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78편 / 완전함으로 기르시고, 능숙함으로 지도하신다

전봉석 2022. 1. 7. 08:05

220109 주일

 

시편 78편

완전함으로 기르시고, 능숙함으로 지도하신다

 

 

시 78:1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시 78:2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시 78:3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시 78:72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들어가는 말

‘고맙다, 감옥아! 내게 찾아와줘서….’

 

설교를 한다는 이유로 존 번연은 1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의 현실은 끔찍했다. 그러나 저는 그 시간을 통해 <천로역정>을 비롯해 수십 편의 글들을 남겼다. 바울도 노인이 되어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에 빌립보교회에 편지하기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하는 내용은 다소 엉뚱하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바울은 기독교의 정수를 정립하였다. 그런 인물이 노년이 되어서도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3-14).” 하는 이 말, ‘고맙다, 감옥아! 나에게 와주어서’ 하는 번연의 말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적당하다는 것이 문제다. 부유함은 저주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은 일러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 19:24).” 어째서일까? 모든 것을 누렸던 솔로몬은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잠 23:4).” 뒤늦은 후회의 말이 아닐까?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하는 시인의 고백과 상충된다. 우리의 부유함, 적당함, 흔히 말하는 천만다행이 정말 다행인지, 아니면 저주인지. 죽을 병에 걸려 기도함으로 생명이 연장된 히스기야의 기도 응답이 정말 득이 되었는지, 독이 되었는지!

 

오늘 시편은 깨닫지 못하는 영혼의 끔찍함을 알린다. 자신을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지 못하는 것보다 무서운 저주가 없음을 알게 한다. 부르심의 은택을 입고도 그 은혜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사는 삶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본문 이해

오늘 시편은 지난날을 돌아보는 회고시이다. 시편은 119편 다음으로 긴 시편이다. 오늘 시편 78편과 105, 106편은 뚜렷한 회고시로 본문의 내용이 긴 것은 돌아보아 자신의 은혜를 회고하기 때문이다. 72절로 본문이 길지만 4연으로 나누었다.

 

1연은 듣고, 읽고, 깨닫는 게 복이라는 내용을 전달한다(1-4).

2연은 우리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책무다(5-31).

3연은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는 기도는 옳지 않다(31-53).

4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복이다(54-72).

이를 통해 우리에게 더하시는 복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 네 가지 우리에게 더하시는 복

 

1. 읽고, 듣고, 깨닫는 자가 복이 있다.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1).”

 

듣고 귀를 기울이는 일은 아무나의 것이 아니다. 말하기는 본능적이고, 듣기는 훈련으로 이루어진다. 자기 말만 앞서는 사람은 듣기 훈련이 안 됐다. 예수님은 일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 곧 말이 많으면 실수도 많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 듣기는 읽기만큼 수련이 필요하다. 글쓰기를 하는 경우 다들 적당히 쓰기는 쓰는데, 읽게 하는 일은 정말 불가능에 가깝다.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그러려면 먼저 입 좀 다물어야 한다. 그리고 들으려고 해야 한다. 듣고 헤아려 그 뜻을 알려고 해야 한다. 이는 엄청난 연마가 필요하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지난 주일, 우리는 ‘기도와 말씀 묵상’을 우선으로 시편 77편을 나누었다. 기도는 실제 내 소원으로 떠드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다. 묵상은 내가 떠드는 게 아니다. 가만히 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다. 묵상과 명상은 엄연히 다른데 묵상은 주의 말씀으로 듣고 채우는 것이면 명상은 스스로 자신을 비우려는 뉴에이지다. 왜 듣기가 그처럼 중요한가?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 25:2).”

 

오늘 시편은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2-3).” 결국 우리 묵상의 목적은 전하려는 것인데, 들은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을 우리가 후대에 전해야 하는 것은 의무다. “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4).” 이것이 또한 사명이다. 그리하여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즉 감추신 일을 깨달아 알고, 이를 후대에 전함이 우리의 일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곧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묵상-듣는 귀가 열려야 하나님을 전한다. 그런데 모두가 말하기는 빨리하고 듣기는 등한히 한다. 예전에 글쓰기를 배울 때, 시 한 편을 쓰기 위해 다섯 권의 시집을 읽으라는 교수의 가르침을 들은 기억이 난다. 좋은 작가가 되기에 앞서 좋은 독자가 먼저 되라는 소리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우리는 이 충만함을 먼저 깨닫고 누리고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2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 복되다.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7-8).”

 

아이가 자라듯이 거듭난 영혼은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에까지 자라간다. 이는 성령의 열매로 표현된다(갈 5:22-23). 성장은 감출 수 없다. 퀸터 그라스의 <양철북>에 나오는 오스카처럼 스스로 성장을 멈추려 난쟁이가 된 어른 아이와 같은 신앙인이 많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강조하시길,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시 92:12).” 성장하지 않는 믿음은 죽었거나 마비된 영혼이다. 성장은 먼저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메마른 땅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시 78:17).” 오늘 시편에서 언급하는 그들은 누군가? “에브라임 자손은 무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9).” 정작 전쟁의 날에 도망가는 군인 같은 성도들이 있다. 배반은 우리의 본성이다. 이는 우리의 욕심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욕심을 버리지 아니하여(30)” 결국은 하나님이 치신다. “그들의 먹을 것이 아직 그들의 입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노염을 나타내사 그들 중 강한 자를 죽이시며 이스라엘의 청년을 쳐 엎드러뜨리셨도다(31).”

 

믿음의 성장을 위한 비결은 하나뿐이다. “①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②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③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④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이 한 구절의 말씀 안에 오늘 주제가 다 들어 있다. 성장이 멈춘 신앙은 맛을 잃은 소금과 같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3. 하나님의 긍휼하심만이 복이다.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38-39).”

 

오늘 우리가 사는 것은 주의 긍휼하심으로다. 그러므로 탐심으로 기도하고 바라서는 안 된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참된 회개가 기도 되어야 한다.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시 78:40).” 거듭 그 일을 행함은 회개가 온전하지 못한 까닭이고, 기도는 듣지 않고, 묵상은 기다리지 않음으로 가증하다. 깨닫지 못하는 것은 짐승 같다. “그들이 그의 권능의 손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그들을 구원하신 날도 기억하지 아니하였도다(42).”

 

바울도 이를 개탄스러워하며,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이것이 우리의 실체다. 신앙이 성장을 멈추고 활동을 중지한 것은 자기 필요에 의해 따랐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 17:17).”

 

결국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실상은 믿는다고 하면서 안 믿는 자와 다를 바 없이 사는 신자들이 너무 많다. 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4.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복이다.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시 78:72)

 

순종은 막연한 이치가 아니다. 구체적으로 첫째, 죄를 떠나는 것이고(59-64). 둘째, 하나님과 마음이 합하는 것이다(65-72). 곧 우리 신앙의 성실함이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주어진 일, 그 경중을 따지지 않고 오직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이것이 우리의 책무다.

 

한데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①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②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열심히 혼자 삽질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자들을 세상은 성실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 생수를 담은 우물이 되어야 한다.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아 4:15).” 그럼에도 허튼 데 가서 연실 삽질이니 그 인생이 괴로울밖에! “그들이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음이라(호 5:6).” 이 얼마나 두렵고 끔찍한 일인가?

 

그럼에도 하나님은 오늘도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으로 참고 또 기다리신다. 왜?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 5:29).” 하나님은 결국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 이를 위해 우리를 기르시고 지도하신다.

 

나오는 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첫째, 하나님의 마음의 완전하심으로 우리를 기르신다.

둘째, 그의 능숙하신 손으로 우리를 지도하신다.

 

오늘 본문의 핵심이다. “이에 그가 그들을 ①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②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시 78:72).” 그러므로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네 가지 복, 첫째, 듣고 깨닫는 것. 둘째, 신앙은 성장해야 한다는 것. 셋째,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 넷째, 말씀에 순종하자는 것. 이를 위해서도 다시금 신년예배에 강조하였던 말씀, 기도와 묵상은 필수다. 이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의 기본적인 수련이다. 그럴 때, “큰 것에도 충성되고” 순종한다. 그런데도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가 이내 “큰 것에도 불의”하기 마련이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적당함, 여유 있는 재물, 이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하고 물우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한다(눅 16:10-12).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어찌, 인도하셨는지를, 우리는 후대에 알려야 하는 책무가 있다. 모두가 부르심의 사명을 받은 것이다.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창 31:44).” 말씀을 명심하고,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시 78:7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