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신 4:23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 29:11
약속의 땅은 차지할 땅이다. 순종으로 채워가는 곳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채워가는 곳이다. 오늘 우리의 순종으로 차지하는 땅이다. 이를 위하여 경주하는 삶이 신앙이다. 이는 바울의 진술에서 잘 나타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그저 믿음으로 거저 주신 바 모든 게 다 아무나의 것이 아니다. 하여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3-14).”
곧 ‘부르심의 상’은 오늘 말씀과 같이 예언자적인 자세와 사명이 필요하겠다. 이를 위해 오늘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할 것을 강조한다. 이는 도덕률이 아니다. 도덕은 세상에서의 공리가 아니다. 우리는 그리 선하지 않다. 나는 내가 잘 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5).” 이는 본질적으로 죄의 속성 때문이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6-17).” 나는 여전하여서 오늘도 나를 굴복시키려 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18).”
이를 두고 사투를 벌이는 게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신앙이다. 채워가는 천국이고 들어가 차지할 하나님의 나라다. 이에 모세는 오늘 본문에서 단호하게 일깨운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신 4:23).” 곧 오늘 나는 무엇에 그리 정신이 팔려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형상의 우상’을 조각하느라, 그리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사는지. 오늘 우리의 도덕은 주께 나아오는 것, 예수께 가는 것,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우리가 애써 만들고자 하는 어떤 우상은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마음’이다.
즉 가장 무서운 우상은 자신에 대한 착각이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우상은 드러나는 형태의 삶이다. 추구하는 이상하고 본질이다. 그것이 손으로 만들어지듯 공들여 애쓰는 결과다. 이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 그래서 야보고 사도는 그리 단호하게 강조하고 요구하였던가 보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약 2:20).” 이 놈 저 놈 가릴 것 없이 한 표라도 더 얻으려고 여기에도 머릴 조아리고 저기에도 머릴 조아리는 정치판의 축소가 개인의 삶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게 우상이다. 고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
믿음은 거저 얻는 것이나 신앙은 거저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우리의 인격성은 자신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이다. 즉 가장 큰 난제는 자신의 수고와 고생하는 것을 두고 스스로 셈을 하는 일이다. ‘내가 이만큼 이뤘다.’고 여기는 자부심이 그 증거다. 그것으로 남을 비판한다. 어떤 만족도 거진다. 가진 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또 이상한 일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달라고 하는 사람은 결국 그리 행하지 않는다. 저신이 할 수 있을 거라 여기는 한 그렇다. 그래서 우리의 인격은 내가 이루는 어떤 성품이나 덕이 아니었다. 그리스도 예수와의 관계다. '내게 오라.' 하심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성품이 된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이를 삶에서 절감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우상을 만들지 않는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24).”
모처럼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의 삶에서 주와 어찌 동행하며 사는지를 나누었다. 서로의 일상에서 더는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다투듯 앞서 고백하는 일은 귀하였다. 전에 같으면 빤한 일상으로 채워가고 있들을 두고 이제는 오히려 여러 어려움을 자랑하고, 그 안에 머무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알아가는 일에 자랑한다. 오늘 본문에서 40년 광야 생활을 회상하는 모세의 간곡한 당부도 축약하면 그것이다. 규례와 법도를 지켜 순종하는 삶, 우리가 서로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말의 초점은 그리하여 주를 더욱 바라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가끔씩 어느 친구와의 통화는 즐겁다. 통화를 하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때에 나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점검하듯 살피게 된다. 저의 이야기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진귀하기까지 하다. 늘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누구와는 이게 그렇게 어렵다. 누구와는 이처럼 즐거운 고백이 누구에게는 독백이 된다.
이는 우리가 더는, 내가 내 것이 아님을 서로가 알고서부터다. 곧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내가 내 것일 수 없다는 게 이처럼 안도할 일인가? 싶을 정도로 이제는 참 다행이라 여긴다. 어쩌다 누가 먼저 예전의 우리 모습을 꺼내면 그게 그렇게 송구하고 부끄러울 수가 없다. 가슴이 먹먹해오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를 떠올리다 울컥, 눈물이 고이기도 한다. 더는 내가 내 것이 아니라는 데서 안도하는 게 왜 복인지! 지난 날의 나를 내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라면 이보다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즉 이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더는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나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않고 그 앞에 절하지 않기를 바라는 모세의 마음을 나는 그리 이해한다. 내가 추구하며 사는 것은 이제 오직 하나, 주 앞에 거하는 일로….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4).
이는 내가 목사가 되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알면 알수록 이보다 더 바라는 것은 없어진다. 저마다의 삶은 어렵다. 삶이 왜 어려운가를 알면 알수록 주님의 단호한 말씀이 점점 더 옳게 여겨진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만일 그것이 돈이면, 건강이면, 자식이나 가족이면, 행복이면… 그것으로 우상을 삼아 실족하느니, 없이 사는 삶으로 주를 더욱 바라는 게 복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주의 양을 먹이지 않는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 21:15-17).”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물으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할 때에 우리의 대답은 간단하고 삶은 어렵다. 쉬울 수 있는 대답이 가장 어려운 삶으로, 당장에 처한 현실이 늘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는 주가 주시는 힘으로가 아니면 단 하루도 온전히 주의 백성으로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안다. 알면 알수록 내가 내 것이 아닌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를 또한 안다. 그럴 때,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 29:11).
하는 오늘 시편의 말씀에서 우리의 평강이 힘인 것을 확신한다. 평강은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이렇게 중요하여 차지할 땅에서의 기본적인 배경인 것을 알 수 있다. 곧 나의 삶 속에서 주가 어찌 함께 하셨는가를 항상 묵상하는 것, 이를 내 자식들과 내 곁의 모든 이에게 알게 하는 일, 곧 우리의 사명은 “여호와께서 그의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에게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13).” 그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사는 것이 귀하였다.
어디서 읽은 내용인데 왕으로서 세 가지를 많이 가져서는 안 된다 한다. 먼저는 말(馬)이다. 다음은 여자이고, 다음은 은금이다. 말은 많으면 전쟁이 빈번하고, 여자가 많으면 향락에 빠지고, 은금이 많으면 더 가지려 사욕이 끝이 없다. 이것을 한 단어로 압축한 게 우상이 아닐까? 우상은 숭배하고 이를 취하는 형상인데, “보라 그들은 다 헛되며 그들의 행사는 허무하며 그들이 부어 만든 우상들은 바람이요 공허한 것뿐이니라(사 41:29).” 그런데 과학이 발달했네, 사람들의 삶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현대사회는 미개하지 않다면서 “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가르침은 나무뿐이라(렘 10:8).” 특히 이번 대선은 어쩌다 보니 우상들의 전쟁이 된 것 같다. 다들 주술을 두고 싸운다. 대통령으로서 국가의 가치나 국민의 이상을 두고 하는 말은 없고, 온통 미신들로 가관이다. 모름지기 고위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은밀하게 이를 점친다. 어디에 어떻게 무엇을 얼마나 더 투자해야 할지, 모르는 미래를 두고 불안한 것이다. 남들보다 잃을 게 많으니까.
이때에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를 일깨우신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아니면 우리도 어느새 그리 따라한다. 자신이 자신을 알면 알수록 오히려 우리의 위대함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게 되는데,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오늘 모세의 여러 당부는 곧 기도의 실제를 말해주는 것도 같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여야 할까? 하는 것을 두고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사 너희에게 규례와 법도를 교훈하게 하셨나니 이는 너희가 거기로 건너가 받을 땅에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14).”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15).” 여기저기 금송아지들이 보물찾기처럼 숨겨진 세상이다.
과연 오늘 나는 무엇을 삼가야 할까?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남자의 형상이든지, 여자의 형상이든지, 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형상이든지, 하늘을 나는 날개 가진 어떤 새의 형상이든지, 땅 위에 기는 어떤 곤충의 형상이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어족의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16-18).” 실제 우리가 감탄하고 좋아라, 여겨 아낌없이 투자하고 얻고자 하는 것의 대부분들은 저들이 먹고 남은 부스러기라도 좀 취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공부방에서 오는 아이 중에 하나가 어느 브랜드의 희한한 신발을 신고 왔다. 밑창을 하나 더 붙인 것도 같고, 만들다 만 것도 같아서 물었더니, 무슨 한정판으로 150만원이 넘는 운동화라고 했다. 이를 신다가 어느 중고 사이트에 올려도 100만원은 족히 넘겨받는다고 하는 말에 나는 기겁을 했다. 차라리 그걸 팔아서 노트북이나 하나 사서 글쓰기에 활용해라, 하고 말했더니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하긴 요즘은 서로가 서로의 말이나 생각,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자식과 부모 사이에도, 사랑하는 사이에도 이해 못할 말과 행동들이 난무하다. 고작 엊그제 있었던 일로 나는 그 집 형편도 넉넉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그리 말한 것인데. 하긴 어느 커피점에서는 사은품으로 주는 행사상품을 얻으려고 마시지도 않을 커피를 수백 잔 사서 커피는 버리고 행사상품만 갖는다는 뉴스를 보면서도, 점점 더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요지경인 세상에서 우린 무엇으로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할까? 이에 대한 답이 오늘 본문에 나온다. “또 그리하여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19).” 그러니 원래 미친 세상에서 사는 것인지, 점점 미쳐가는 세상을 사는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우리는 점점 뭘 어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데,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달리 방법이 없다. 내가 못하니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한다. 내가 어찌 하려하기보다 주께 나아가는 일이 더 쉽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도덕률이다. '내게 오라.' 하실 때 그리로 달려가는 것.
주님도 그런 우릴 위해 기도하신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 17:9).” 그러니 내가 주의 것이라는 사실이 왜 이처럼 안도할만한 일이고, 이제는 천만다행스러운 일인지, 내가 내 것이 아닌 것에 왜 이토록 감사하게 되는지,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10).” 아, 나의 나아감이 주의 영광이 되신다고? 오늘 모세의 안타까움으로 절절한 기도가 들리는 듯하다. “나는 이 땅에서 죽고 요단을 건너지 못하려니와 너희는 건너가서 그 아름다운 땅을 얻으리니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신 4:22-23).” 그러므로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29).” 오늘 시편은 이를 반증하듯 다윗의 진술로 그 의미를 확실히 한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시 29:2).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11).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0) | 2022.02.22 |
---|---|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0) | 2022.02.21 |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0) | 2022.02.19 |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0) | 2022.02.18 |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0) | 2022.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