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부정에서 떠나게 하여 그들 가운데에 있는 내 성막을 그들이 더럽히고 그들이 부정한 중에서 죽지 않도록 할지니라
레 15:3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 127:1
예수의 옷자락이라도 만져야 한다는 절박함에 대하여,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눅 8:47-48).” 저이는 12년간 남몰래 혈루증을 앓는 중이었다. 오늘 레위기서는 유출병에 관한 것으로 그 부정함에 대하여 말한다. 병적으로 이를 앓던 여인이 떠올랐고 많은 무리를 뚫고 예수께 나아가려는 그 절박함의 용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반역자로 주의 성소에 들어가지 못한다. “너는 반역하는 자 곧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이 족하니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겔 44:6, 9).” 그런 우리로 이제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이와 같은 확신을 마음에 두고 주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엡 3:12).
이보다 더 귀하고 큰 은혜가 또 있을까? 누구에게 일러 아무리 오라하고, 아무리 그게 아니라 해도 저의 미심쩍음과 자신의 완고함으로 저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하여,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렘 45:3).” 이제도 앞으로도 영원토록 가장 불행하고 슬픈 일을 꼽으라면 평안을 찾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이와 같은 특권을 누림은 복이다. 그럴 수 있는 용기,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과 여건이 귀한 것이었다.
어제는 3차 코로나 백신을 맞았다.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우리의 일상은 회의적이 되었다. 나는 병적으로 서둘러 첫 번째로 가서 맞았고, 혹시나 아플지 몰라 설교 원고를 대략 완성을 해두고 갔다. 몸은 나른하고 머리에는 두통이 이어졌다. 누구 덕분에 사이비 종교들의 실체와 특히 통일교에 대해 자료를 찾고 읽어보았다. 주를 바로 안다는 것, 주신 상황에서 주를 경외함으로 산다는 일은, 그럼에도 주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새 힘을 얻는 게 중요하였다. 곧 우리에게는 아무리 어떠하든지 우리를 대언하시는 그리스도가 계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 2:1).
곧 우리가 심판장 앞에 서게 될 때에 우리를 변호하시고 어떤 경우에도 우리 죄를 묻지 않으심은 그리스도께서 그 값을 이미 감당하셨기 때문이다. 누가 자신을 두고 더는 용서받을 수 없다며 긴 한숨을 쉴 때,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6-19).
하시는 이와 같은 말씀으로 격려할 수 있었다. 곧 우리 죄가 아무리 붉고 불결하여 씻을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예수님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더 넓고 길고 높고 깊으시다. 이는 곧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로 충만하게 하시는 것이다. 충만함이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이를 힘입어 주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 복이었고 은혜였고 은총이었다. 곧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로 인해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결과이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13).” 오늘을 살며, 남에게는 차마 말 못 할 사정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우리로 주와 함께 참여하는 자로 부르심이다. 즉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14-15).”
고로 오늘 나의 이러한 고백과 마음의 준비와 행여나 하고 근신하는 모든 게 찬송의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임을 믿는다. 특별한 게 없는 날들인 것 같은데 그런 가운데서도 주가 함께 하심을 체험하고 감사히 나아가는 것, 그 용기.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의 옷자락이나마 만져야 할 것 같은 절박함. 그녀가 안고 살았을 수치와 불편함과 부끄러움과 자책을 생각하다 보면 누구라도 말 못할 사정을 그 마음에 담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겉은 멀쩡한데 속이 문드러진 사람들과 겉은 낡으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를 묵상하고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게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므로 듣는 것이 믿기 이전에 일이고, 믿는 것은 보좌 앞으로 하나님이 부르시기 전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다는 일, 누가 가만히 듣고자 할 때 저이의 그런 온순함이 축복인 것을 알 수 있다. 보면 듣기를 거절하는 사람이 많다. 뭐라 하면 다 안다고 여기고, 자신이 아는 것으로 들을 귀를 막아버리는 경우이다. 이는 어찌할 방도가 없다.
‘나병과 유출’에 대하여 말씀을 읽으면서 “아론의 자손 중 나병 환자나 유출병자는 그가 정결하기 전에는 그 성물을 먹지 말 것이요 시체의 부정에 접촉된 자나 설정한 자나… 해 질 때에야 정하리니 그 후에야 그 성물을 먹을 것이니라 이는 자기의 음식이 됨이니라(레 22:4, 7).” 우리의 어쩔 수 없음과 그에 따른 부정함에 대하여, 우리로서는 해결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주 앞에 담대히 나아오는 것인데 먼저는 들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은 자주 물으셨고 확실히 하셨던 것일까?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 11:15).” 즉 들을 수 있는 귀는 아무나의 것이 아닌 것이다.
이를 위하여도 우리가 중생의 물두멍에서 씻음을 받아야 한다.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출 30:18, 20).”
곧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이에 그리스도의 보혈을 묵상하면 그때마다 묵지근한 감사가 올라온다. 이를 힘 입어 오늘도 이처럼 주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10:9).” 그러니 누가 오고 가고, 듣고 안 듣고 하는 일에서도 그 이유와 목적은 명백해지는 것이다. 휘장은 곡 육체다. 이를 예수님은 보다 심층적으로 말씀하신 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이는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서로가 화합을 하니 선을 이루니 하는 수고와 노력도 중요한 일이지만, 우리로 주 앞에 세우시려고 그것도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골 1:20-23).
이와 같은 말씀을 가만히 음미하며 묵상할 수 있는 것으로 복되다. 이에 그 마음이 충만하여져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 되었는가를 알 때 주의 은혜는 크고 귀하다. 나에게 두시는 하루하루의 시간 속에서 내가 주를 바란다는 일은 이처럼 엄청난 값을 치른 것이었다. 이를 감격스러워할 때 성경은 말씀하신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4-6).
이 놀라운 사실 앞에 새삼 놀란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 여건이 어떠하든지 우리로 흔들리지 않게 하심은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어쩌다 그리 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다. 이미 창세 전에, 모든 만물이 생기기도 전에, 내가 어머니의 태에 있기도 전에, 오늘의 이런저런 상황에 놓이기도 전에… 예정하셨고 선택하신 일이다. 이는 오직 ‘그의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이 무조건 좋아서 하신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사랑 가운데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다. 이를 위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이다.
고로 오늘 우리의 이끌림, 들음, 귀 기울임의 이 무심한 듯 결코 무심한 일이 아닌 기적 같은 일은 아무나의 특권일 수 없다. 저마가 때가 되면 마치 자석에 이끌려가듯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우리의 어떤 조건과 자격, 노력과 애씀으로가 아니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3).”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바로 오늘의 나이다. 이를 두고 시인은 놀라움을 금할 길 없어서 경탄을 하였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시 145:3-4).
저의 위대하심은 우리로 크게 찬송하기에 충분하다. 이를 이사야는 덧붙여,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사 40:15-16).
우리의 그 무엇도, 어떤 수고와 노력도 통의 물 한 방울 같고, 저울 위의 작은 티끌만도 못한 것이며, 섬들을 떠오르는 먼지 같을 뿐이다. 그러면서 뭘 그리 얼마나 애쓰고 수고하였노라, 자신의 노고를 스스로 자부하곤 하는지. 나는 어제 일찌감치 백신을 맞기 위해 병원 대기실에 앉아 아침에 쓴 묵상글을 읽고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에서 멀어져 이를 생각하였다. 주는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사 57:15).
오늘 유출병 앓는 자의 부정함에 대하여, 이에 12년을 홀로 괴로워하다 예수의 옷자락이나마 만지려 했던 한 여인의 절박하였던 시간을 묵상하며. 아, 이 모든 게 주가 하시는 일이라. 주께서 하지 않으시면 모든 게 허사인 것을 다시금 되새긴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 127: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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