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30 주일
시편 80편
‘옷술’
3.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7.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19.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들어가는 말
방금 읽은 세 구절의 오늘 본문은 후렴구와 같은 내용으로 반복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그것은 거룩이며 거룩은 무엇인지,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져 죽어지는 일임을 알게 된다. 곧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바울 사도의 설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처음 당해보는 현실을 겪고 있다. 코로나가 창궐하면서 전 세계가 팬데믹으로 텔타, 오미크론 등 자연재해에 이르기까지. 하루 에 몇 만 명의 확진자로 나오고 죽고 하는 실정에서, 모든 인류는 처음 맞이하는 생을 산다. 나이 한 살도, 여든 살도. 청년의 때도 퇴직하여 중년의 시절도. 이 모든 생소함 앞에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시 24:3-4).” 하시는 말씀에 주목할 수 있는 게 지혜다. 이에 사도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 하고 경고하였다. 특히 우리나라는 곧 대선을 앞두고 나쁜 놈, 이상한 놈, 미친 놈 들을 두고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 이 또한 생소하고 낯선 일이다. 이에 우리의 기준은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사 3:11).” 하시는 말씀으로다.
죽어서 마땅히 영원한 형벌로 이어지겠으나 이 땅에서도 다를 바 없는 결과로 나타난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6).” 그러니 오늘 말씀을 기준을 삼지 못하면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하고 사람들과 부화뇌동하여 쓸려 다닐 뿐이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오늘 시편은 애가(哀歌)를 들려주며 교훈을 던진다.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1).” 먼저는 우리가 누구인지, 곧 주의 백성임을 분명히 한다. 다음은 영원히 행해야 할 일, 주께 감사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밝힌다. 곧 주의 영광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본문 이해
지난 주일의 말씀은 시편 79장으로 74편과 같은 시대적 배경을 하였다. 남유다는 B. 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이 함락당했다. 같은 시점에서 79편의 내용은 주의 백성들 곧 남유다 주민들이 저들에게 학살당하고 농락당함으로 슬피 주께 구한다. 그런데 이 일은 앞서 B. 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당한 일과 흡사하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시편 80편은 앗수르에게 당하는 같은 민족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서 이를 주께 호소하는 시편이다. 궁극적으로는 136년 후에 자신들도 똑같이 당하게 될 것을 알지 못하면서 말이다.
이때 오늘 같이 읽은 세 구절, 3절과 7절과 19절은 후렴구처럼 ‘구원을 간구하는 주의 백성’의 자세를 촉구한다고 하겠다. 시적 구성은 간단하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눠 전반부(1-7)는 ‘목자와 양의 관계’로 하나님과 주의 백성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고, 후반부(8-19)는 ‘포도원 주인과 포도나무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다. 두 교훈을 중심으로 오늘 우리의 관계 설정을 점검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1. 우리는 각기 양 같아서 목자의 돌봄 없이는 고통과 파멸뿐이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시 80:1).”
양은 전적으로 의존적이다. 목자의 돌봄을 전제로 한다. 성경은 우리를 대하실 때,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삼상 12:15).” 엄히 경고하고 있다. 순종하면 복이고, 불순종하면 저주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흩어진 양이라 사자들이 그를 따르도다 처음에는 앗수르 왕이 먹었고 다음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그의 뼈를 꺾도다(렘 50:17).” 시편 74, 79편과 그에 앞서 80편의 시대적 배경을 회고하는 내용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신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30:10).” 그런데 이를 거절하고 의도적으로 무시할 때,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시 80:2).” 하는 남유다의 중보에도 북이스라엘은 유린당했다.
우리는 다를까? 믿음은 쉽고, 신앙은 어렵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주의 은혜로 믿음은 거저 주시는 것이지만 신앙은 각자 이뤄가는 구원의 과정이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 13:11).” 믿고 구원 받은 것으로 만족하는 영혼은 어리석다. 태어난 것으로 더는 자라지 않는 아이와 같다. 상대적으로 노인 바울은 감옥에서 죽기 직전에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하고 다짐하고 있다. 왜 그런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이것이 신앙의 필수다. 목자를 따르는 양의 숙명이다. 믿음으로 신앙생활이 시작되었고, 신앙생활로 박해 당함은 기정사실이다.
누가 신앙생활을 홀가분하게 할까? 저들은 예수를 쫓던 수많은 무리들과 같다. 이적과 기적, 기복적인 신앙으로 좇다 ‘말씀이 어렵다!’ 하고 떠나간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요 6:60).” 그래서 어쨌나?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 이는 참 복음을 알지 못한 자들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롬 5:8).” 이 사랑을 받았고, 누리고 산다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한 마디로 말해, 천국 들어갈 자가 그리 많지가 많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우리는 엄연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으로 활동하였던 한 의사의 회고이다. ‘그때에는 사람을 보느라,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하고 저는 고백한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제3국의 내란에 뛰어들어 환자들을 돌보며 희생했던 자이다. 오늘날에도 우리 사회를 위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이들이 많다. 이번 화재사건에서, 어느 건물 붕괴상황에서, 기꺼이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 서는 의인들… 한데 그러느라 ‘그때는 사람을 보느라,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면 저들의 수고는 그저 눈물겨울 뿐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아찔한 느낌이 드는가? 저들은 억울함을 호소한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22).” 그런데 주님은 오히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고 경고하셨다.
스스로들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자부한다면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 80:3).” 하는 오늘 시편의 호소에 엎드려야 한다.
오늘 우리는 ‘옷술’이라는 다소 생소한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 있다. 우리의 ‘옷술’이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민 15:38-39).” 이를 좀 더 쉬운 성경으로 읽어보면, ‘너희는 이 술을 볼 수 있게 달도록 하여라.’ 즉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행위를 위해서다. 주의 명령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그래야만 너희는, 마음 내키는 대로 따라가거나 너희 눈에 좋은 대로 따라가지 아니할 것이고, 스스로 색욕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새번연성경).” 곧 우리의 ‘옷술’은 옷깃에 치렁치렁 달려 거추장스럽다. 그러나 이로써 자신의 믿음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먼저 살피게 한다.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을 잃지 않게 한다.
지혜자는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잠 7:3).” 하였다. 나에게는 말씀을 읽고 규칙적으로 쓰는 묵상글이다. 누구에게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드리는 기도이다. 누구는 때마다 쓰는 성경 필사이다. 누구는 날마다 가는 새벽예배다. 우리는 저마다 옷깃에 옷술을 달아야 한다. 즉 자신이 누구인지, 그 말씀의 기준을 잃지 않게 하는 장치를 가져야 한다. 누구는 우리 교회에 보내는 약정한 후원헌금이다. 언젠가 저의 고백에서 때론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당장 이사하느라 몇 억을 빚졌다. 뒤늦은 학업을 시작할 때는 한푼이 아쉬웠다. 한데 저의 힘에 부치는 연보는 저의 옷술이었다. 누구에게는 교회 봉사다. 직분자로 그 사명에 충실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목자를 따른다는 일은 필사적으로 행하는 무엇, 저만이 옷술에 의한 신호다.
2. 우리는 주 없이 살 수 없는, 포도나무의 가지와 같은 존재이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시 80:8-11).”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사 5:1).” 하는 찬송이 우리 삶을 주도하는가? 가지는 나무에서 떨어지면 죽는다. 예수님은 이르시되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 15:1-2).”
교회에서 멀어져도,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아도, 기도 생활 없이도 살만하다면 이는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를 성경은 ‘화인 맞은 양심’이라 하였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별로 찔리는 게 없다. 헌금? 예배? 기도와 말씀 생활? 회개? 별로 크게 와 닿지가 않는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7-18).” 열매 즉 그 행실을 보면 저의 상태를 알 수 있다. 지혜자는 “비록 아이라도 자기의 동작으로 자기 품행이 청결한 여부와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잠 20:11).” 아직 어려서 그렇다는 소리는 틀렸다. 초신자라서 그렇다는 소리도 틀렸다. 이는 모두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고로 저의 안에 성령이 거하시지 못하는 것이다. 즉 성령을 거스르는 마음에 대하여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서로 싸우게 돼 있다.
오늘 시인은 절규한다.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시 80:12-13).” 경계가 무너져 아무나 드나드는 마음이 있다. 이 말 저 말 다 주워듣고 교훈을 얻는다. 그런 자는 성경의 가르침만을 옳다고 여기지 않는다. 스스로 편협한 자가 될까 염려하기까지 한다.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삿 2:13-15).” 어쩌겠나? 말씀대로 살아보는 수밖에. 살면서 그 괴로운 현실을 스스로 버벅거리며 사는 수밖에.
아,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시 80:14).” 오늘 시인은 주께 호소한다. 우리 안에는 ‘애굽에서 섞여 나온 무리’가 있다. 저들로 인해 늘 원망과 불평이 가시지를 않았다. 신앙생활이란 이를 걸러내는 일이다.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느 13:3).” 이를 위해 말씀이 있다.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시 80:15).” 결국 우리가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것이 아니다. 이는 명령이고 의무며 권리다. 하다못해 그 부모가 공인으로 살면 자식들도 그 행동거지를 바로 해야 되는데, 하물며 주의 자녀라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 돌아가는 물정에나 정신이 팔려서 온통 관심이 ‘육의 생각으로 성령을 거스른다면…’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 이와 같은 말씀으로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아무런 감흥이 없다면 가지는 가지인데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이다. 이에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롬 11:17-18).” 이것이 오늘 우리가 받은 은혜이고, 긍휼하심을 입는 결과이다.
나오는 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민 15:38-39).”
아무리 때가 악해도, ‘여호수아와 갈렙’은 시대마다 있었다. 모든 교회가 어떻다 해도 그 속에 ‘섞인 무리’는 있다. 바울은 스스로 ‘자신을 쳐 복종시키고, 날마다 자신은 죽는다.’고 하였다. 이 말이 과장이겠나? 이제 2년 뒤에 순교를 당할 터이고, 현재는 옥중에 갇힌 상황인데,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왜 이처럼 필사적이었을까? 하나님이 버리실까봐? 자신의 믿음에 자주 회의가 들어서? 그런 게 아니다. 우리는 주를 따라가야 하는 양들이다. 목자를 잃은 양보다 불쌍한 영혼도 없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포도나무의 가지다.
우리가 이를 알기 때문에 스스로 옷깃에 옷술을 달고 자신을 쳐서 근신하고 깨어있다. 이에 성령이 우리로 할 수 있게 능력을 주신다.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시 80:18).” 즉 하나님이 소생시키신다. 오늘 나를 나로 내 자신이 주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인 것을 알게 하는 옷술은 무언가? 그것으로 우리가 온갖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려 수고하는가? 다시금 이를 명심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해 일러라. ‘대대로 너희는 너희 겉옷 끝자락에 청색 끈으로 술을 달라. 이 술들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기억해 그것들을 행하고 너희 마음과 눈을 따라 음란하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 모든 명령들을 기억하고 그대로 행해 너희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기 위해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너희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다(민 15:38-41/ 우리말성경).” 이때에,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시 80:19).”
부디 어느 훗날 ‘주여 주여’ 하며 자신이 이룬 업적을 붙들고 장담하는 어리석은 성도로 서지 않으려면 ‘영적인 옷깃에 <옷술>을 달자.’ ‘우리는 주의 양이요, 주는 우리의 목자이시다.’ ‘주는 포도나무시요, 우리는 그의 가지다.’ 이를 앎으로 우리는 오늘도 ‘옷술’과 같이 이 말씀을 손가락에 매고, 가슴판에 새긴다.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계명을 간직하라 내 계명을 지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잠 7:1-3).” 다 늦게 고백하기를, ‘그때는 사람을 보느라,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는 어리석은 고백이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바란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시 80:3, 7, 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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