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전봉석 2022. 2. 19. 05:34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

신 3:22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 28:7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싶어 여호와께 다시 한 번 간청하는 모세의 간구가 눈물겹다(23-26). 그럼에도 모세는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격려한다.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22).” 비록 자신은 들어가지 못할 것이나… 마치 오늘 시편은 저의 마음을 대신하는 것 같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 28:7).

 

저의 출애굽 사역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밟아보고 죽는 것이었겠다.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23-24).” 하고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25).” 하나님은 그만하면 됐다, 하신다.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26-27).” 하시고 그에게 마지막으로 일러 후계자 여호수아를 담대하게 하고 강하게 하라 하신다.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28).

 

나이든 모세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주의 일은 우리 맘대로 행하여 이끄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련하고 어리석을 정도로 바보 같은 면이 우리로 주의 길을 온전히 가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 깊이를 더하는 자가 ‘십자가의 도’를 곧이곧대로 듣고 믿고 그리 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8).” 아니면 이를 우리가 어찌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는 성경의 역설이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19-20).”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변론할 수 있겠나? 곧 ‘우리에게 두시는 미련함’이 믿음이다. 믿음은 우리로 깊이를 알 수 없고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뛰어들게 한다. 이는 참으로 무모한 일 같으나 두고 보면 그 안에서 우리는 춤추고 노래하며 주를 찬송한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예측을 불허하신다. 관습을 따르지 않고 때론 명료하지 않다. 늘 우리 마음에 드는 생각, 이 길이 맞나? 내가 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도리어 자유로운 재즈연주처럼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연주하게 한다. 이는 결코 무질서함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의 관심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게 한다. 나의 몸이 원하는 일보다 그 영혼이 바라는 데로 이끈다. 오히려 이를 훼방하는 것이 몰입이다.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면 자기주장이 강해진다. 실용적인 것에 굴복한다. 대표적으로 요나의 사역이 그러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 4:1-2).” 인애하신 하나님을 앞서 알고 있었다.

 

저는 그래서 자신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뜻을 원하지 않아 그 반대로 갔다. 나름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악독이 가득한 땅은 멸망해도 마땅하다고 여기는 배척이 저의 판단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하실 때에 앞서 짐작을 했는지도 모른다(1:2). 이에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3).” 이때도 보면 마침 그때마다 그럴 수밖에 없도록 돕는(?) 길이 열린다. 저가 주의 얼굴을 피하려 할 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고, 스스로 그 배삯을 물고 그 배에 올랐다.

 

이를 하나님이 그냥 두실 리 없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4).” 저로 인하여 모두가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종종 나로 인해 우리 가족들이 또는 주변의 이런저런 일들이 어려움을 겪었던 사실을 상기한다.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5).” 그런 걸 자신만 모른다. 그 영혼이 잠들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큰 물고기 뱃속에서야 깨닫는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2:1-2).” 스스로 먼저 주의 인애를 체험하며 고백하는 기도이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5-9).

 

그런 저가 주께 항변하며 아뢰는 말은 기가 차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4:3-4).” 자신이 용서 받고 구원 받은 일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못하고 도리어 악독으로 가득하던 니느웨 성 백성들이 회개하자 용서하시는 것을 보고 배알이 뒤틀렸다. 왜 나는 요나라는 인물을 묵상할 때면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은지 모르겠다.

 

자아도취는 자기 뜻이 강하고 이를 강요하는 데 있어 상대를 억압하고 통제하려 든다. 그러면서 저의 속엔 안식이 없다. 모든 게 다 내 이야기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비로소 안식이 찾아온다. 막다른 길, 그곳에서 하나님이 먼저 나와 기다리고 계신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내 곁의 젊은 사역자들을 보며 저들 나름의 생각과 이런저런 판단을 두고 생각이 많아질 때도 그럴 때이다. 때론 우리의 의욕이 주의 길을 가리고, 자신의 재주가 주의 일을 에둘러서 하게 한다. 요즘 자주 드는 생각이 ‘겸사겸사하는 일’이란 주의 일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이시기를 기다리신다. 이를 위해 얼마든지 참고 기다리신다. 그러는 동안 물고기 뱃속에서의 굴욕은 자신의 몫이다. 험한 풍랑 가운데 고생은 같이 하는 가족들의 몫이고 주변을 괴롭히는 일이다. 내가 그리로 와서 잘 안다. 저에게 이른들 저는 결코 듣지 않는다.

 

항복 없는 안식은 없다. 자기에게 몰입하고 있는 동안에는 어림없는 소리다. 주의 일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다. 솔직히 아주 가끔은 지금도 ‘돈 되는 일’에 눈길이 간다. 마저 끝내서 임상심리 2급 자격증을 딸까? 교회가 이렇게 안 되는데(!) 글방으로 돌려서 교육청에 신고하고 사업자등록을 새로 낼까? 누가 오고 가면 얼마씩이라도 받고 가르치거나 상담을 할까? 어디 글을 좀 내서 이제라도 못 다한 꿈을 이루듯 돈벌이를 할까? … 여전한 내 안의 ‘요나’는 이런저런 상황이 마뜩치가 않다. 이러고 있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 때면 어찌 그걸 알았는지, 때론 가까운 친구가 또는 선생이 귀에 솔깃한 제안을 한다. 무슨 출판을 권하거나 어떤 일에 같이 할 마음이 없는가 하고. 이는 매우 실리적이고 실용적이다. 이러고 있으니, 어차피 하는 일 그러면 이래저래 서로가 좋을 것도 같다. 한 번씩 그런 마음에 휘둘리면 정신이 다 흐릿해지는 것 같다.

 

그때마다 나를 가만히 앉히시는 것은…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 4:7-8).” 곧 저는 성령이시다. 내 안에 왠지 답답한, 어떤 꺼려지는, 선뜻 기쁨으로 아멘, 할 수 없는 어떤 마음이 가로막는 것을 느낀다. 가령 아이들이 오면서 예전에 나름 가르쳤던 기술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더 많은 아이들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려면 교회를 지우고 글방을 새로 부각시켜 돈도 받고, 그 일에 좀 더 전념해야 한다. 그런 마음을 조금 내비치면 아내는 화색이 돌면서 기다렸다는 듯 권한다. 요즘은 이래저래 공모전도 많고, 글을 제법 쓰면 얼마든지 대학에 갈 수 있는 특성화가 갖추어졌다. 한 마디로 돈벌이가 될 수 있다는 소리다. 솔직히 어제도 아이들과 같이 말씀을 나누고 이를 글로 써보게 하면서 불현듯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말씀은 일침을 가하듯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어쩜 딱 그때 이와 같은 말씀이 가로막고 서시는지! 내가 나를 아는데, 나의 집착은 나의 자아도 집어삼킬 정도로 끔찍하다. 한 번 자아에 몰입하면 모든 게 다 자기 위주로 돌아가야 한다. 이를 오래 참으시다 막다른 골목에서 나를 기다리셨다가 오늘에 두신 것인데, 내 안에는 여전히 나에게 집중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돈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말씀이 공연한 과장이 아니다. 그것 때문에 주의 일에 온전하지 못한 경우들을 많이 본다. 어쩔 수 없다고 하나 돈벌이란 본래 어쩔 수 없는 환경에서 결실을 맺는 법이다.

 

누가 교회 개척을 생각하고 주의 일을 마음에 두고 있다. 각자의 재능이 있으니까 그것을 살려 주의 일에 활용하자는 것인데, 점점 그 계획은 교회를 이루어가는 쪽과는 반대로 간다. 은연중에 돈벌이가 되겠나? 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 쓰러진다. 그럴 때 또 성경은 일갈하신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이와 같은 말씀이 귀에 들어오고 눈에 보일 때 정신 차려야 한다. 아니면 내 곁에 나는 숱하게 보았다. 비즈니스선교라는 게 열에 아홉은 사역은 잃고 사업만 남는 법이다. 친구 중에도 결국 선교사로 시작했다가 무역상이 된 친구도 있다. 누구는 아예 중국을 오가는 보따리상이 되었다.

 

나는 아이들이 글을 쓰는 동안 잠시 그 모습을 보며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털어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사역자는 사업가가 아니다. 사업과 사역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낭만적인 소리다. 또 누구는 선친이 물려준 땅에 몇몇 뜻을 같이 하는 교인들과 의기투합하여 펜션 겸 정원교회를 시작하였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목회 같았다. 나름은 심신이 지친 영혼들이 와서 며칠씩 말씀과 기도로 위로 받고 가는 것을 꿈꾸었던 것인데… 각각의 돈이 들어갔으니 본전 생각이 나고, 이문을 남기려 하니 주일에도 일반 손님은 받아야 하고, 그러다 서로 감정은 어긋나고 서로 얽혀 고소를 하고 자기 지분을 요구하는 처지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항복 없이 참 자유는 없고, 안식은 막다른 길에 있다.

 

오늘 모세의 간구를 들으며 어떤 연민이 들다가도 이에 승복하고 주 앞에 순종하는 저의 모습에서 새삼 ‘낭만적인 사역’이란 없단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를 오늘 시편은 일깨우고자 하는 게 아닐까?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시 28:1).

 

시인의 막다른 길에서의 주를 바람이다. 이내 우리는 주께 승복함으로 아뢴다.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2).

 

주의 일은 주가 하신다. 교회는 주의 것이다. 저의 피로 세우신 것이라. 나는 새삼 아이들의 어쩔 수 없음-무기력과 상실, 그 가정의 와해와 반목 가운데서 저 영혼을 교회로 보내신 것이지 글방으로 보내신 게 아님을 새삼 바로 보았다. 내가 하네, 마네, 할 소리도 생각도 아니다. 주가 보내시는 한, 나는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6).

 

이와 같은 확신은,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7).

 

그리할 수 있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내가 하여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주는 반드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