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레 9:22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시 120:1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한 일이 없다면 이보다 더 헛헛한 신앙도 없다. 믿기는 믿는다지만 남의 뒤를 따르는 격이라, 사람으로 갈팡질팡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개인적인 만남, 날마다의 동행 그 실감나는 하나님과의 동행은 오늘 시편에서와 같은 회개로부터 비롯된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궤사한 혀에서
내 생명을 건지소서
너 궤사한 혀여 무엇으로
네게 주며 무엇으로 네게 더할꼬
(시 120:2-3).
궤사한 혀로 무슨 말을 고할 수 있을까? 내 생명을 건지소서. 주께 고하고 자복하는 일. 가끔 친구와 통화를 하면 주일은 잘 지키는지, 성경공부는 마저 했는지, 믿음 생활은 어떠한지를 점검하듯 묻는다. 코로나로 인해 주변의 많은 성도들이 신앙을 잃었다. 교회를 못 가고, 혼자 영상을 통해 예배를 참여한다는 것은 여간 수준 있는 참여가 아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것이 사람들과 모이지 않고 누가 보지 않는다고 해서 허물어지는 덴 순식간이다. 그러니 친구는 그래도 대면예배 신청을 하고 주일에 교회로 나아가려고 하는 의지는 훌륭하다. 전에 말하길, 안 그럼 동영상으로는 예배에 참여하지 않게 되더라고! 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였다.
곧 우리 자신의 ‘거짓된 입술과 궤사한 혀’를 두고 참담함을 느낄 수 있는 영혼이 복이었다. 그렇게라도 믿음을 지키고 신앙을 유지하는 것에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더욱이 ‘줌’으로는 그래서 양방향으로 서로 보고 듣고 말할 수도 있지만 유튜브나 밴드 같은 경우는 일방적인 송출이거나 녹화본이라… 이러한 시점에 ‘내 생명을 건지소서.’ 하는 시인의 자괴 섞인 절규가 우선이지 않을까? 그리고 화자가 되어 자신에게 이른다.
너 궤사한 혀여 무엇으로
네게 주며 무엇으로 네게 더할꼬
그래놓고도 전혀 자신의 잘못됨을 인정하지 못하고 헛된 말과 변명으로 일관하게 되는 처지를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본심은 사망 안에서 스스로 왕 노릇한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1).” 새삼 이러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누구는 주의 길을 가면서도 그 확신이 별로라. 진짜 자신을 부르신 게 맞는지 혹은 그저 그리 여기는 자신의 오해인지, 이 길이 맞는지 혹은 아닌지, 잘못 가고 있는지 잘 가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다는 것에 의아할 따름이다. 이는 결국 회개가 수반되지 않는 기도와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경외하는 마음의 결여가 스스로를 애매모호하게 한다. 누가 말하길, 목사님은 부르심에 따른 확신이 분명하잖아요!? 하고 반문하듯 되묻고는 자신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부르심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게 되는 까닭은 이래저래 목회 일성에 서서 주의 일을 한다고 하는 사역자들로 살면서 이처럼 희미한 것인데… 그럴 수 있다. 성령의 부르심이 불꽃이 튀고 죽을 고비까지 넘기면서 확실하게 찾아오시는 경우가 있고 그저 희미하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여 애매할 때도 있다. 어느 것이 좋으냐 하는 물음은 금물이다. 체험이 확실하다는 것은 그만큼의 삶이 고달팠고 그야말로 죽을 고비를 넘기는 시련이 있었다는 소리다. 애매하다는 것은 오히려 살만하였고 무난하였다는 은혜다.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죄악을 멸하신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 17:13).” 이러한 말씀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 것, 일상에서 자신을 돌아보아 하나님을 느끼고 확신하는 신앙이 필요하다. 그저 혼탁하여 늘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상황으로 주의 일을 감당한다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다. 나가서 뭔 일을 한들 돈벌이가 낫지 않겠나? 누구를 만나 어떤 일을 도모한들 이보다 보람이 있지 않겠나? 가장 저주 받은 영혼은 유리하는 형벌이다. 처음 살인자 가인이 받은 죗값으로 저는 하나님 없이 유리하며 떠돌아야 했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 4:12).”
나는 한 친구를 두고 기도할 때 주의 살아계심이 저의 삶에 역사하시기를. 삶 가운데서 저가 확신하며 이를 간증하며 주를 찬송하는 삶이되기를 위해 기도한다. 저는 늘 막연하여서 교회도 가고 성경공부도 하였는데, 늘 자신은 없다. 나는 저에게 얼른 마저 마치고 교회에서 권하는 리더가 되어 누구에게 성경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에 서라고 충고한다. 그럼 자신이 그걸 어찌 하겠나? 하고 이를 회피하려고 나머지 몇 주간의 성경공부를 계속 미루고 있는 것이다. 그의 답보 상태에 대하여,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14).” 가인의 절규를 들려줄 수만 있다면. 어떤 두려움, 하나님 없는 삶에 대한 공포를 저 또한 알 수만 있다면….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 7:19).
어쩌면 우리의 가장 큰 난제는 적당함이다. 건강도 돈도 가정의 화목도 하는 일의 무난함도 오히려 저의 영혼을 미적거리게 한다. 거기다 스스로 늘 세상적인 관점에서 ‘그럴 수 있지 뭐!’ 하는 정도로 자기 곁의 주의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겠으니. 이는 결국 몸의 사욕에 순종함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2).
이 길이 맞나? 싶을 때, 내가 주를 바라고 섬기는 이게 바로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오히려 건강하다는 것이다. 아직은 감각이 살아 있다는 소리다. 어제 누구에게 그리 일러주었다. 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흉내라도 내듯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를 하고, 주를 의지한다고 하는데 이게 맞는 것인지… 저의 불안과 염려에 나는 오히려 응원을 하였다. 이는 분명 하나님이 더하시는 근심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0).
이 명백한 사실을 어떻게 저에게 알려줄까? 바울 사도도 이를 기록하면서 지금 나와 같은 심정은 혹시 아니었을까? 그래서 저는 더욱 자세하게 설명한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1).
더럽다고 느껴야 손을 떼고 몸을 씻는 것처럼, 자신의 죄와 허물을 알아야 주 앞에 회개가 나온다. 그게 아니면 온통 변명뿐인 것이다. 누구 탓을 하고 무엇 때문이라 돌리고, 오히려 자신은 억울해 하는 그 영혼은 황폐할 따름이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또는 친구의 그런 희미한 체험에서 나는 성령의 내주 인재하심에 대해 생각하고 확신하게 된다. 뭔가 특별한, 어떤 초능력 같은 그런 생을 사는 게 신앙이 아니다. 범사에 주를 인정한다함은 마치 한 몸이 되어 묻고 또 답하고, 의지하고 또 아뢰는 일은 자연스럽다. 혼탁할 게 없다. 단순하고 선명하다. 아닌 건 아닌 것이고, 틀린 건 틀린 것이다. 아닌 걸 병이라, 어쩔 수 없는 심신미약이라 하고 틀린 것을 다른 것이라고 허용하면서 나름의 합리적인 사고를 스스로 견지하려 한다면, 더 나은 게 있을 때 그 이상을 좇아 하나님을 멀리할 수도 버릴 수도 있다는 소리가 된다. 하다못해 ‘여기까지 인도하신 이’가 계신데 이를 그저 우연이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누가 다녀가면 나는 내내 생각이 많아진다. 어제는 소파에 누워 짧고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가 이른 시간에 산책을 할 겸 천천히 걸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모처럼 친구와의 통화에서 요즘 믿음 생활은 어떤지… 나야말로 달라진 것 가운데 확실하다면 그저 관심은 그것뿐이다. 사업은 어떤지, 건강은 어떤지, 혹여 무슨 일은 없는지, 하는 따위에는 다음이고 교회는 빠지지 않고 주일을 잘 지키는지, 성경공부는 잘하고 있는지… 그래서 전에 누가 나더러 꼭 선생이 숙제 검사하는 것 같다는 소릴 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쩌겠나? 나의 관심은 나도 모르게 저가 주 앞에 잘 지내는가, 하는 것이 되었으니!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결국 그 사람의 정도는 그 사람의 관심에서 확인된다. 입만 열면 하는 말, 온통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생각들, 무슨 일로 바쁜지,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지, 어디에서 누구와 어울리며 지내는지. 무슨 책을 읽고 어떤 것으로 자신의 즐거움을 삼고 있는지. 이보다 더 분명한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의 증거는 없다. 죄가 있는 곳에 주의 영이 함께 하지 못하신다. 죄도 이를 꺼려해서 돈돈거리고 늘 사느라 급급하여 아무나, 무슨 일이든, 그게 뭐 어떻든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의 모습에서는 저의 비애만 있을 뿐이다. 그 영혼의 절규 말이다. 겉은 멀쩡한데 속은 문드러지는! 일찍이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에게 경고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1-32).
그러니 보면 사는 게 늘 밀 까부르듯 정신이 없고 복잡하다. 해도 해도 끝도 없는 집안 일? 챙겨도 챙겨도 한도 없이 마음이 쓰이는 애? 가족? 사느라 열심히 사는데도 나아지는 게 없는 것 같은 살림살이? 늘 쫓기듯 사람들과 어울려 그런 걸 사회생활이라 하며 신앙생활보다 앞세우는 충성? 그러는 동안 저는 모르지만 그 영혼은 신음하고 있다. 아,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시 120:1).
이러한 확신이 없다면 무슨 수로 그 신앙을 유지할까? 이는 바람 앞에 촛불 같아서 손으로 가리고 서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생활이었으니… 누구의 친정이야기, 아이 문제, 신랑의 이런저런 모습, 그리고 끝도 없는 가사노동에 내가 듣다 질식할 것 같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고전 14:33).” 사도는 안타까움으로 묻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36).” 뭐라 이르면 뭘 몰라 하는 소리로 치부하니, 똑같은 상황에서도 마리아는 예수 앞에 앉아 말씀 듣기를 더 선호하는데 마르다는 분주하고 어지러워 급기야 그 마음에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어쩔까? 주가 우리에게 부탁하신 게 무엇인가를 바로 알면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말씀을 부탁 받은 사람으로서의 삶이 기준이어야 한다. 이는 사역자니 평소니 가릴 게 없다. 직분과 상관없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길이다. 누구에게도 그래서 다음 주부터는 성경공부를 중심으로 보자고 하였다. 푸념은 끝이 없고 넋두리는 똬리를 튼 능구렁이의 새끼를 앓은 알 같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거리두기! 그야말로 손 떼기. 주께 맡기고, 더는 관여하지 않는, 이는 사실 주께서 일하시게 하는 동안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 새를 못 참고 자꾸 뚜껑을 열어젖히니까 뜸이 들지 않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여전히 공갈젖꼭지를 물고 감사를 외치는 꼴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그러니 나는 잘하고 있단 소린가? 누구보다 낫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어제도 누구에게 일러 그렇지 못하니까, 나야말로 연약하고 비루하고 어려워서 정신과 약물을 의존하며 누가 오면 더 쩔쩔매면서 빌빌거리는 게 아닌가? 어찌 내가 더 잘났다고 하는 소리겠나? 그리 증거하면서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바울 사도의 절규는 오늘도 이어지는 게 아니겠나? 의연하고 당당한 신앙인? 우쭐하고 늘 여유로운 목사님? 사거리에서 두 팔 벌려 남들과 다른 자신을 두고 감사의 기도의 올리는 바리새인 같이 개똥도 아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22-23).” 이게 우리의 실체라. 날마다 싸우는 게 정작은 나 자신이라. 누구 일로 마치 내가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 같으나, 이를 티내는 사람은 허풍쟁이에 사기꾼이다. 우리는 오늘 시편의 고백처럼 회개로 날마다 첫 발을 뗀다. 하루를 연다. 회개는 감사와 대치하여 감사가 열리면 회개는 자동으로 따른다. 이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25).
이것이 우리의 실체라. 주 없이 살 수 없어 나는 필사적이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궤사한 혀에서 내 생명을 건지소서
너 궤사한 혀여 무엇으로 네게 주며
무엇으로 네게 더할꼬
장사의 날카로운 살과
로뎀나무 숯불이리로다
(시 120:2-4).
나의 나 된 것에 너무 끌려가다가는 한도 끝도 없다. 때론 무책임하다고 비난을 듣더라도 될 대로 되라고 둬 두고, 지금 자신의 실태를 바로 아는 급선무다. 성전으로 오르는 자의 첫 기도이다.
메섹에 유하며
게달의 장막 중에 거하는 것이
내게 화로다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와 함께
오래 거하였도다
(5-6).
무엇을 선호하고 묵인하고 살았는지, 저 참혹한 어둠을 비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돌아오는 것은 번번이 비수뿐이라. 남편의 말 한 마디가 찌른다. 자식의 태도나 무심함이 찌른다. 언제부턴가 우리 손에 믿음의 방패가 없다. 방어할 능력도 없고, 이를 쳐 낼 성령의 검도 없다. 아,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저희는 싸우려 하는도다
(7).
그러니 사는 게 지옥이라는 말.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구원의 날갯짓을 위해서도 먼저는 주 앞에 고하는 회개부터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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