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전봉석 2022. 1. 9. 04:44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갈지라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

레 25:1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시 137:3

 

 

우리는 희년을 잃어버렸다. 우리 영혼의 목마름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하셨는데도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그러니 스스로 괴로움을 자처하는 삶이 되어버렸다.

 

오늘 본문에 대하여도 한시적으로 허용되는 땅의 매매나 사람의 부림이 7년마다 안식년을 취하고, 그것이 일곱 번 되풀이 되고는 본래의 것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레 25:10).” 그런데 이는 성경 어디에도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11).” 곧 우리의 자유를 우리 스스로가 속박하는 셈이니, 느끼는 답답증에 대하여는 뭐라 이를 말이 없을 지경이다. 과연 우리의 갈망은 유효한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 42:1-2).

 

그러니 오늘 우리가 느끼는 목마름은 스스로의 문제이고, 이를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는 해결이 안 된다. 누구의 이런저런 일에 있어 그 문제를 알면서도 서로가 쉬쉬하고 본인도 인정하면서 그러려니 놓아둔다. 저의 악순환은 거듭되어 본인은 그 부모처럼 살지 말아야지 했던 것이 저들보다 더 험한 세월을 살고 있으니, 이는 어쩌면 희년의 의미를 망각한 결과가 아닐까?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갈지라(레 25:12-13).”

 

희년을 알리는 뿔나팔은 울리지 않았고 희년의 기쁨의 소리는 한 번도 생겨난 적이 없다. 결국 희년은 예수 재림의 때에나 이루어질 마지막 과제로 남은 셈이다. 아담 이래로 모든 것을 빼앗기며 살면서도 소유하는 것으로 속량의 자유를 만끽할 수가 없다. 그러니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 137:1).

 

절묘하게 오늘 시편의 애가와 어울린다. 그럼에도 오늘까지 우리로 인도하신 이의 긍휼하심이 크고 귀하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121:3).

 

그리하여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이 은혜의 참 의미를 묵상할 수 있는 자가 복이다. 곧 희년은 소유관계의 복권이 핵심인 것처럼 나로 내가 누구인가를 바로 찾아가게 한다. 희년은 히브리어 ‘쥬빌리(jubillee)’로 ‘요벨(jobel)’을 음역한 것이다. ‘나팔을 불다, 외치다, 환호하다’로 의역된다. 땅은 복권되고(13-34), 사람은 풀려나서 자유하여진다(39-55). 그런데 49년 되는 해인지(8-9), 50년째 되는 해인지(10-11), 이를 가만히 살펴보면 시작하는 해와 마지막 해를 함께 세는 방식으로 50년 되는 해이다. 그래서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10).” 하고 명확히 하였다.

 

한데 성경의 누구도 이를 지켜 나팔을 불었던 경우는 없다. 자유와 귀환이 스스로의 묵인으로 속박이 되었다. 이에 이사야는 이 날을 메시아의 강림으로 성취될 예언으로 두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3).” 곧 주의 재림의 날은 여호와의 보복의 날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이 구절의 말씀을 읽으시고 이것이 성취되었음을 앞서 선포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18-19).

 

곧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함은 희년의 성취다. 눌렸던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선포한다. 그리하여 죄와 빚은 동의어처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빚진 자는 그것으로 자유를 얻지 못하듯 죄로 인하여 우리의 자유는 억압당하고 빼앗긴 상태였다. 이에 예수님은 우리로 탕감 받은 자인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바가 있다(마 18:21-35). 그러니 우리에게는 이제 엄청나고 놀라우며 감출 수 없는 자유함이 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8).

 

그런데 이 놀라운 권한을 가지고도 여전히 매여 사는 형국이라, 사는 게 지옥이라. 안 믿는 자들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전전긍긍하며 이리 쫓기고 저리 몰리고 하느라 정작 하나님과의 자유함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일을 생의 행복이라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저들이 우리를 보고 참 자유와 기쁨을 회상하고 추구하게 해야 하는데, 교회가 세상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으니. 믿는 자들이 안 믿는 자들의 손가락질이 되고 있으니.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19).

 

우리가 서로의 문제로 마음을 합해 기도하고, 누구를 위해 생각하고 생각하기를, 무엇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할 때가 되었다. 이 기도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처럼 서로가 서로의 아픔을 말하고 그 어려움을 두고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 왠지 치부를 드러내는 일처럼 부담스럽다. 솔직히 언제부턴가 복음이 살아서 부흥의 역사로 교회가 커지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사람들의 도피처로 뒷전에 물러나 있기를 바라는 성도 아닌 성도 같은 성도들의 집합체가 되었다. 이를 또 교회들은 적당히 시스템화하여 사회 단체들이 하는 선한기업 그 이상의 복음을 추구하는 일을 회피한다. 그러니까 여전히 오늘 날에도 희년의 선포는 묘연하여 가진 자는 더 가지고 소유하고 내어놓으려 하지 않는다. 대형할인마트처럼 교회들이 말씀을 덤빙으로 다량 구매, 독점하고 있는 셈이다. 거기서 성도의 관계란, 개인적인 가정사를 일일이 말로 해서 서로에게 부담이 되고 흠이 되느니, 좋은 게 좋은 식으로. 희년은 그리하여 성경 어디에서도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는 것과 같이 오늘 날에도 불가능한 것이다. 하여 주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20).

 

이 감출 수 없는 작은 기쁨이 어디 아무나의 것이겠나? 나는 종종 내가 감당하지 못할 말을 들을 때, 그것이 내가 짊어질 일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이젠 굳이 마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사이에는 주님이 계시다. 이 엄연하고 명징한 확신이 없이는 희년의 소망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은 선포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곧 우리의 죄사함은 그것이 끝이 아니고, 이제 시작인 것을 알린다. 더는 전부가 아니다. 그것으로 목적이 아니다. 비로소 하늘의 본향이 내 몫으로 정해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영원함은 하나님의 시간으로, 영원의 품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이다. 가령 이를 알았던 모세는 그 험한 광야 길에서도 아버지가 자식을 품에 안은 것과 같은 평안과 자유를 누렸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신 1:31).” 그런데 이를 알고 누리는 일은 모두의 것이 아닌 것이다.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32).” 모두의 것일 수 있으나 극소수의 누림과 자유로 그치는, 희년의 비애는 오늘도 여전하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 4:18).

 

정작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는데, 전혀 엉뚱한 데서 삽질이니 “ 네가 어찌하여 네 길을 바꾸어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냐(렘 2:36).” 그 결과 “네가 두 손으로 네 머리를 싸고 거기서도 나가리니 이는 네가 의지하는 자들을 나 여호와가 버렸으므로 네가 그들로 말미암아 형통하지 못할 것임이라(37).” 성경이 우리에게 일러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그럴 겨를이 없는 것이다. 당장에 뭐 그리 바쁘고 분주하여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들이 거듭되는지.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시 25:8-9).

 

오늘도 우리를 지도하시고 인도하시는 주의 함께 하심을 어찌 알기나 할까? 결국은 담대히 나아가라고 권하시고 이끄시는 것이다. 자,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왜 주저하고 있는지, 뭘 그리 확신하고 확인하려 드는지. 믿음이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12:1).

 

우리만 애매한 게 아니다. 믿음의 허다한 무리들도 그러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12:1).” 다만 저들도 인내로써 경주했다. 먼저는 우리 주님도 그러하셨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2).

 

마음은 이러저러할 수 있으나,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 22:42).” 이는 결코 흠이 아니다. 사람으로 당연하나 ‘아버지의 원대로’ 이를 붙들뿐이다. 우리 삶의 참 자유는 이 땅에서 막연하다. 불안이 엄습하고 조바심이 나를 올라타 목을 조인다. 그러나 믿음으로 이를 딛고 간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아닌, 우리는! 우리로 분류되어 이 특별함을 위하여,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 4:13-15).

 

굳건히 잡을 것인지, 여전히 망설이며 혹시나, 하고 한 번 더 미룰 것인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6:9).” 역시 확신의 문제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17-18).” 이와 같은 주의 뜻이 묵인되고 묵살되는 동안에는 별 수 없는 일이겠다.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 당연하고 극명한 진리 앞에서,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7:19).” 부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9:12).” 예수의 죽으심과 그 십자가의 보혈이 헛되이 되지 않기를.

 

누구의 사연을 생각하다, 나의 날들을 돌아본다. 내게 더하시는 한 날의 삶에서 그리하여 감사를 회복하지 못하면 전부를 잃은 것과 같다. 비록 여기저기 파스를 붙이고 앉아, 결로현상으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베란다 나의 책상에 앉아, 이 이른 새벽 시간에 주의 이름을 부르며 말씀을 되새기며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이 시간……. 감사는 아주 먼 데 있는 것도, 어떤 대단한 결과에 의한 것도, 무엇에 따른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 반응이 아니었다. 결국 주가 나를 주관하는 일이었으니,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 3:15).

 

부르심의 결과이고 그 부름의 상을 향한 달음질이었으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설령 그저 신기루였다 해도, ‘그리 아니하신다’ 해도,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4).”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나는 이제 이를 위해 운다. 바벨론에 끌려온 포로와 같은 이 세상을 살면서 희희낙락 즐길 것만은 아니어서,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 137:1).

 

그리하여 결연함은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2-3).

 

그러니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4).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에게는 곧 도래할 영원한 자유, 희년의 날이 있었으니, 그런즉 이를 위하여,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