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
민 23:5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 12:6
발람은 점술가일 뿐이다. 저는 이내 죽임을 당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살륙하는 중에 브올의 아들 점술가 발람도 칼날로 죽였더라(수 13:22).” 그럼에도 저이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말씀을 주셨다.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민 23:5).” 하나님에게 이스라엘은 어떠한가, 하는 것을 바로 알게 하려 하심이다.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21).”
어찌 저 같은 사람이 여호와께 묻고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22:8).” 어쩌다 일어난 단회적인 일이 아니다. “발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23:12, 7, 18).” 심지어는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24:3).” 저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하였다는 게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22:34).”
그러니까 어찌 저런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전하고, 저의 위에 하나님이 영이 임하실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점술을 쓰지 아니하고 그의 낯을 광야로 향하여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천막 친 것을 보는데 그 때에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24:1-2).”
이는 엄연히 그 단서가 뚜렷하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축복과 선히 여김을 하나님 자신이 느끼시는 것처럼 여기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야곱이여 네 장막들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들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 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 가의 백향목들 같도다(4-6).” 이는 오늘 본문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그 행실이 어떠하든지 저주를 받을 수 없고 저주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23:7-10). 저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특별한 백성이었다(24:18-24). 그뿐인가? 메시아가 나올 민족이다(24:15-19).
브올의 아들 점술가 발람의 입으로 토해낼 예언의 말씀으로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귀한 말씀들이다. 저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우리로 함부로 단정하지 못하게 하신다.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신 23:4).” 또는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미 6:5).” 곧 저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벧후 2:15-16).” 물론 저의 행실은 어그러진 길이었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유 1:11).”
점술가인 그가 어찌 하나님의 뜻을 듣고 알 수 있었을까? 또 하나는 이런 놀라운 체험을 하고도 어찌 그리 어그러진 길로 거듭 행한 것일까? 믿음의 능력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저에 대한 단서는 ‘의심하는 자’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민 22:12).”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알렸음에도 저는 회의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따랐다. 그 이유는 욕심 때문이다. 발락 왕과 사람들의 환대와 관심을 좋아했다. 그야말로 그의 손에 쥐어주는 ‘복채’를 마다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손에 복채를 가지고 떠나 발람에게 이르러 발락의 말을 그에게 전하매(7).” 저의 그러한 행실이 종국에 자신만의 일로 그친 게 아니라 이스라엘을 큰 유혹에 빠뜨렸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 2:14).” 즉 저의 일화는 후대에 이러한 선례를 남겼다. 결국 저는 어리석은 자의 대명사다.
우리는 엄연히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다. 우리가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전 9:12).” 저의 업적(?)이 특이하고 특별하다 해도 이는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다. 결국 특별한 능력이 믿음의 능력은 아니며, 어떤 의심과 회의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전하게 할 수는 없다.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14).” 바울은 이를 엄히 가르치며 자신의 결연함을 늘 되새겼다.
그야말로 다양한 사람 가운데서 산다. 가지가지하며 산다. 특히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그 일에서 발람과 같이 허튼 데 마음을 두고 허투루 자신의 귀한 사역을 수행하는 경우들도 흔하다. 나름의 어떤 특별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발람과 같은 유혹에 빠지기 십상이다. 사람들의 환대와 기대가 저를 망친다. 우리는 우리 일을 우리 스스로 선택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마치 결정을 스스로들 하는 것 같으나 일의 결정은 하나님의 것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우리의 본문은 하나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하나님이 나를 택하신 것이란 사실! 내가 주를 선택하고 기독교를 선택하고 그 많은 길 가운데 이 길을 선택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일은 부득불 우리가 할 일이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 9:16-17).” 발람과는 대조되는 바울의 진술이다. 문득 드는 생각이 주를 믿는다 하면서,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우린 얼마나 쉬 발람의 길을 따르는지…. 자기 욕심을 합리화하고, 안 그런 척 하면서도 현실적인 문제에 급급하고, 이를 따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인 것처럼 행하는 경우가 말이다. 너무 그럴듯하여 자신조차 자신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도 우리-주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하심을 잘 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보다 강하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이겨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민 22:6).” 이런 말을 들을 때 우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딨겠나?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곧 우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우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린다는 사실을….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8:18).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신 하나님의 이 권세가 얼마나 귀한지, 그러나 얼마나 또한 두려운 일인지,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19).” 이 놀라운 권능 앞에 우리를 붙드심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20).” 이를 명심하고 산다는 일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곧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곧 함부로 지껄일 수 없는 말씀에 대한 경고로 들린다. 돈을 좇고 사람들의 환대에 우쭐할 일은 더더욱 아닌 것이다.
특히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 마치 자신의 원하고 바라는 것을 추구하고 그 일을 추진하려 하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하나님은 그리 일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보이는 곳에 있지 않고 가치 있는 데 있다. 곧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수 있다면, 우리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흔적도 없이 흩어져야 옳다. 내가 드러나고 나를 기념하고 기억하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 위대한 사명에 사로잡힌 사람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와 같이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그런데도 이 길을 마다할 수 없었다(히 11:36). 또 누구는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37).” 그러면서 그 문제를 문제로 여겨 피하려 하지 않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38).”
우리를 세상 그 무엇도 감당할 수 없다. 가난도 질병도 어떤 슬픔과 어려움도 우리의 가는 길에 거침이 될 수 없는 것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39).” 어떻게 그러면서도 그리 행하였던 것일까?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40).” 이 땅에서는 얻을 수 없고 줄 수도 없는 ‘더 좋은 것’을 우리는 붙든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은 저들, 이스라엘의 어떤 소행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들을 사랑하신 까닭으로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사 48:9).” 우리가 뭔가 대단한 것은 우리의 어떤 자격으로가 아니다. 공로가 있어서도 아니다.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달리 행하였었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본 나라들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겔 20:14).”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달리 행하심은 은혜다. 은총이며 축복이다. 내가 목사가 된 것도 나의 어떤 재능이나 남다른 경험이나 특별한 믿음으로가 아니다. 내가 선택한 길도 아니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도 아니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시 143:11).
오늘의 나는 주의 의를 위함이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서이다. 발람의 교훈을 통해서도, 특히 사역자로 이 길을 가는 데 따른 두려운 마음이 왜 필요한지를 알겠다. 우리의 자격은 오직 하나, 감사함뿐이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2-13)” 그러므로 나의 충성은 무엇인가?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 25:13).” 과연 나는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종인가? 전에는 어떠하든지,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
(시 145:10).
궁극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와 스스로 이 길을 가야 할 것 같아서 가는 자의 길은 다르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23).” 나의 날들이 복음을 전하는 자로의 길인지. 그 길은 달리기 선수와 같이 달음질하며 상 받기를 바람인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24).” 설마 달려가면서 이미 스스로가 메달을 목에 매고 사람들의 환호에 도취되는, 발람과 같은 유혹에 빠져든 것은 아닌지. 이를 알려면 하나만 보면 된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25).” 나는 지금, 무엇을 절제하고 있나?
가끔 운동선수들이 나와 자신들이 메달을 따기까지 각기 그 종목마다에서 어떻게 훈련하고 생활하였는가를 대화하는 프로를 본다. 그럴 때면 공통적인 게 절제였다. 규칙적인 생활로 몸에 밴 습성과 스스로 억제하는 식단과 피땀 흘리며 인내하였던 모진 훈련 과정에 대해 듣다보면, 오늘의 저의 영광이 괜한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저절로 갖게 된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맨 마지막에 열린다. 그 맨 앞에는 사랑이 견인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나는 선수들이 나누는 이야기에서 성령의 열매를 연상하곤 한다.
저들의 공통점은 사랑이었다. 희한하게도 모두 좋아서 했다는 것인데, 하긴 누가 억지로 시킨다고 그 일을 평생 과업으로 놓고 자신을 쳐서 복종시킬 수 있었겠나? 저들 속의 사랑이 모든 고통스런 훈련도 즐거움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성령의 열매 두 번째가 희락이다.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그와 같은 즐거움이 저들로 오래 참게 하였다. 그와 같이 우리 성도의 구원도 점점 성숙하여 성화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오래 참음이 ‘자비와 양선과 충성’을 더함으로 ‘온유’하게 한다. 자비도 주의 것이고 양선도 주의 것으로 주가 더하실 때 충성도 가능하여서 주와 함께 함으로, 그 절대적인 필요성 때문에도 온유하여진다. 한데 이 모두를 뒤에서 밀어 올리는 것이 절제다. 맨 사랑이 앞에서 끌고 절제가 맨 뒤에서 민다. 우리의 가는 길도 그와 같을 터,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고전 9:26).” 이를 풀어보면 내가 임의로 내 의지와 나의 선택과 만족으로 행하는 게 아니었다. 도리어 그런 나를 굴복시키는 데 있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27).”
언제든 나도 발람이 될 수 있다. 두려운 일이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하신 주님의 음성이 화들짝 놀라게 들리는 듯하다(눅 17:32). 다 이룬 줄 알고, 또는 자기만족으로 이 길을 걷다가는 영락없다. 아!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시 12:1).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발람의 길로 빠진다. 이는 참 뿌리치기 힘든 유혹으로,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2).
돈 때문이다. 명예나 사람들의 인정 때문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참혹할 따름이라.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그럼에도)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3, 4).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것은 내 안에도 수시로 드나드는 마음이라….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8).
덩달이 쓸려 가기 십상인데,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5).
곧 이와 같은 주의 긍휼하신 말씀 앞에 엎드림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6).
왜 오늘도 연단이, 연단이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알겠다.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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