에 안겨 여기에 왔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5).
그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편이셨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6-7)).
그러므로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8-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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