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전봉석 2022. 2. 21. 05:09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

신 5:32-33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 30:5

 

 

모세는 백성들에게 호렙산에서 받은 십계명을 상기시킨다. 이는 구원자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주이심을 확신하는 일이다. 출애굽 1세대라 할 수 있는 조상들의 불신앙은 역설적으로 순종의 순도를 더하는 역할을 하였다.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7-11), 율법의 근본으로 말씀의 근간이 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이는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으로 이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살전 1:6-7).” 곧 우리 삶이 그리스도를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본받는다.

 

베드로는 이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5).” 결국 오늘 우리의 삶을 보호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6).” 삶의 노여움이 우리로 찬송하게 한다. 이는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7).”

 

나는 자주 생각하기를 내게 어찌 믿음을 주셨는지, 왜 내가 주를 나의 아버지로 믿을 수 있는지, 현실적으로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8-9).” 그 결국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이성과 판단으로 믿는 믿음이라면 그때마다 이게 달라지겠는데, 어찌 내 안에 믿음을 두시고 다 죽은 줄 알았던 나로 주를 바라게 하시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할 때에 ‘십자가의 도’가 십계명의 좌표로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본다. 결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그러니까 내가 어찌 주를 알고 믿고 의뢰하는지, 교회를 이루어가는 일에서 그 증거는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골 2:8-10).” 그러므로 성경은 한 길로 이어진다.

 

말씀 앞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이와 같은 진리의 길이 한 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이를 다시 강조하면서 오늘 모세는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신 5:32-33).” 주어진 날의 인생 그 이상의 생을 두고 하는 말씀인 것을 이제는 안다.

 

코로나가 바꾸어 놓은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가령 줌으로 예배를 드림으로 가정에서의 사역이 산다. 딸애는 주일이면 서너 차례 줌으로 활동에 참여하는 것 같다. 주일학교 교사로 청년부 예배로, 소모임에, 저녁에는 기도회로까지. 아무래도 규모가 있고 청년들 중심의 교회이다 보니 이런저런 활동이 많기도 하겠지만 이를 다 참석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모습에서 주의 놀라운 은총을 확신하게 된다. 우리 또한 줌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여러 가지 불편한 게 있으나 또한 그것으로 먼 곳에서도 함께 참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는 모두 교회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모두 각자의 역할과 그 사명이 다르다 해도, 부르심이 다르고 느끼는 강도 또한 다르다 해도, 우리는 모두 한 길 가는 순례자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3-14).” 서로가 사는 환경이 다르고, 됨됨이가 다르고 역할이 다르다 해도, 하나 되는 것은 ‘믿는 일과 아는 일에서’이다. 그리하여 ‘온전한 사람’ 곧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가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종종 말하지만 나는 가정예배를 추천하고,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주의 이름으로 말씀 앞에 앉는 일이 복이었다. 일찍이 하나님은 나로 주의 부르심에 합한 자로 삼으시면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세 가지 일을 경험하였다. 이는 칼빈의 표현처럼 ‘불가항력적인 성도의 견인’이 확실하다. 먼저는 가족들 앞에 엎드려 나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 저들 앞에 무너지게 하신 일이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게 아침에 서둘러 학교 갈 채비를 하고 있던 중2, 고1 아이들 앞에서였다. 낚시를 갔던 사람이 난데없이 돌아와서 엎드려 우는데 어린 것들이 어찌 당황하지 않았을까? 그날부터 우리 가정은 지금까지 가정예배를 이어가고 있다.

 

다음은 나를 못 살게 구는 것으로, 어쩜 그리 눈물이 나는지… 어쩌면 그때 새벽예배를 기를 쓰고 나갔던 것도 울고 싶어서 갔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오죽하니 그때 다니던 교회 담임목사는 가족 중에 누가 불치병이라도 걸렸는가, 하고 묻지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지켜만 보고 있었다고 하였다. 정말이지 그땐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십여 분 이상 차를 몰아 새벽예배를 다녔고, 아이들 등굣길에 서둘러 아침을 차려주었다. 이를 그냥 이렇게 쓰면 전달이 어려울 텐데, 내가 본래 그러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하나는 점점 아이들 앞에서 강요된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불쌍하게 비춰질지언정 내 멋대로 굴던 가장의 외투를 벗었던 것이다. 나는 늘 내가 대장이라, 누구의 기분이나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멋대로 가장이었다. 이를 하나님은 벗기시는데 일 년을 공들이셨고, 나는 처음 신대원 시험에 낙방을 하고도 의당 이제 더는 물러설 길이 없었다. 곧 교회는 가정을 바로 세우는 데 있어 서로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신학교를 떨어지니까 어머니는 대뜸 가정을 먼저 세우시려는 것이라고 단정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이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12:12, 27).

 

어쩌면 오늘 모세의 간곡한 설교의 중심 내용도 이 의미로 축약된다. 왜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셨는지, 이는 하나님의 자녀로 서로 한 가정을 이루고 교회를 세워가는 일처럼, 자신이 바로 설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고,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가 이루어질 때 그 민족을 돌보심이었다. 이를 위해 때론 어려움도 주신다. 고통을 더하시고 그 기간을 놓아두기도 하신다. 그렇다고 외면하거나 아주 잊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오늘 시편은 이를 노래한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 30:5).

 

푸시킨의 시처럼, 삶이 우리를 속인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속이실 리 없다. 이는 주의 공동체를 위해서도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열에 아홉은 가정에서의 문제로 개인의 고통은 가중되고, 개인의 갈등으로 가정의 분란은 더해진다. 이는 마치 악순환과 같아서 어느 한 사람의 인격적인 문제로 빚어지고 마는 일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전가되는 것은 병원균과 같이 죄의 문제이지, 이상할 정도로 선한 영향력은 너무 더디고 힘이 모자란다. 결국은 성령으로다. 하나님이 하셔야 가능할 일이다. 곧 우리의 삶은,

 

나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또 주께서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셨나이다

(시 18:33-36).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는 것은 막연한 바람이 아니다. 그러는 동안 꽤 모진 시간을 견뎌야 할 수도 있다. 나의 이 고백은 순전히 경험으로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지극히 의존적인 사람이라, 특히 아들은 늘 내게 우상과 같은 존재였고, 대립과 갈등의 구조였다. 또한 나에게 부모님은 항상 의존의 대상이었으며 거역하고 멀리할수록 저들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이 두 사실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는데, 하나님은 신대원으로 나를 보내시기 전에 이 두 사실을 모두 멀리 떼어놓으셨다. 아들은 어쩔 수 없이 필리핀에 있는 동생에게로 어쩔 없는 처지여서 보내야 했고, 그 즈음에 부모님은 미국 엘에이에 있는 어느 교회에 초빙되어 딱 그 시간 동안 나가계셔야 했다. 것도 지금에 와서는 기가 막히는 타이밍이다. 감히 말하지만 저 둘, 부모님과 아들이 계속 내 옆에 있었다면 결국 나는 그 훈련의 과정을 다 마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핑계로든 주의 부르심에 불응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를 더하면, 나를 죽이신 일이다. 어떤 이유로든 공황이 오고 듣도 보도 못한 정신과에서 범불안증이라는 의사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아니, ‘내가 누군데…!’ 나처럼 자아가 강하고 나름은 모든 악조건에서 살아왔던 위인인데, 마치 김장김치를 소금에 절이듯 나의 모든 의지에 소금이 뿌려졌다. 빳빳하고 뻗대기 일쑤이던 순이 서서히 흐물거려서 더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또 다른 나로 생성되었다. 곧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말, 이는 아무나 낭만적으로 할 소리가 아니다. 그 삶이 어찌나 잔인하고 가혹한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하여,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시 30:6).

 

이와 같은 고백 또한 누구나의 것은 결코 아니다. 결국 우리의 제자 됨이란,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미 6:6).” 그 무엇으로도 갚을 길 없는 주의 강권하심과 은총은 가히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7).” 결국 나는 성경의 일갈처럼 하나님이 보이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머리로만 알다 눈으로만 보다 마음으로만 느끼다 비로소 이처럼 입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8).

 

주와 함께 행하는 삶, 이를 위한 고통이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5).” 곧 오늘 나의 나로 사는 날들이 결코 거저 주신 게 아님을, 이를 위해 주께서 치르신 값진 희생과 사랑을 어찌 말로다 할 수 없음을. 비록 줌으로나마 말씀을 전하다, 가족들과 같이 예배를 드리다, 불쑥…

 

그러므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히 10:36).

 

결코 헛되지 않은 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에 오늘 시인은 나를 불러 세워 말씀 앞에 앉히는 것 같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시 30:1).

 

이제는 나는 이를 안다. 그리 통과하여 왔고 오늘도 숱하게 겪는 일이다. 이에,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2).

 

이 놀라운 체험은 개인적으로는 나를 두고, 가정을 보며, 교회를 함께 이루어 가면서, 비록 세상에서의 어떤 평가나 기준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랑,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4-5).

 

이를 앎으로 나의 영혼은 이제 춤을 춘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1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