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전봉석 2022. 1. 7. 05:15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23:22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시 135:3

 

 

하나님이 정하신 절기와 성회에 대한 말씀이다. 더욱이 안식일은 정하다, 고정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를 정하시고 이를 회막이라 하였으며, 그 시간을 정하셨다. 이 만남을 성회라 하며 나팔을 불어 백성을 회집했다(1-3). 다음은 절기로 봄에 지키는 칠칠절과 유월절과 무교절이 있다. 칠칠절은 첫 이삭을 드리고 50일이 되는 날로 수확이 끝난 것을 기념하여, 맥추절 또는 오순절이라 하였다(15-22, 행 2:1). 기쁨의 축제일로 누룩을 넣어 맛있는 빵을 제물로 드렸다. 가을절기로 속죄일과 초막절이 있다. 그리고 나팔절도 있다(23-32). 이는 엄숙한 안식일과 속죄일로 7월에 대속죄일(7월10일)과 초막절(7월 15일)이 있다.

 

유월절은 성금요일로 이어지고 무교절은 부활절, 칠칠절은 오순절로 이어진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유월절 식사로 하셨다(요 19:36). 부활절은 구약의 초실절의 의미를 가져와 무교절 주간에 들어 있다. 바울은 누룩을 제하여 거룩한 공통체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고전 5:6-9).

 

말씀 가운데 인상적인 내용은 곡식을 수확할 때의 장면이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23:22).” 곧 우리의 가난은 돌보심을 유발한다. 문득 드는 표현이 가난도 은사다. 우리의 난제는 적당하다는 것이다. 부유함은 고질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 19:23).”

 

새삼 어제는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부유하여 적당히 등 비빌 데가 있는 자는 감사를 잃는다. 누가 무슨 암 판정을 받고 보험 든 곳에서 4천을 받았다. 아주 초기라 방사선치료 몇 차례면 완치될 거라 하였다. 그 모든 입원과 치료비도 들어둔 보험에서 해결된다고 하니 감사할 법한데, 인생을 한탄하며 삶의 비애를 토로하였다. 그러다 하는 말이 같이 입원한 누군 암 판정으로 1억6천을 받는다는데 자신은 4천밖에 못 받았다는 것에 배 아파했다고 하니. 그 영혼이 어찌 원망뿐인가 알 것 같았다. 감사는 은사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닐 거였다. 저의 이야기에서 적당하다는 것, 그 평범함이 저로 하여금 자신을 주께 의탁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갔다는 생각을 하였다.

 

흔히 우리의 소신과 신념보다 무서운 병도 없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읽으며 구구절절 이와 같이 모든 절기에 그 규례를 일일이 정하시고 알리고 구획하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막는 것은 정작 유대감이다. 그러려니 하는 동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불신앙은 그리 괴물 같지 않다. 저의 소신과 나름의 열심이 저로 하여금 한 개체로써 하나님과 동등하게 자신을 세운다. 순종할 수 없을 때 수군거린다.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요 6:61).” 자신들의 의견을 공유하고 서로의 유대감을 결집하는 것이다. 그 마음의 걸림을 회피하는 것이다.

 

차라리 하나님께 항변하고 그 걸림을 하나님과 씨름하면 좋을 텐데. 사탄은 또 우리 안에 적당한 외면을 선사한다. 듣기 싫어하고 상대하기를 꺼려한다. 마치 누구를 보면 맛을 잃은 소금 같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소금은 소금인데 그 맛을 잃었다? 부르심에 합당하지 못하게 하는 적수는 적당함이다. 나는 내내 그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저가 차라리 더 심각한 지경이었더라면, 그 형편이 가난으로 상접했더라면, 그런데 그저 무난하고 그만하길 천만다행이라 하니 감사는 소멸되고 원망과 시기, 신세한탄과 서운함으로 얼룩져버렸다. 퀸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에 나오는 오스카 같다. 정신병원에 수감된 그는 자신의 생을 회고하는 서술방식으로, 어른의 지적능력이나 스스로 뛰어내려 곱추가 되고 어린 아이로 성장을 멈춘 난쟁이 오스카는 양철북을 치며, 나치의 시대적 배경을 농락한다.

 

문득 누구 이야기에서 오스카를 떠올렸으나 차마 그리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이 아침, ‘맛을 잃은 소금’을 연상하게 되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고도 그 소명을 다하지 못할 때, 스스로 성장을 멈춘 오스카나 어쩌다 맛을 잃은 소금과 다를 게 있을까? 이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데서 나오는 증상이다. 그 뜻을 헤아려 알려 하지 않을 때,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요 6:41-42).” 우리는 수군거리고 자신이 아는 정도에서 이해하려 든다. 이어 항변하기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52).”

 

누구의 이런저런 어려운 처지는 알겠는데, 그게 또 적당하다. 오히려 누구는 저의 부유함이 저로 피곤하게 한다. 여러 채의 건물에서 월 2, 3천의 임대료를 거둬들인다고 하면서도 늘 사는 게 팍팍할 따름이다. 또 누구는 나이 마흔에 가정에 이룬 가장이면서도 서슴치 않고 그 부모에게 손을 내민다. 저들은 저가 어릴 때 헤어진 게 아니었다. 다 성장하여 갈라선 부모 사이를 적당히 오가며 등을 비빈다. 어렵다 어렵다하나 그 살림이 저들을 위협하지는 않는다. 너무 적당하고 오히려 과하다. 이것이 저들 영혼을 마비시켜 난쟁이로 성장을 멈춘 채 ‘부르심의 상’을 농락한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노인이 된 몸인데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하는데, 이에 우리의 가난도 은사다. 절박한 처지가 축복이라. 저마다 이를 모면하려고 스스로 떨어져 난쟁이로, 어린 아이로 성장을 멈춘 채 살아간다. 스스로 독립하려는 유혹, 자기 판단과 기준에 아무런 회의나 갈등도 없이 무분별하게 의존할 수 있는 처지가 저주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저의 삽질이 멈추려면, 그 양철북을 내던지지 않는 이상 스스로 희화화하는 사명을 알아챌 리 없다. 여전히 자신이 옳다. 누가 뭐라 하면 모르쇠로 일관한다. 고집이 장난이 아니다. 그 겉은 온순하고 차분하다. 억척스럽지가 않다. 적당하다는 게 그 안에 스스로 적응할 정도를 말한다. 가령 암 판정을 받을 땐 겁이 덜컥, 났다가도 발견된 게 극히 초기라 얼마든지 완치가 가능하다는 말에 감사보다는 짜증과 원망이 났던 것이다. 또한 누구는 그 부모가 차라리 어려서 그 지경이었다면 원망도 서러움도 성장 과정에서 견뎌내고 이겨내어 적응했을 법 했는데(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았을 리 없지만), 다 커서 저들 부모다 각각 호구 잡힌 셈이니. 스스로 그 자리에 멈춰선 다 큰 어른 아이로 저는 그 상황을 안배할 수 있다. 불쑥 손을 내밀면 집을 떠난 부친이나 내쫓고 새살림을 차린 모친이나 이를 거절할 수 없다. 각각 그 부모의 마음에 떠안은 미안함이 나이 마흔의 이제 중년이 다 되어가는 아들에게 여전히 굽실거릴 수밖에 없다. 스스로를 주관하고 왕처럼 살아가는 난쟁이 오스카와 같이 오늘도 양철북을 쳐대며 거짓 아이 행세를 하는 것이다.

 

나는 이 끔찍한 현실을 직시하기를. 스스로 웅덩이를 파고 우물을 곁에 두고서도 물을 얻고자 하는 거역의 삶을 두려움으로 인식하기를.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렘 3:8).” 서로가 덩달아 아무 생각 없이 시시덕거릴 게 아닌데… 하다못해 진짜 아이도 그 부모에게 손을 벌릴 때 미안해하고 감사해할 줄 아는데, 저의 멈춰버린 등 굽은 영혼은 그게 왜 잘못인지조차 분간할 능력을 상실했다. 내가 보기엔 억하심정이다. 그래도 되는 상대들이다. 그리하여 저의 살림은 적당하였고, 크든 적든 언제든 손을 내밀면 그 손에 돈을 쥐어줄 화수분이 둘씩이나 있는 셈이니… 천하무적도 이런 천하무적이 없다.

 

나는 이런저런 저들의 말에 혼자 무서워졌다. 하나는 아예 교회가 싫다 하고 복음을 멀리하니 오히려 그가 더 낫다 하겠나? 하나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려 달음질하여도 모자랄 판에 뒤뚱거리며 양철북이나 쳐대면서 저 혼자 흡족하다 하니… 나야말로 안이하였다. 저가 오면 같이 성경공부하며 뭐라 일러 주의 길로 갈 수 있겠다고 여겼다. 아,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저는 과연 어떤 설교를 내놓을 수 있을까? 내가 두려워 오금이 저린 것은 나 역시, 우리 안에는 성장을 멈춘 오스카들이 살고 있다. 자기 흥에 겨워 양철북을 쳐댄다. 자신의 그러한 처지를 적당히 이용하여 음탕한 짓을 서슴지 않고, 고개를 뒤로 돌려 혼자 음흉한 웃음을 짓는다.

 

왜 이처럼 하나님은 구구절절 모든 절기와 각기 그에 따른 행실을 일일이 열거하며 우리 삶을 간섭하시는가, 오늘 본문을 읽으며 이러한 관심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구나 생각하였다. 굳어버린 영혼은 어쩔 도리가 없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저는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그러니 어찌 해 주시길, 저를 위해 기도해야 할까? 암이 더 깊숙이 전이되기를? 그 부모가 모조리 사라지기를? 차라리 모든 것을 다 빼앗으시기를? 나는 혼자 심각한데 뭐라 이를 말이 없어 또한 답답하였다. 그러니 가슴은 답답하고, 저 몰래 안정제를 삼키며 길게 숨 호흡을 해봐도…. 내겐 답이 없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그러든가 말든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이에 귀 있는 자는 들을 것이다(요 6:52, 53).

 

이와 같이 묵상글을 쓰다 말고 가만히 멈추어 긴 한숨을 쉰다. 도덕적인 것은 도덕적이지 못한 것으로, 영적인 것은 영적이지 못한 것으로 돌아가려는 원심력이 있다.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30-31).” 같은 말은 되풀이 되고 같은 고민은 깊어져 갈 뿐이다. 재난의 밤이 깊어진다.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4-35).” 그게 뭔지, 자신을 부르신 그 부르심의 귀한 의도가 무엇인지, 각종 절기만 남고 의미는 무시된다. 뭐가 뭔지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고, 이를 되레 즐긴다. 오늘도 요란하게 양철북을 쳐대며, 고의로 추락한다. 가정부 마리아와 불륜에 빠진다. 이 끔찍한 즐거움은 모두 적당함이 품은 알이다. 알들이 깨어날수록 더욱 끔찍한 자기만족은 늘어간다. 수백 수천만 원의 거저 얻는 수입에도 늘 모자라다고 투덜거린다. 감사는 사라졌고 그 입 가득 사막의 모래가 가득하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나는 두려워 숨을 헐떡거리는데, 그게 또 무슨 소용이람.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눅 23:9).” 예수님이 입을 다물어버리셨다. 저로 인해 마음이 어려운데 뭘 어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렇게 아이도 아이엄마도, 내 곁의 동기 사역자들도, 마음이 상한 영혼들도.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데서 절망하며 주 앞에 엎드린다. 실의에 빠진 사람처럼 우울감이 밀려들 때,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시 135:3).

 

오늘 이 한 구절의 시편에서 괜히 눈물이 고인다. 저는 선하시고 그 이름이 아름다우시니!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139:7).

 

가만히 주의 이름을 부르다,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135:6).

 

그리하실 것을. 반드시 그리 행하실 것을 알고, 믿고, 의지하며.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