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레 13:45-46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 125:1
모든 병이 그렇겠지만 나병은 무서운 병이다. 어릴 적 나환자촌에서 살았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말씀이 무겁게 다가온다. 저들은 음성이 되었어도 일그러진 모습 때문에 사회로부터 격리 된 채 따로 정착촌을 이루어서 살았다. 그 몰골은 더욱 뭐라 말할 것도 없이 끔찍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였으니까 햇수로 4년을 살았던가보다. 그 안에 교회가 있었고 아버지가 청빙을 받아 그곳에서의 생활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래도 처음으로 마당이 있는 사택이 있었고 한편으로 채마밭도 있었다. 뒷문으로 해서 계단을 오르면 언덕 위에 예배당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멀리 내다보는 정취는 지금도 아련하다. 나는 그곳에서 세례를 받았고 또래들과 성경공부를 하며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을 했다. 사람들의 일그러진 모습도 익숙해졌고, 처음으로 좋아했던 여자아이와도 꽤 깊은 정을 느끼기도 하였다.
돌아보면 손양원 목사가 목회하시던 여수 애양원교회와의 인연과 그곳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나병환자들의 삶은 어린 나에게 경이로움 그 자체였던 것 같다. 육신은 비록 사회로부터 격리된 채였으나 나병으로 눈알이 모두 빠진 소경 장로들이 성경 66권을 암송하였고, 손이 곱고 다리를 잃은 이들이 분주하게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찬송과 영광을 올리던 모습은 가히 경탄에 가까운 경건함이었다. 나는 오늘 본문에서 저들의 모습에서 비통함을 느끼면서도 이를 인정하고 주 앞에 온전하여지기를 바람이 약진하는 신앙의 발판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레 13:45-46).”
누구라도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성경의 지론이다. 저가 나병이라 하여 저만 부정하겠나? 한데 부정하다 부정하다 스스로 고하고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입술을 가리고 진영 밖에서 거룩을 사모하며 살아야 했을 삶이라니! 어쩌면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이와 같은 경건의 연습이 우리로 더 나은 영생을 사모하는 데 위력이 되는 것이 아닐까? 요즘은 자주 드는 생각이 적당하다는 것, 그것이 주는 안일함과 나태함이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한다는 것이다. 누구는 자신의 질병과 고통으로, 누구는 자녀의 어려움과 돌이킬 수 없는 장애로 그 마음에 비통함을 안고 주 앞에 선다. 그것이 상한 심령으로라,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우리로 더욱 주를 바라고 의뢰하게 하는 것은 상한 심령으로였다. 이를 스스로는 어찌 할 수 없어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 앞에 서는 일, 어린 나와 친구가 되어주었던 한 소경 장로는 매일 입원해 있는 나의 숙소로 찾아와 같이 성경공부를 하며 종종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였다. 나는 저가 진짜 소경인지, 저의 얼굴 앞에 손을 휘저어보기도 하고, 부러 성경을 틀리게 읽기도 하면 정말이지 저는 한 글자도 틀림없이 다시 읽도록 하곤 하였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기억하고 산다는 그 삶이란 얼마나 경건으로 무장된 삶이었을까? 탁탁, 탁탁 하며 누구의 부축도 없이 홀로 나의 숙소를 찾아 걸어오는 소리가 가끔도 들리는 것 같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125:1).
오늘 시편의 첫 구절과 나병으로 인해 따로 격리된 이들의 말씀이 새삼 중첩되면서 나의 기억을 돋우는 것 같다. 가장 순수하였고 사춘기로 몸살을 앓던 시절이어서 더욱 그러했을까? 나는 저들과 보낸 시간이 그 어떤 시간들보다 뚜렷하고 선명하게 감사하기도 하다. 결국 우리의 신앙이란 무엇일까?
끈질긴 인내의 세월이 묶여 신앙으로 승화하는 게 아닐까? 그 인내는 발판이 기도였다. 어제도 말씀 초안을 잡다가 그런 생각을 하였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77:1).
시편 77편의 절박함은 우리 인생의 모든 순간을 내포한다. 그 외로움과 고통으로 일그러져 주의 이름을 부르던 과부와 소경의 이야기처럼(눅 18:5-8, 35-43), 어쩌면 우리의 안이함이 우리로 병들게 한 것은 타는 목마름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여력을 상실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7-28).” 귀신들린 딸을 두고 절박하게 구원을 바라던 여인은 스스로를 개라 일컫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께 애원한다. 주님은 그러한 절박한 마음으로 주를 찾기를 기다리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 11:8).”
결국 우리로 기도하게 하는 것은 환난이다. 내 기억 속의 나환자촌에서의 생활은 모두가 필사적이었다. 어쩌면 저들의 우악스런 삶이 곁을 주기 어려운 것 같으나 누구보다 정 많고 인정 깊은 사람들이기도 하였다. 인생의 그러한 환난 날, 주를 찾기에 가장 바른 적기가 아닐까?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시 77:2).
다른 어떤 위로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삼하 22:7).” 이와 같이 주옥같은 체험은 그 삶이 적당하여서는 어림없다. 머리로나 감정으로는 이해가 될지 몰라도 실제 그 삶에서 죽기 살기로 주께 매달린다는 것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그럴 수밖에 없는, 그러지 않으면 죽는 게 더 나은, 오직 주님만으로 위로를 얻고자 하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
우리가 무엇으로 소망을 삼을까? 하나님 외의 다른 소망은 우상이다. 하나님은 질투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를 견디지 못하신다. 그렇게 나의 소경 장로님은 어린 내가 뭘 안다고 나를 붙들고 그런 자신의 속내를 가끔 드러내곤 하였다. 저는 그 당시로 서울대를 나와서 꿈이 많은 젊은이였다. 평소에도 신문을 보면 처음부터 끝에 실린 광고까지 모두 읽고 섭렵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꿈이 많고 열심으로 살던 젊은이가 어느 추운 날 장갑을 벗는데 술렁, 하고 같이 빠져버린 손가락을 신호로 자신이 나병인 것을 알고, 소록도로 끌려가 모진 치료(?)를 당해야만 했다. 당시는 군사정권이라 인권이니 뭐니 하는 것은 사치였다. 짐짝처럼 험히 다루어져 양성일 때는 저적때기로 싸인 몸에 총 칼로 위협당하며 치료를 받았다. 어찌 됐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음성 판정을 받았을 때는 눈알이 빠지고 손이 곱고 다리를 저는 흉측한 몸으로 꿈은 산산조각이 나서 여수 애양원에 있는 정착촌으로 강제 수용되었다. 스스로 죽으려고 몇 번을 시도하다 하나님을 만나고 저의 평생은 듣는 성경으로 성경 66권을 암송하였다. 저를 위시하여 그 교회에 성경 66권을 다 암송하는 이들이 예닐곱 분 계셨는데 모두가 다 소경이었다. 이는 참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서의 소망이란 대체 무엇일까?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이와 같은 찬송과 경배가 어찌 가능할 수 있겠나? 적당할 때는 모른다. 적당함으로 여기 기대고 저기 기대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는 ‘환난 중에 위로 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다 알지 못한다. 절규에 가까운 간절함에 대하여,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시 86:17).
다른 누구에게는 손을 내밀 수도 없는, 스스로 자신에게조차 위로 받을 수 없는 처지에서, “거리에서는 굵은 베로 몸을 동였으며 지붕과 넓은 곳에서는 각기 애통하여 심히 울며 헤스본과 엘르알레는 부르짖으며 그들의 소리는 야하스까지 들리니 그러므로 모압의 군사들이 크게 부르짖으며 그들의 혼이 속에서 떠는도다(사 51:3-4).” 그러할 때 주를 부른다는 것, 이보다 더 큰 확신이 어디 있을까? 눈에 보이지도 소리로 들리지도 않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의심할 때 우리는 영적인 침체에 빠져든다.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 그런데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시 77:3).
의심이 들 때 다른 궁리도 따른다. 세상을 기웃거리고 애굽으로 도로 가고자 한다. 신세한탄으로 자신을 경멸하고 그리 두시는 하나님을 조롱하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주를 바라는 것,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4).
이 모든 괴로움까지도 그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을 안다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마 8:26-27).”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더욱 주를 의지하게 의뢰하게 되는 것이겠으니.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월요일 아침, 이와 같은 말씀들을 찾아보며 그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할 때 나는 종종 회환에 젖는다. ‘내 안의 노여움이 나로 찬송이 되게 한다.’는 말씀에서처럼 왜 우리 안에 이런저런 말 못할 사정들이 없겠나? 누군들 아무렇지도 않은 날들이겠나? 어쩌면 이 귀한 시간을 망치는 것은 적당함이다. 등 비빌 데가 있다는 것, 누구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것, 나름의 기대나 소원을 두고 있는 게 있다는 것, 그래서 예수님은 억지로라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시고, 부자인 청년에게 그 모든 재물을 나눠주고 와서 따르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이 주는 오염된 마음을 염려한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우리 안에 의심이 든다는 것은 아직 여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게 아니면 더는 살 길이 없다는 게 아니라, 어디 또 다른 무엇이 있다. 그것이 어쩌면 사탄의 사역이 아닐까? 저의 일은 곤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 외에 다른 대안을 제시함으로 의심하게 한다.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
(시 77:5-8).
어쩌면 우리 안의 의심은 본능적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도 손에 쥘 수도 없는 것을 두고 주를 바란다는 일은, 어쩌면 욥의 친구들의 숱한 권면과 충고와 다소 강압적인 꾸짖음이 타당하고 옳은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내 저들은 욥의 중보 기도로 살았다. 그 잘난 소리들이 모두 말뿐이었던 것이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 42:10).” 놀라운 사실 하나는 우리에게 주시는 역경과 어려움도 주 앞에서는 적당하였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이를 인정하고 받기가 그처럼 어렵다. 믿음이 없이는 말이다.
오히려 역경이 우리로 더욱 완악하게 할 수도 있다.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출 6:9).” 결국 욥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떠난 욥의 아내도,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그런 걸 보면 인내도 주가 주셔야 하고, 소망도 주가 더하셔야 한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얻는 노력으로는 감히 감당이 안 된다. 나는 나중에 퇴원을 하여 혼자서 여수 애양원을 찾아가면 어김없이 소경 장로님 댁을 찾았다. 저는 곱은 손으로 더듬으며 나의 얼굴을 쓰다듬고는 찐계란이나 고구마를 건네고는 하였다.
나는 오늘, 누가 온다. 저는 서울 저 위쪽에 산다. 차로 운전하고도 두 시간이 걸린다. 환갑을 넘겨 글쓰기를 배우겠다는 목적이지만 그래서 거절하였던 나의 오늘의 상황이 저를 움직인 것일까? 더는 학원으로 글방을 하지 않고, 누구에게 글쓰기를 위한 글을 가르치지는 않는다고 말하였다. 나는 목사이고 그래서 어떤 목적으로 글쓰기를 간헐적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소릴, 처음 문의 전화에서 나는 정중한 거절을 목적으로 말하였다. 그래서도 오겠다? 그쯤 되자 이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어떤 계획하심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하였다. 그리고 두어 주가 흘러 당연히 오는 것으로 되어버린 날,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 125:1).
오늘 이 말씀은 또 무엇인가? 앞서 부담을 느끼고 어떤 불안으로 섣불리 마음이 요동칠 때,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2).
말씀이 나를 붙드신다는 게 어떤 것인지, 나로 더욱 실감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 것도 같다. 그리 하시겠다니, 가만히 주의 하시는 바를 신뢰하는 일,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4).
말씀 앞에 가만히 앉아 주가 어찌 행하시려나… 나의 지난 날에 마주하였던, 지금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나를 보며 아브라함의 품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있을 소경 장로님을 떠올리기도 하면서. 낙심이 나를 엄습할 때에, “우리가 어디로 가랴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신 1:28-29).” 말씀이 말씀으로 나를 붙드시고 계심을.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시 77:10-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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