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레 2:13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시 115:11
소제는 곡식이나 고운 가루로 이루어졌다. 소제는 피 없는 유일한 제사이지만 번제(민 6:14-15), 화목제(민 6:17), 속죄제(민 6:14-15)와 같이 드려졌다. 한 움큼 되는 가루를 제단에서 태워야 했고 나머지는 누룩 없이 구워 제사장들이 거룩한 곳에서 먹었다(레 6:14-17). 제단에서 태워지는 가루에는 감람유를 섞었고, 맛을 내기 위해 소금을 쳤으며, 태울 때는 유향을 함께 드렸다. 이렇게 구운 제물은 파이껍질과 비슷했고 제사 드리는 자는 소제로 드려진 것을 먹을 수 없었다. 소제는 모두 태워져 온전히 향기로 드려져야 했다. “이 소제는 아론의 자손 중 기름 부음을 받고 그를 이어 제사장 된 자가 드릴 것이요 영원한 규례로 여호와께 온전히 불사를 것이니 제사장의 모든 소제물은 온전히 불사르고 먹지 말지니라(레 6:22-23).”
소제는 히브리어로 ‘선물’ 또는 ‘헌물’을 뜻한다. 곧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신을 표현한다.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2).” 고운가루는 맷돌에 갈아 체질하여 고르고 가려낸 것으로 하고, 기름은 감람유로 신선한 곡물로 짰다. 향으로 쓰는 것은 유향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가져다가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같은 분량으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출 30:34-36).”
오늘 본문에서 나는 ‘언약의 소금’이란 표현을 한참 머금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소금 언약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민 18:19).”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러 소금이 되기를 강조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그렇게 오늘 말씀을 다시 묵상하면,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레 2:13).
곧 오늘의 헌신은 고운가루를 위해 맷돌에 돌려 체로 받쳐 걸러낸 것으로, 나는 가루가 되어 으깨어지고 태워져 향기를 낸다. 이에 반죽하여 불에 구워질 때 그 향기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헌신이다. 마침 어제는 사모로 전도사로 주의 사역을 감당하는 이와 그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 일반적이지 않은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는 마치 소제로 드려지는 것과 같아서 우리의 헌신은 제단을 채우는 향기가 된다. 이를 바울 사도의 설교로 좀 더 명확히 살피면,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후 2:15-17).
누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 감정이 고조되어 주차장으로 뛰어가 차에 두고 온 안정제를 먹었다. 단지 그저 사는 삶으로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로 산다면 좀 덜 고단한 삶이었을까? 사네 못 사네 하다 이혼하는 일은 이제 비일비재하나 더욱이 주의 일을 감당하는 데 있어 저 둘을 한 몸이 되게 하신 이의 뜻을 살펴야 했다. 너무 과도한 것들이 있지만 나는 저의 헌신이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말로는 헤어지고, 도망치고 싶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저와 함께 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여기서 다시 바울 사도의 설교를 음미하면,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다. 즉 어떤 냄새를 내야 하는데 그 냄새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냄새다. 곧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돌아보게 하게 하는 향기로,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즉 누구는 꼭 그래야 하나? 싶은 마음에 혀를 쯧쯧 차며 가련하고 안쓰러워할 수도 있지만 또 누구에게는 우리의 사는 향기가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을 돌아보게 하는 냄새가 된다. 안 믿는 시부모와 옅은 믿음으로 완고한 친정식구들에게는 물론 곁을 같이 하는 ‘발달장애아 모친들’에게도 저의 모습은 남다른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모습이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하고 되묻듯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일찍이 나는 나의 유년의 이런저런 슬픔과 낭패와 어려움이 더는 나를 찌르거나 왜곡하지 않게 되었다. 소위 왕따에서부터 여러 눈총과 외로움과 편견으로 얼룩진 ‘그럴 수밖에 없는’ 나의 특수한 상황에 대하여, 나는 더 이상 무장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이를 위해 더욱 애썼으며 그래서 더 사람들 틈에 섞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래서 그 와중에 ‘낙천적이고 성격 좋은 아이’로 성장할 수 있었고, 그러느라 혼자 씨름해야 했던 어두운 시절에 대해서는 지금도 가끔씩 울다 깨곤 할 정도이다. 그러니 그토록 사무친 게 많을 법도 한데 우선은 이를 그때마다 글로 써서 어디에 내거나 누구에게 들려주는 기회가 있었고, 이는 덮어두고 숨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치유력을 가졌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도 무의식을 의식의 세계로 끄집어냈을 때 더는 어두움이 아닌 것을 강조한다. 상담도 그런 원리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감사한 은혜는 아무리 개떡 같은 신앙으로 살아왔다 해도 그때마다 주께 아뢸 수 있었고, 눈물로 나의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고 호소할 수 있었다. 즉 차마 부모에게도 말할 수 없던 일을 하나님께 고하며 원망도 하고 서러워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오늘에 이르러 누구를 마주하고 저의 남다른 어려움을 헤아리는데 보탬이 될 줄은 또 누가 알았겠나? 물론 여전히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세상에서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감정이 볶여 불안이니 우울이니 공황이니 하는 따위의 진단으로 안정제를 의존하기는 하지만… 이 또한 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함으로 굳이 숨기지 않고 자랑하기까지 한다. 바울 사도가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였던 것처럼,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후 11:30).
왜 굳이? 저는 저의 약함을 자랑하였던 것일까?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12:5).
이는 결국 자신을 위해서이다. 사람이 한 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이쯤 나이가 좀 드니까 알겠는 게 평범한 사람은 없다. 마냥 좋고 또 좋은 사람도 없다. 겉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지 그 속도 내 속과 다를 게 없다. 내남없이 속은 탄다. 으깨지고 으스러져 고운 가루가 되어 태워진다. 이를 제단에서 불살라 하나님께 올려지는 향기로써 드려질 것인지, 사느라 그저 사는 데 힘에 겨워 애간장을 태우며 사는 일에 급급할 것인지. 곧 사망의 냄새로 그칠지, 생명으로 생명에 이르는 냄새로 승화할지는… 이에 바울의 진술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2:9).
오늘 내게 두신 이 모든 약함이 도리어 나로 하여금 자랑거리가 되는 것은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고 더해짐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처음 주의 말씀은 받기 어렵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상황, 저런 인간을 남편으로! 이런 아이를 자식으로! 내게 떠맡기듯 안기고 이고 지게 하신 것이 서러울 따름인데, 이를 ‘내 은혜’로 규정하여 결코 어쩌다 우연히 그리 된 인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그 안에 있음을 암시한다. 고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하심은 참으로 잔인하고 모질게 들리는데, 나는 저이에게 말하길 하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나의 약함이 도리어 하나님을 더욱 바라게 하는 능력이 되어준다.
같이 일어나 식사를 하러 나가다 말고, 저… 하며 조심스럽게 묻기를 한 쪽 다리가 없는 것인가? 하고 그간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남자 같으면 바지를 내려 보여주었을 텐데, 나는 피식 웃으며 ‘그런 게 궁금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저런 상황에서 어찌 그렇게 감사함으로 당당할 수 있는가? 하는 의도에서 부럽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겠거니! 몇 차례 저의 그런 표현을 들을 때면 나의 이 냄새가 꾸며진 거짓이 아니어서 감사하게 된다. 실은 그럴 때도 있었다. 억지웃음, 서로를 위한 빈말, 가벼운 농담으로 치고 마는 어떤 모멸감들이 이제는 나야말로 자랑하게 되는 근거라면, 나의 이 약한 데서 주의 온전하심이 드러나기를. 바울은 말하길,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끌어 내고 있다.
이를 어찌 맨 정신으로 받을까? 나는 아이 일로 씨름하는 한 어미로서의 저이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이를 두고 하나님이 나타내시고자 하는 놀라운 ‘온전하심’에 대하여 어찌 설명할 길이 없어 가끔은 나를 그 자리에 놓고 예를 들기도 하는 것이다. 지진아에 어디 특수학교로 보내 사회와 격리하고 따로 보호를 받으며 살게 하라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그 나이 때 나는 서러웠다. 어떤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여 울컥, 하고 가슴을 치댈 때가 왜 없겠나? 그러나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는 사도의 증거는 결코 허풍이 아니다. 과장된 자기만족, 낙천적인 생각 따위도 아니다. 이는 오직 주의 전능하심과 그 온전하심을 아는 것으로, 되레 야고보 사도는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약 1:10).” 설령 자신이 적당하다 하고 부요한 자로 여겨질 때 오히려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곧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몸을 만들고 이를 좀 더 연장하여 온갖 것을 쳐 바르며 기를 쓰고 늙음을 피한다 한들?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엄연히 다르다. 곧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4:16).” 그러니 무엇을 부러워해야 할까? 나이 사십 오십에도 동안을 유지하고 젊음을 자랑하느라 매일 공들여 얼굴을 또는 몸매를 관리하는 것도 중요한데, 그런들? 남들보다 조금 더 지체될 뿐 똑같이 늙고 이 모든 것이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는 것을! 이것이 어찌 외모만을 이르는 것이겠나? ‘우리의 속사람이 날로 새워져야 한다.’ 실제 이를 염두고 두고 사는 자가 그리스도인들이다. 믿는 자로 산다는 사람은 그렇게 겉사람을 두고 애쓰지 않는다. 하물며 아이의 상태? 또는 자신의 어떤 감정 문제? 그것이 누구를 증오하고 원망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분명히 성경은 주가 나를 사랑하심을 알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계 3:9).
나름 자기만족에 겨워 사는 무리들을 어느 훗날 우리 앞에 꿇려 주가 우리를 어찌 사랑하셨는가를 알게 하실 것이다. 고로,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2:9).
저들이 다스리는 나라, 이 세계의 부러움이 집중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모든 게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는 것들이다. 권세도 그 어떤 아름다운 미모도 가진 온갖 부요함도 모든 게 일시적인 것일 뿐, 정작 우리에게는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2).” 누가 자신의 현재를 두고 신세한탄을 하다 그 도를 넘어설 때는 가차 없이 그 말을 중단시키고 더는 말하지 못하게 하는 까닭도 그래서이다. 서러움은 마치 부풀리는 누룩 넣은 빵 같아서 조그맣던 것이 순식간에 불어나 자신을 한탄하다 부모를 또는 신랑을, 아이를 더 나아가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덧붙여 이른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후 2:7).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이고, 매일을 마주하고 사는 헌신이며, 오늘 나로 여기에 두신 이의 뜻을 다해 그 사명을 완수하는 길이다. 이에 나는 오늘 우리가 드려지는 소제, 곧 고운 가루로 불태워져 그 향기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게 하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게 하는 냄새가 되어야 한다. 그리 말씀을 묵상하며 누구를 생각하고, 저의 어려운 처지를 가만히 생각하다 주의 도우심을 구하고 바란다. 이에 오늘 시편의 기도가 찬양이 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오
너희의 방패시로다
(시 115: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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