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 11:45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 122:1
부정한 것에 대해 일일이 열거한다. 상대적으로 그만큼 거룩을 바라신다. 오늘을 하루 더 연장하는 데 따른 목적이기도 하다. 살아서 우리가 사는 이유 말이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이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로 ‘출애굽’을 감행하셨고 이를 알리신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11:45).”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바 된 사람을 대하는 일에 있어서도, 저를 어찌 창조하시고 사랑하셨는가를 묵상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 1:16).
이를 위해 오셨고, 죽으셨고, 부활 승천하셨다. 그것으로 끝이라면 모든 게 허망할 따름인데 여전히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말씀이 우리로 충만하게 하심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4).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삶. 이를 위해 함께 동행하는 데 따른 즐거움을 오늘 시편은 찬송한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 122:1).
우리가 함께 가자 하는 곳, 이를 오늘 레위기서는 강조하는 게 아닐까?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11:44).” 행여 조심 또 삼가, 근신하고 깨어 주의 일에 우선하는 것. 그런 데 있어 항상 걸림이 되는 것은 우리 안에 막힌 담이다. 무의식 가운데 갇힌 자아, 어릴 때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저도 모르게 처했던 행동과 생각들이 고착되어 오늘의 경건한 우리 삶을 위협한다. 의식하기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불쑥, 어떤 감정이 또는 응어리진 마음이 건드려지면 욱, 하고 올라오는 노여움! 화! 그것으로 상대가 또 똑같은 상처로 신음해야 하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무의식 가운데 자신은 늘 온당한 것이다. 그랬었고 그래왔고 그래도 되는 것으로, 아이를 대하고 아내를 업신여기는 것의 답습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기까지 이 땅에 오셨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 되시기 위해서이다. 둘로 하나를 만드시려고 오셨다. 즉 우리 안에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기 위해 직접 육신을 입고 오셔서 육신으로의 값을 치르셨다(엡 2:14). 즉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15-16).
그럼에도 여전한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린 통회하고 자복하며 이를 주께 고하여야 한다.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자기 속의 자신을 두고 하나님께 아뢰어야 한다. 그러려면 스스로의 문제를 문제로 인식해야 하는데, 이는 죄의 문제라. 모든 이가 ‘아기 예수 오심’을 두고 낮고 천한 자리에 이르러 우리를 위로하심을 두고 기뻐하는 정도에서 경배할 따름이다. 실은 죄 때문인데 스스로의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는 한 자기 안의 죄상의 심각성을 알지 못한다. 그 알지 못하는 무지함이 죄다. 스스로 자기는 늘 억울한 것이다.
별 것도 아닌 일에 감정이 상한다. 그 속에 있는 어떤 자존심이 여전히 잔뜩 부어 있다. 건드리기만 해도 화가 돋운다. 자초지종을 구분할 겨를이 없다. 감정이 올라오면서 감정은 더 끓어오른다. 아이 앞에서 막말을 하고 아이에게도 함부로 처신한다. 자신이 당한 그대로를 답습하는 것으로 그것이 왜 나쁜지를 모른다. 그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아픈 것도 모르니까, 아프지만 않으면 다 괜찮은 듯 또 친절을 베풀다가 순간 욱, 하고 치는 화에 모든 평화는 산산조각이 난다. 성탄절을 앞두고 어느 가정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로 인해 마음이 상한 누구의 이야기를 추적해본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저만의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이를 위하여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까? 성탄절을 그저 기쁨과 즐거움으로 퇴색시켜서는 안 된다는 게 그래서 나의 생각이다. 오히려 부활절의 엄숙하고 슬픈, 비탄의 분위기와 성탄의 기쁨과 즐거운 분위기를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다. 부활절을 성탄절처럼, 성탄절을 부화절처럼 우리의 인식이 바뀌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그 이유를, 우리의 죄는 그만큼 참으로 악착같아서 스스로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결국 예수의 오심과 죽으심은,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8).
이는 너와 나의 동행의 값이다. 선물이며 복이다. 다시 오늘 시편의 찬송이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세 번째 찬송의 주제이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 122:1).
그럴 수 있는 것은 용기도 결단도 아닌, 자신이 얼마나 구제불능으로 도대체 스스로는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인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빛으로만이 인도하심을 받는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달콤하고 즐거운 일도 아니다. 어쩌면 두고두고 회피하며 살고자 하는 자기 안의 철저한 자신과의 싸움이며 이 싸움은 지리멸렬한 결과로 사람을 늘 지치게 한다. 성경은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를 설명하고 계신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히 10:31-32).” 이는 엄청난 싸움을 수반하였다는 전제다. 이를 회피하느라 미적거리고 주의 길 가는 것을 꺼려하는 사람도 있고, 애써 주의 길을 간다고 가면서도 실은 저의 거죽만 목사일뿐, 성도일뿐 실상은 여전히 ‘어린 아이 때의 일'을 버리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제 하나님을 아버지라 정답게 부르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다.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저로 가로막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마냥 좋고 행복한 것이 아닌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된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절규도 그것이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 하여 어쩌면 이를 알면 알수록 우리 믿는 자의 기본 자질은 우울증환자가 되어 씨름하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실상의 자신은 추구하는 자신과 늘 부딪친다. 그리고 그 싸움은 하루이틀 그러다 말 싸움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죽을 때까지도 계속된다. 그런데 이러한 싸움조차 없다면 그게 더 미친 것이라! 저는 죽었거나 심히 상하여 병든 것이거나, 그 영혼이 황폐할 따름이다. 건조하고 밋밋하다. 모양은 믿는 사람인데 별로 세상과 다툴 일이 없다. 옛 생활의 자신과도 그럭저럭 잘 지낸다. 보살도 만나고 굿도 하고 부적이나 성경이나 아무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손에 이끌림을 당한다는 사실을 별로 실감하지 못하는 무덤덤함은 그게 아니거나 병들었거나 둘 중 하나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영적침체도 이를 누누이 강조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은 스스로를 돌아보아 얼마나 정직한가를 되짚어야 한다. 바울의 극적인 절규가 이를 증명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뭐 이 정도까지 괴로워할 일인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면 그만일 텐데. 영적침체에 빠진 사람은 그러는 곁의 누가 광신자로 여겨진다. 적당히 믿지, 유난을 떠는 것 같아 꼴불견이다. 스스로는 아무렇지도 않다. 안 믿는 남편이나 아내나 가족들의 영혼에 대해 별로 슬프지가 않다. 두렵고 떨림으로 하루하루를 마음 졸이지도 않는다. 저가 좋으면 그저 같이 좋은 것이다. 화목한 가정을 위해서면 교회도 잠시, 하나님은 뒤로 미뤄두고, 예배는 나중에. 기꺼이. 얼마든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라면! 그리 할 수 있는 가벼운 영혼의 빈 주머니여! 과연 괴로워하지 않고도 살 수 있겠나? 지금 울지 않으면 영원히 슬피 울며 이를 갈지 모른다. 그저 시시덕거리며 즐거움만 강조하는 거짓 화평으로 크리스마스를 즐기며 와인 한 잔에 황홀해 하는 가엾는 영혼이다. 벗겨내야 한다.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우리를 쥐고 밀까부르듯 까분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목사라고 다 목사가 아니고, 교회 다니는 신자라고 다 같은 성도가 아니다. 아!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롬 7:14).” 과연 우리는 바울과 같이 철저하게 자신과 직면하여 싸우고 있나? 천하에 바울 같은 사람도 그처럼 주 앞에서 온전하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도 자신과의 싸움으로 치열하였는데 하물며.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15).” 이로써 슬피 울며, 내 맘 대로 안 되는 나 자신을 두고 주의 이름 앞에 엎드리고 있나?
성탄절 아침, 어느 가정의 어떤 소동을 듣고, ‘별 것도 아닌 일’에 불쑥, 화가 올라오는 것의 비밀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순간 밑도 끝도 없는 혈기, 아이에게 막말을 퍼붓고 아이 보는 앞에서 아내를 우습게 막대하고, 오히려 아이가 그 와중에 엄마에게 다가와 무조건 잘못했다고 아빠한테 빌라고 하는 이 비현실적인 현실… 그리고 저는 곧 있다 교회에 가서 목회를 감당하고 한 영혼을 대하고, 말씀을 증거하고 기도를 하고! 이 무슨 넌센스 같은 사실인지. 서로는 살기 위한 몸부림 치는 것이다. 저도 저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를 괴로워할 줄 모르고, 이 일로 신음하는 가족들의 상처를 모르고, 그게 뭔가 문젠지! 그저 자신만 억울하고 화가날 뿐이다. 나는 누구의 말을 듣다 나를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다시 바울의 절규,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6-17).”
아, 이 모든 게 죄 때문이다. 그처럼 구는 게 그가 아니라 죄다. 목사가 아니라 목사 이전의 죄성이다. 사모 이전에 죄성이다. 엄마 이전에 죄성이다. 어릴 적, 어린 아이 때부터 고착된 자신 또한 죄 때문이다. 모두의 죄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사건이 성탄절이다. 그런데 흥청망청 즐겁고 기쁜가? 그리하여 전능하신 이가 그 영광의 보좌에서 일어나 이 낮고 천한 데까지 이르러 사람으로 복음을 전하시고 복음으로 죽음을 감당하셨는데, 이를 묵상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선물을 뜯어보고 와인 잔을 기울이며 캐롤에 맞춰 룰루랄라 하게 되나? 이 모두는 우리의 죄 때문이었다. 그렇게 ‘내 속에 거하는 죄’ 때문이라는 자각이 없는 한, 이 값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이 엄청나고 끔찍하고 송구하고 민망하고 부끄럽기만 한 상황을 케이크의 달콤함에 녹여버릴 셈인지. 나는 누구의 이야기로 성탄의 비애와 부활의 영광된 기쁨을 새삼 돌아보았다.
저는 광채이시다. 우리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이유가 있었다. 이는 엄연히 즐겁고 기쁜 일이나 그러기까지 당면해야 하는 자신의 추하고 더러움도 감당해야 한다. 하다못해 정신과적인 치료에서도 상담이라 하여 예전 일을 떠벌이고 이를 직면하게 하는 것인데, 하물며 자기 안의 죄성과 마주하지 않고 어찌 그 막힌 담을 헐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더욱 주를 바라고 앙망하는 마음으로밖에 다른 길이 없다. 좋은 게 좋은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다. 희희낙락할 게 아니다. 울긋불긋 반짝이는 불빛을 꾸미고 예뻐라 할 감상의 시간이 아니다.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시 34:5).
곧 우리가 이제 주의 빛을 내야 하는데, 거죽은 멀쩡하나 그 속은 썩은 것이어서 그대로면 오늘 말씀이 강조하는 거룩은 불가능하겠다. 그야말로 뜬구름 잡는 소리가 되는데, 천국은 거룩한 자들만이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거룩 거룩 외치며 즐거워하는 곳일진대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성탄절 이른 아침, 전날의 이런저런 일로 누구의 전화까지 받고 내내 마음이 어려웠던 것은, 그것이 곧 내 얘기이고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5).” 곧 우리 스스로는 우리 자신을 이겨낼 수 없다. 그게 어디 저들만의 문제인가. 저도 안 되니까 저러는 것이다. 자신도 자신이 괴로우니까 악다구니를 써대는 것이고, 그 모순된 행동을 하면서도 주의 일을 하는 게 아닐까? 정말 아무런 찔림도 후회도 회개도 없을까? 이 일에 대하여는 나는 모른다.
다만 다른 수가 없다. 주 앞에 고하고 또 고함으로 자신을 마주해야 한다. 그 실체를 낱낱이 밝혀야 하고 실토하지 않으면, 그 속의 옛 기억들은 더욱 꽁꽁 숨어서 마치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겉으로는 얼마든지 목사도 하고 교회도 커지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도 받을 수 있다. 친절하게 웃는 낯으로 살아갈 수 있다. 가장 쉬운 게 ‘친절한 타인’이다. 친밀해지면 친밀해질수록 그 친밀함의 실체를 보게 된다. 추한 기억과 상처와 마주해야 한다. 마주하기 싫은 가난과 그 어릴 적, 억압 받았던 자아와 오늘에도 여전히 자신을 조종하고 있는 죄의 위력을 알아야 한다. 누가 툭, 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자지러지게 놀라, 화가 또 서러움이 올라오는. 특히 가장 만만한 가족들한테 터뜨리는 분의 실체를, 고름을 짜내듯 곪고 쏙은 죄의 염증을 도려내야 한다. 그러려면 실체를 알아야 하고, 가만히 덮어두고 살았던 아픈 기억을 들쑤셔야 한다. 제거한다는 것은 주께 고함이다. 아내와 아이에게 실토하고 교회 앞에 기도를 구해야 한다. 아니면 화 있을진저!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
(사 5:18-19).
대단한 착각이다. 죄의 특성은 자기 일(그럴 수 있는 자신)은 옳은 것이다. 이를 논리정연하게 주장할 수 있다. 이를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히 설명하고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다. 결국은 하나님 탓으로 돌릴 수 있다. 그럴듯하다. 저를 말로는 당해낼 수가 없다. 스스로도 자신의 논리에 설득당해 온 세월이다. 아, 이 끔찍한 악순환의 연속이여!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
(20-23).
자기만족에 겨워하듯 포도주에 취한 자와 같다. 자아도취에는 약도 없다. 뇌물, 거저 생기는 것에 안주하려는 것으로 공의를 빼앗겼다. 하나님의 공의를 어지럽혔다. 어느 가정의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실체다. 우리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죄의 실상이다. ‘화 있을진저!’ 이를 회개하지 않으면 화 있을진저! 도대체 얼마쯤 매를 맞고 끌려 다녀야 정신을 차릴까? 우리 영혼이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기까지, 이게 어찌 우리 의지로 되는 일인가? 하나님의 무서우심이 우리로 진정하게 한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 1:4).”
스스로 자신은 아니라 자부하는가? 자신의 믿음을 확신할 수 있나? 이를 무엇으로 증명하겠나? 우리의 고질적인 우유부단함이나 난폭함은 하나다. 남을 공격하고 서로를 질타하는 일이나 스스로를 의기소침하게 두는 것은 하나다. 이 모두는 거룩을 상실한다. 죄의 결과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을 위해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하고 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 11:45).
이를 알 때 우리는 서로를 이끈다. 함께 가자, 저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 2:10, 13).
그렇게 우리가 기뻐해야 할 기쁨은 다른 결이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 122:1).
그리하여,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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