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휘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 그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라 이는 내가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레 16:2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 128:1
함부로 주의 전에 들어가 아론의 두 아들이 죽었다. 이에 저에게 이르시기를 “성소의 휘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 그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라 이는 내가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하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모세를 통해 아론에게 전하신다(레 16:2). 당시 구약 시대에는 그러했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보혈이 있기 전이었다. 그래서 저들은 자신의 죄를 전가한 아사셀을 뽑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광야로 내몰았다.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10).” 곧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22).”
아사셀은 떠나다는 의미로 ‘아잘-염소’를 뜻하는 ‘에즈’가 결합한 단어다. 곧 죄의 짐을 지우고 떠나보내 ‘완전한 제거-파괴’를 의미하였다. 사막 귀신, 악막, 사탄을 의미한다. 하여 예수께서 ‘아사셀의 염소’가 되어 성문 밖에 끌려가 홀로 십자가를 지셨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곧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11-12).”
이를 바울은 우리가 그렇게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이른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곧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4-26).”
그럼에도 죄는 우리에게 친밀하다. 가지고 있는 자신의 인격에 친숙하고, 그 사용하던 모든 재물의 익숙함 같이 죄는 우리 속에서 우리에게 너무 당연하다는 듯 행세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친숙함에 길들여져 아차, 하는 순간에 도로 그것을 주워 먹는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 26:11).” 하여 베드로도 이르기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2).” 그 어쩔 수 없음, 죄의 친밀함에 대하여 나는 환멸하나 또한 나는 그리 당한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리 행한다. 죄의 속성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긍휼하심에서 달아난다. 문득 죄책감이 들다가도 몸에 밴 어린 아이의 습성 같이 죄의 습성은 친숙하다. 성경은 그러한 우리 죄에 대하여 명명하였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사 14:12-14).
곧 죄는 교만함으로 하나님을 능멸한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인정하고 따르는 것 같으나 모든 결정은 스스로 내린다. 하여, 그 결국은 엄연하였다. 이를 알기까지는 아직 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15).
마치 나는 이번 주간에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은 마음이었다. 누가 글쓰기를 배웠으면 하고, 두 시간 반이 걸려서까지 찾아왔다. 이런저런 저의 말에서 평생을 이단에 휘둘려 통일교니 신천지를 전전긍긍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였고, 저가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성경으로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렸다. 에둘러 저를 포용하기에는 저의 몸에 밴 ‘잘못된 교회’에 대한 인식이 너무 두터웠다. 스스로도 이단인 것을 알고 이를 인정하였다. 첫 만남이 무려 다섯 시간을 넘길 정도로 서로의 대화는 진지하였고, 의외로 저는 순순히 그럼에도 계속 오겠다고 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어제 다시 장문의 문자가 들어와 자신은 글쓰기를 배웠으면 하였고, 목사님은 ‘종교적인 신념’을 접을 수 없으실 테니 좀 더 시간을 갖겠다는 내용이었다. 더는 강제할 수 없음을 알고 그리 하시라, 하고 답을 보냈다.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사탄은 아직 미숙한 조카 사탄 웸워드에게 답장을 쓴다. ‘그럴 땐 너무 당황하지 말고, 저로 인정하게 하고 수긍하게 하고, 그리 하겠다고 하는 결단까지 놓아둬라. 그런 뒤 하루 이틀 틈을 두고 시간을 좀 벌면 다시 익숙한 제 자리로 돌아가게 되어 있단다.’ 심지어는 누굴 좀 만나야지, 점심 먹고 와서 다시 생각해야지, 하는 작은 시간만 벌어주면 얼마든지 도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죄의 친숙함이 아닐까? 몸에 밴 성격, 취향, 그 의지 같은. 막상 저의 거절의 문자는 나의 마음을 홀가분하게도 하였다. 다음 시간에 통일교를 중심으로 왜 이단이 이단인가? 하는 것을 나는 준비해서 설명해줄 테니, 저이더러는 에베소서를 읽어 오시라, 하고 약속을 했던 터였다. 곧 우리의 존재여부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을, 곧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알려주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는 동안 나 혼자 마음이 어려웠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단이 왜 어렵고 무서운가 하면 몸에 밴 습관 같이 하나님을, 성경을 우리 의식에 이식하여 어느 순간부터 무엇이 진짜 자신의 판단이고 기준인지를 알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친밀한 죄, 제일 먼저는 마음을 무너뜨리고 그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의심하고 재해석하게 한다. 타종교보다 더 무서운 것이 그래서 이단이다. 영혼의 이식이 이루어진 것과 같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6-7).”
책상 위에 출력해서 보고 있던 ‘통일교의 실체’, ‘이단과 사이비교단의 정체’라는 원고를 접어서 책꽂이 사이에 던져두었다. 벌써 여러 장 울긋불긋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였던 게 마치 복잡하였던 나의 심경을 비춰주는 것 같았다. 순간 홀가분한 마음인 줄 알았는데 서서히 안타깝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찼다. 도저히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게 하는,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스크루테이프는 말했다. ‘원수를 상대할 필요는 없어. 다만 환자들을 가만히 곁에서 살피기만 하면 얼마든지 원수를 괴롭힐 수 있지. 그러니 기회는 얼마든지 있단다. 그러니 웸워드야 너무 낙심하지 말거라.’ 저가 말하는 원수는 예수다. 환자는 예수를 믿는 자이다. 누구보다 이의 꾐에 넘어갔던 베드로는 그들의 실체를 잘 알고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권면하였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매주 오기로 하여 이 일을 어쩌지? 하고 마음의 부담이 크더니, 막상 저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자 더는 어쩔 수 없는가? 하는 회의가 또 슬픔이 밀려오기도 하였다. 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냥 우선 저가 원하는 글쓰기만 그럼 가르쳐주겠다고 할 걸 그랬나? 하면서 또 여러 생각이 나를 들들 볶아댔다. 가끔은 이게 옳은지, 저게 옳은지, 이 길이 맞는지… 밀려드는 갈등으로 숨이 막히는 것 같다. 그렇게라도 일부러 보내신 한 영혼은 아니었을까? 하는 자책도 들었다. 그러다 짓누르는 생각을 집어던진 것은 ‘내 안에 사람에게 공감을 얻으려는 마음’을 보았다. 어쩌면 어떤 실적? 기대? 보람? 따위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보다 앞서 성령은 내주하셨다. 아닌 건 아닌 거고, 틀린 건 틀린 것이다. 저를 잘 대하여 글쓰기로 어떤 성과를 거둔다면 여러모로 득이 됐을 수도. 저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죽을 때까지 적당히 먹고살만하니까, 뭔가 허한 부분을 글쓰기로 채웠으면 하는 것인데… 은근히 같은 수준의 유한마담들이 있으니 일정 부분 밥벌이도 좀 되었을 텐데.
혼자 걸으며 별의 별 생각을 다하다 머리를 휘저었다. 아, 내 안의 죄의 친숙함이여!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 3:7).” 그래서 하나님과 같이 되니 좋았겠나? 우리 속에서 나오는 생각들이란!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설마 그 정도까지야, 하겠지만 실은 늘 시달린다. 욱, 하는 마음속에 별의별 속한 것들이 다 뒤섞였다. 우리 내면의 음욕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이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지. 순간 보암직도 먹음직도 한 것으로 탐스럽기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게 죄다. 죄는 결코 흉측하고 더러운 몰골로 접근하지 않는다. 그럴듯한 이성과 판단, 사리분별이 정확한 듯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우리의 영성을 살짝 건드릴뿐이다.
오랜 상처, 끊임없는 문제, 알 수 없는 슬픔, 밑도 끝도 없는 미움이 순식간에 우리 영혼을 잠식한다. 실은 우리의 친밀함은 죄에 더 가깝다. 무려 420년 이상 애굽에서 살았다. 내 곁을 둘러치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만 살아간다. 그런 가운데 기약도 없이 배를 지어야 했던 노아, 저에게 120년은 끝도 없는 날들이었을 것이다. 갈 바도 알지 못하고 걷는 아브라함의 발걸음은 또 어땠을까? 우리의 신앙이란 지극히 개별적인 사안이다. 이삭이 아브라함처럼, 야곱이 이삭처럼, 저들이 노아처럼 살았던 것은 단 하나, 무모한 믿음뿐이다. 그런 우리에게는 구속에 대한 성찰뿐이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내가 하긴 뭘 하겠나?
이는 괜한 자괴감도 자기 환멸도 아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일련의 상황에서, 그러니까 나의 이번 한 주간에서 나는 주의 일에 갈팡질팡 한 것 같으나 성령은 이를 이끄셨다. 가만히 복귀를 해보면, 느닷없는 저와의 만남에서 나는 흔들리기도 하였다. 순간 머릿속으로 셈이 서고, 그러다보면 아이들을 가르칠 때보다 수입이나 보람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였던 것을 고백한다. 또한 저가 내게 느끼는 어떤 호감(?)을 직감하면서 이를 이용해서도 적당한 성과가 가능하겠다는 판단도 있었다. 처음 만나고, 나이 환갑을 넘긴 이가 누구 앞에서 운다? 그것도 무슨 대단한 사연으로가 아니라 어릴 적,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어떤 서러움 또는 버림받은 가정으로서의 가장에 대한 서러움? 이런 말을 술술 풀어낼 때는 우쭐하는 마음도 내 안에 생겨났던 것 같다. 그것으로 글의 소재로 삼으면 된다.
셈이 먼저 서고, 저가 어울리는 같은 부류의 유한마담들이 하나 둘 더 소개되어 오면 ‘제2의 글방’으로 도약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나의 이 속 깊은 어떤 죄의 친밀함은 일정 부분 계산을 끝내고 내 마음을 갈등하게도 하였다. 그냥 하지 뭐! 거기에 통일교니 뭐니 하던 저의 과거형 종교생활에도 관여 하여 주의 길로 바로 인도하면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니겠나? 하는. 순간의 판단,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아, 이 뿌리칠 수 없는 설득력. 얼마나 좋은가? 그럼 더 하나님을 잘 알고 바로 섬기고 온전히 같이 할 수 있단 소리로 해석이 가능한데…….
때론 우리의 많은 생각이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한다. 생각이 많았던 처음 살인자 가인도 쓸데없는 마음씀으로 이끌려 기어이 동생을 죽였다. 그리고 절규하였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4:13).” 앞서 주님은 엄연히 알리셨고 주의를 주셨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7).” 복귀해보니 내 안에도 그런 속셈이 있었다. 그런 아줌마 서너 명만 잘 가르쳐서 글쓰기 성과를 내도 어지간한 밥벌이는 될 것 같았고, 늘 근근한 교회 임대료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글방 제2의 전성기를 꿈꾸기도 했었다. 적당히 배우고, 나이 들고, 돈도 있고, 그런데 뭔가 인생에 허기진 애매한 나이 대의 늙지도 젊지도 않은 저들은 어쩌면 청소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보다 수월하고 수입도 좋을 거였다. 솔직히 이제와 고백하면 그러한 갈등은 몸살처럼 무겁고 치질처럼 좀이 쑤신다. 그런데도 이상한 마음, 하나님이 두시는 어떤 불편함! 이건 아닌데, 싶은!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나의 죄를 짊어지고 아사셀 염소가 되어 성문 밖으로 쫓겨나셨던, 그로 인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을 당하셔야 했던. 이 모두는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이를 알면서, 이를 증거 하는 사람으로서, 글쓰기 교육만 부탁드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하는 저이의 문자에 나는 답을 해야 했다. 네, 아니오. 괜찮습니다, 안 됩니다. 그렇게 하다가 저렇게 할까? 하는 생각이 또 꼬리를 물려할 때, 나는 단호히 네! 하고 답을 하였다.
우리의 신앙적인 양심의 문제는 잘못된 선택이나 행동보다 잘못된 관계의 문제다. 오래된 죄와의 친밀한 관계는 습관과 같이 들러붙어 고통 없이는 뗄 수 없다. 결심은 숱하게 할 수 있다. 결단은 누구나 감정에 따라 되풀이 할 수 있다. 그러나 개나 돼지처럼 그 몸에 밴 습성, 오래된 죄성의 관계는 단숨에 처리가 안 된다. 잘못 길들여진 습관 정도가 아닌 본래의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손모가지를 잘라야 도벽을 끓고, 거세를 해야 오입질이 멈춘다는 말처럼, 이는 병 중에서도 난치병이다. 죄의 친밀함이란 그처럼 우리와 친숙하다. 그러니 다른 방도가 없는가?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욜 2:25-26).” 오직 주의 긍휼하심 뿐, 우리의 악한 습성을 하나님은 없던 일로 바꾸실 수 있다. 이를 바꾸어 오히려 찬송이 되게 하신다.
내가 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래서 생각날 때마다 기도할 따름이다. 그리 답을 보내고 마음을 접었다. 생각이 너무 많으면 죄와 가까워질 뿐이다. 본래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아침마다 보내었던 묵상글도 그만 보냈셨으면 좋겠다고 하여 그리하였다. 굳이 내가 억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음은 어려웠고 남은 것은 부끄러움뿐이었지만, 그것으로 나는 이처럼 주의 이름을 부른다. 어쩌겠나? 나는 늘 죄와 더 가깝다.
그럼에도 성경이 나를 붙드시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부디, 됐다 이제. 오늘 시편은 그리 나를 진정시킨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 128:1).
하며 이르시기를,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2).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0) | 2022.01.02 |
---|---|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0) | 2022.01.01 |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0) | 2021.12.30 |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0) | 2021.12.29 |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0) | 2021.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