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레 3:16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시 116:1-2
화목제의 주제는 평화와 교제이다. 제사를 뜻하는 히브리어에서 기원한 평화제이다. 평화 혹은 완전함을 의미하는 살롬으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평화, 하나님과의 교제를 뜻한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레 7:15).” 화목제는 다른 제사와 함께 매년 3번씩 드렸고, 이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모여 공동으로 식사를 하였다. 곧 우리 일상의 소소한 감사를 한 자리에 집약하는 특별한 예식이라 하겠다. 즉 평화와 교제는 단회적일 수 없고 어느 순간의 어떤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러 잊히고 무시되는 경향도 있다.
주의 부르심에 대하여, 그와의 동행은 무심한 듯 자연스러우면서도 특별하다. 한데 이를 어떤 이슈, 확신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마치 숨을 쉴 때마다 그에 따른 어떤 확인을 더하려는 것처럼 무모하게 여겨진다. 함께 하심은 늘 똑같은 일상의 일처럼 예사롭지 않게 여겨질 때도 있다. 하여 지혜자는 말하길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 3:6).
한데 이 범사란 너무 광범위해서 이게 맞나? 확신이 들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우리를 주의 사역자로 부르시는 데는 뭔가 남다른, 극적인 어떤 사건이 동반되기도 한다. 누군 죽을병에 걸렸다가 살아나기도 하고, 누군 아주 난폭한 현실에서 놓임을 당하면서 확신을 더하기도 한다. 한데 이를 구분하지 못하여 자신의 부르심에 대해 모호하게 여기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그러고 보니 세 부류로 나뉘겠다. 하나는 앞서 말한 극적인 상황에서의 부르심이고, 다른 하나는 거듭되는 반항과 거절로 도망치다 붙들리는 경우와 마지막으로 하나는 미적지근하게 이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난하고 순탄하여 막연하지만 묵묵히 나아가는 경우도 있다.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한데 이 모두가 극적이다. 먼저는 우리가 주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산다는 일 자체로 믿음이 있다는 것이고 이는 엄청난 기적이고 놀라운 사건이다! 솔직히 이성적으로, 합리적이고 상식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믿음으로 산다는 게 타당한가? 눈으로 보이길 하나 귀로 들리기를 하나? 그저 느낌이고 마음의 일인데, 이를 어찌? 그러니 안 믿는 게 현대인의 사고로는 훨씬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아무리 어떻게 해도 어쨌든 믿어지는 일, 내 안에서 주를 바라게 되는, 두려워할 줄 아는 그런, 어떤, 마음은 단언하건대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믿음은 결코 개인의 취향이나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선택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믿는 믿음은 없다. 믿음이 있다면 그 안에 또한 주를 갈망하는 소원도 있다. 평신도로 살든지 목회자로 살든지 그건 다음 일이다. 스스로의 믿음을 의심한다면 그건 이미 그 속에 믿음이 있어서이다. 마치 지옥을 두려워할 줄 안다면 천국 갈 자이기 때문인 것처럼, 믿음이 없다면 그런 의심조차 들지 않는다. 그런데 믿음이 있다면 또한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모든 산 것은 살아서, 자라고 움직인다.
더 나아가 이는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 같다. 한 번 보고 말면 그게 어디 연애이겠나? 금방 보고 돌아서기 무섭게 또 보고 싶고, 같이 있고, 마주보고 있는데도 더 잘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저를 더욱 느끼고 싶은 것이 사랑인 것처럼. 그러나 그럴 때가 있는가 하면 또 무심히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이로도 사랑이다. 마땅히 여기는 것, 그래도 되는 사이, 그럴 수 있는 관계… 그것도 연인이다. 늘 감격스럽게 벅차올라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면 것도 또 어찌 숨 막혀 살겠나? 순간순간 이어진다면서 서로는 같이 하나다. 주와 함께 한다는 것,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때로 극적이고 때로 덤덤하다. 어느 것이 우선이고 우위에 있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소소한 때도 있고, 뜨거울 때도 있고, 일심(一心)이란 한 마음이라 그 둘이 하나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래서 분별 있는 기도가 필요하다.
보라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사 65:5).
말씀이 내 삶에 보응할 때, 더러는 무덤덤하게 받아지기도 하고 더러는 감격에 겨워 생동감이 넘칠 때도 있다. 보응이란 반응이다. 착한 일에 대한 혹은 악한 일에 대한 되갚음이다. 하나님은 이를 엄히 말씀으로 남기셨다. 하면 우리가 주를 의식한다는 것, 그 자체로 이미 일심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믿음이 자라서 더욱 바라게 되는 소망이다. 우리의 믿음은 어린 아이가 자라나듯 자라가야 한다. 주를 기쁘시게 하려 한다는 것은 그만큼 더욱 자라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한데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결국은 이 믿음, 우리가 믿는다는 것. 이게 그런데 우리 의지의 것이 아니라, 때론 막연하고 그래서 때론 회의와 갈등이 일 때도 있는 것이겠으니, 부디 씨름하시라. 그러려니 하고 남의 집 일로 여기지 말고, 필사적으로 싸우시라. 자기와의 싸움은 건강한 일이다. 이때 우리가 주의할 점은 누구와의 비교다. 누구는 어떤데, 나는 왜 이렇지… 하는 어떤 착오. 분명한 사실 하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두 달랐다. 저들이 마주하고 살았던 하나님도 서로와의 교제가 달랐다. 아브라함은 극적인 부르심과 저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는 데 있어 아들 이삭을 제물로 요구하시는 시험을 겪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이삭은 특별한 무엇, 어떤 사건이나 극적인 전환이 없이 무난하였다. 야곱은 파란만장하였으나 저의 성급함 때문이고 그 성질머리 때문이었다. 모두가 노아처럼, 모세처럼 희한한 경험으로 주의 부르심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그게 어떻든지,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이 엄청난 사실이 가장 우선이다.
그럼 아브라함이 큰가? 이삭이 큰가? 바울이 다윗보다, 다윗이 아브라함보다 나은가? 도대체 뭔 생각으로 이러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비교 대상이 아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베드로를 닮으라고 하거나 요한이 누가보다 낫다고 하시지 않았다. 그저 그 자체, 이삭은 이삭의 하나님으로 야곱의 하나님으로 모두는 산 자의 하나님으로 마주하였다. 이 상황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가! 감격이 없다면 그건 감사가 식은 것이거나 별로 감사할 게 없거나. 감사나 감격이 없다면 이는 원론적인 문제로 하나님과 상관없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여겨지는 것일 수도. 즉 허깨비를 것도 믿는다고 믿는 착각으로 살아가는 가장 불쌍한 인생일 수도! 차라리 안 믿는 자로 살면 그나마 속편히 살기나 하지?? n번 방이 어떻고, 사기아 강도와 도적질과 그 따위 윤리나 도덕은 다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이 모두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두려워할 줄 모른다는 것은 감사할 게 별로 없다는 소리고, 그 신앙이라 여기는 것은 헐렁하여 자기 기분에 따라 뜨겁거나 차갑거나 한다.
헐렁해진 사이로 바람이 든다. 미적거리고 뭉개는 동안 특별히 엄청난 죄에 빠진 것도 아니면서 집 나간 둘째와 다를 게 없는 맏이의 경우와 같다. 탕자는 아니지만 탕자다. 같이 저 또한 집 안에 있었으면서 한 번도 집 안에 있은 적이 없는, 그래서 저는 돌아온 탕자 동생을 오히려 시샘하였다. 자신도 이미 아버지의 집에 거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 채 자기 수고와 나름의 열심을 두고 아버지의 사랑을 탕진하고 살았던 것이다. 그때에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간곡하신 말씀,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1-32).” 그런 뒤 저는 과연 어찌 행동했을까? 아버지를 따라 들어갔을까? 여전히 집 밖에, 아니 집 안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지는 못하고 있을까?
종종 누가 나의 극적인 부르심, 강권하여 붙들려온 사역의 길을 두고 ‘부럽다’는 반응을 한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민망하다. 저는 참 겁도 없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데까지 몰려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두 손 들고 붙들려 온다는 게 얼마나 비참함 삶이었나를 저들은 알지 못한다. 그로 인해 나뿐 아니라 온 가족이 겪었던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오죽하니 죽는 게 더 나은 심정으로 주 앞에 선다는 것. 우리가 흔히 죽었다 살아난다는 말을 가학적으로 몽상하곤 하는데, 실제 그때에 주의 영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저는 자살을 한다. 극단적인 죄악을 저지른다. 이는 순간이다. 아차, 하는 찰나적인 순간. 누구는 그것으로 수염을 깎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지만 누구는 그것으로 손목을 긋는다. 우리가 오늘도 이처럼 주 앞에 무난하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한 암 환자가 죽을 날을 기다리다 극적으로 살아났다고 하자. 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기적이겠나? 그동안 항암에 수술에 온갖 고통을 겪다 모두 포기할 때 다시 살게 된 것이니까 말이다.
하면 그런 일을 겪지 않고 무난하게 오늘도 무사히 사는 날들은? 아니 도대체 어느 기적을 더 바라는 것일까? 확신이 필요하다고? 대체 무엇에 대한? 어느 정도의 확신을 원하는 것일까? 이만큼의 평안으로는 그저 무덤덤하다? 그럼 어디? 손 하나? 다리 한 쪽? 자식이라도 하나 잃고? 도대체 어떤 확신을 기대하는 것일까? 그저 무던히 그리고 무난하게, 지금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복이다. 부디 환상에 빠지지 마시길. 어떤 기대, 그 철딱서니 없는 덜떨어진 망상으로 주의 일을 뭉개고 있지 마시길. 사랑도 어찌 뜨거움으로 열렬하기만 하면 살 수가 있겠나? 우리는 종종 우리의 가벼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이는 불순종이고 엄청난 죄다. 범사에 주를 인정하라는 말씀을 보란듯이 무시하는 일이다. 그러니 그 길을 지도하심을 받지 않으려는 것이지. 결국은 하기 싫은 것을 뭐 그리 에둘러서. 차라리 한 번 대차게 박차고 집을 나간 탕지처럼 굴어보던가? 그러니 그 꼴이 돼지우리에 처박히는 것뿐인데, 것도 복이다. 저가 만약 하는 일마다 술술 잘 풀리고 잘 됐다면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겠나? 일상의 소중함은 무겁거나 가볍거나 주의 복이다.
누구처럼, 어떤 경험을 꿈꾸는 사람은 감사가 그 속에 메말랐기 때문이다. 평화가 무심하면 가치가 없다.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레 3:16).” 오늘 본문에서 이 한 구절의 말씀을 나는 그리 새롭게 읽는다. 감사가 없어지면 먼지만 날린다. 마음은 황량하고 극적인 무엇을 연상하는 환각에 시달린다. 나는 누구에게 사지육신 멀쩡한 것을 두고 얼마나 큰 기적이고 은혜인가? 되물었다. 여전히 확신을 운운하며 뭔가 다른, 어떤 확신을 바란다면… 놀이동산에서 즐거움을 만끽하고 뭔가 손에 쥐어주는 선물로만 사랑을 느끼는 어린 아이 같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결국 그 신앙이 어린 아이인 것이다.
그만큼 신앙이 자라지를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감사가 메마른 증거고,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무덤덤해져 분별을 잃은 것이다. 한 대 맞아야 정신이 차리지, 그럴 땐 다른 수 없다. 기어이 잃어보면 안다. 내가 보기엔 그만한 여유로움과 풍족함이 본인을 죽이는 모양이다. 죽겠다 죽겠다 하는데 정말 죽겠는 현실이 뭔지 모른다. 사역을 감당하는 데 있어 이를 마치 뜬구름 잡듯 뭔가, 누구처럼, 구획하고 설정하는 어떤 기대는 모두 악이다. 꿈꾸는 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아니다. 사탄은 그리 붙든다. 더 신중하게, 잘 생각해보고, 좀 더 있다, 것보다 자기만족이 들 때를 기다리라고 붙든다. 가끔 내가 누구더러 단 하루만 서로 바꿔 살면 알 텐데… 하는 소릴 하는 것은 그만큼 안타까워서다. 잃어봐야 알고, 살아봐야 안다는 것보다 미련한 삶도 없다. 어쩌겠나? 그럼 갈 데까지 가 보는 수밖에. 잃었다는 것은 영영 돌이킬 수 없다는 소린데, 잃고 난 뒤의 후회는 쓸모가 없다. 그러다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
누가 아직 그 부모가 살아계신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기며 효를 다한다. 인간적으로는 기특한데 영적으로는 안타까울 뿐이다. 그저 병 낫기만 바라고 한 해 더, 하루 더 사는 일에 만족하는 것은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다는 소리다. 죽을 뻔한 그 부모의 남은여생을 두고 ‘엄마가 좋다면’ 하고 허용하는 그 시간, 죽은 자의 시간보다 나은 게 없다. 그리 아직 생명이 연장된 것은 주를 믿고 구할 수 있는 기회인데. 돌이킬 수 없는 영혼들이 땅 속에서 아우성이다. 살았으니 그저 부모 좋을 대로, 거기가 절간이면 어떻고 염불이면 어떻고 여전히 하나님 없이 살아도 어떤가 하는.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망령되이 일컬음을 받게 하는지 알기는 알까? 그리 좀 더 생명을 연장하신 이유에 대해 믿는다는 저녀들 중에 하나도 이를 각성하지 못한다. 내심 그런 부분을 지적하면 듣기 싫어하니까, 차리리 그냥 죽는 게 본인을 위해서도 자식들을 위해서도 나을 텐데. 별로 개의치 않는 것은 믿는 자들의 태만이다.
예수님은 절실함으로 말씀하셨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그저 지금, 아직, 손가락이 붙어 있어 백체가 멀쩡한 게 다행이라 여기며 영생은 안중에 없으니. 엄마가 좋아하시면 됐어! 하는데 뭐라 더 말해준들! 그 일 후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어쩌면 우리의 안일함은 이처럼 한 영혼을 좌우한다. 단순한 이야기로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서는 안 된다. 아, 우울한 영혼이여!
하다못해 손톱에 거스러미 하나 잘못 뜯었다가도 며칠째 그 통증을 느끼며 쩔쩔매는데 하물며 영생의 일을 두고 어쩜 그리도 태평할 수 있을까? 죽여서라도 살리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연한 사랑을 과연 우린 실감이나 하고 듣나?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죽여서라도 그 영혼을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시겠다는 것인데. 누구와의 대화에서 아니 나의 무덤덤한 일상에서 나는 때로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것이 두렵다. 나는 고뇌한다. 감사가 사라지면 모든 게 허상이다. 지금의 평화가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지. 하나님과의 교제가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지. 오늘 본문의 화목제는 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 시편의 기도가 그렇게 다가온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시 116:1-2).
이를 우리가 누리고 느끼고 살고 있다면,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그 본심은 하나여서,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 여호와의 것이니라(레 3:16).” 정녕 언제 어떻게 우리 곁을 도사리로 있는 사망의 부르짖음을 들을 때,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시 116:3-4).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이 놀라운 특권! 은혜! 은총! 이 엄청난 가치를 어찌 사사로이 그저 일상적인 것으로 취급하여 주의 부르심에 뭉그적거리고 있는 것인지. 정말 어떤 확신, 남다른 경험을 바라는 것일까? 감당할 수 있겠나? 그 우회하였던 광야 40년의 비참한 세월을 낭만적으로 여기는 걸까? 두렵지 않나? 그러는 동안 나이는 들고 죽을 것들은 죽어 덩달아 고통 중에 있을 자녀들의 여정은 어쩌고? 누가 내게 ‘부럽다’ 하며 나의 극적인 부르심을 특이하게 여길 때 나의 후회, 나의 이 통회하는 마음을 조금만이라도 열어 보여주고 싶다. 아차, 하는 순간이 세월이다. 모든 게 산산조각이 났을 땐 후회도 소용이 없다. 그저 주의 긍휼하심과 주의 은혜로만 오늘의 평화와 교제는 가능하였다. 부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5).
아니면 벌써 죽어도 몇 번을 죽어야 하고,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갉고 있어야 할 영혼일 텐데. 부디, 좀 순진하시라. 두신 대로 그 자리에서, 주신 대로 그 몫을 다해, 하게 하신 대로 묵묵히 준행하며, 주께 감사하고 맡은 바 그 소임을 다하시라. 곧 어둠이 오리니, 더는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6-7).
오늘 시편은 한 구절 한 구절 그 마디마디마다 앞선 이의 간곡한 호소가 찬송으로, 울부짖는 메아리로 들린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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