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전봉석 2022. 3. 21. 05:22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신 33:29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시 58:11

 

 

모든 게 적당하고 적절하였다. 누구라도 피해갈 수 없는 듯 전염병은 창궐하였고 가까운 이들이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친구의 감염소식이 가슴 아팠고 한편으로는 이참에 주를 더 가까이 알기를 바랐다. 예배 직전에 받은 연락이라 그리 말해주고도 내심 저의 뒷말이 마음에 남았다. 많이 아프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람이란 산상수훈에 이르시는 여덟 가지의 교훈을 따르게 된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 늘 하나님을 우러르며 그 마음에 주를 모시기를 바라고. 애통함은 자신을 돌아보아 주 앞에 늘 부끄러움뿐인 것을. 온유함이란 주를 바라니 더는 기대하는 것이 없고.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란 하나님을 더욱 알고자 하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 같음이며. 긍휼히 여김은 자신이 긍휼히 여김을 받은 것에 대해 갚을 길 없어하는 마음이고, 마음이 청결하다 하는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둘 자리가 없음일 것이며. 화평하게 하는 것은 저들이 곧 하나님의 선을 위한 것임으로 그들을 대함이 주를 향한 마음이고, 의를 위하여 박해도 기꺼이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이겠다.

 

이것을 스스로 자부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잠 20:6).” 세상이 악함을 아는 일 만큼 자신을 돌아보아 근신하게 된다. 이에 온전히 행하기를 바라는데,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냐(9).” 스스로는 감당이 안 되는 마음이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의를 당부하시는 것은 그것이었다.

 

가만히 지나온 시간을 돌아볼 때 친구와 함께 했던 나의 날들이 까마득하게 여겨진다. 어느새 머리는 성기고 서로의 아이들은 장성하였다. 우리가 함께 돌아치며 살았던 시간이 때론 아쉽고 때론 답답하기도 하나,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이로 나아오게 된 것은 복되다. 그에게도 말한 적이 있는데 인생의 굽이 때마다 저의 질병이나 고통이 나로 주춤, 경계하게 하였고 두려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였다. 뭐랄까, 늘 내게는 간접조명처럼 저를 통해 주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셨다.

 

그러므로 온전히 주를 바람이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는 언제나 애통하고 사죄함이여,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시 86:5).

 

그런 점에서도 나에게 저 친구는 항상 주께 다시 돌이켜 용서하심을 구하게 하였다. 그러니 오늘 모세의 고별사처럼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 여기서 이스라엘이 나였다. 우리 믿는 자의 총칭이다.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이를 알기까지 나는 얼마나 먼 길을 돌아서 왔던가? 주의 마음을 참 많이도 아프게 하였다. 늘 배반하고 주를 거역하기를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는 친구여서도, 나는 그의 앞에 서면 더욱 더 주의 긍휼하심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이 많은 나의 부끄러움을 두고, ‘구원을 너 같이 많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하는 오늘 모세의 물음이 내게 향한다.

 

그때마다도 주는, ‘그는 너를 돕는 방패이시었다.’ 어떤 불법적인 일에서 곧 벌을 받아 마땅하였을 때에 나를 이끌어내시고 2년 후에 나와 어울리던 이들은 교도소에 갔다. 이처럼 더는 자기 자신을 망치는 자리에 두실 수 없어 스스로 그 곳에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이끄셨다. 마치 롯을 이끌던 천사 둘처럼. 이를 구체적으로 진술할 수 없는 것은 나의 부끄러움을 주는 알지 못하시는 이처럼 용서하시고 다 잊으셨기 때문이다. 아,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나를 지키시고 나를 대신하여 그때마다 나의 대적에게 오히려 복종하게 하셨으니… 사탄은 나를 질투하고 주 앞에서 이러한 나를 정죄하지만,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은 오히려 사탄을 나무라시고 나에게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 입히셨다.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슥 3:3-4).” 그때에 정죄하던 사탄을 향하여는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2).” 그러니까 주 앞에서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같은 나의 더러움을 두고 정죄하는데 하나님은 오히려 저를 책망하시었다. 곧 주는 나의 대언자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노년에 이른 요한이 나에게 이것을 씀을 더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다. 혹여 또 죄를 범한다 해도 아버지 앞에서 나의 대언자가 되시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알게 한다. 그는 나의 송사를 변호하시는 이시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4:4, 8).

 

그리하여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가? 누가 날 위해 이처럼 끝까지 내 편이 되어주시겠나? 저는 나의 중보자시다.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사 38:14).

 

할 때에 결코 외면하신 적이 없다. 나를 더는 모른다, 고개를 저으신 적이 없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을 때도 먼저 달려와 나를 안으시고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시고 모든 걸 다 용서하신 이시다. 어찌 표현하기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나는 저 친구를 생각할 때면 나의 지난날을 떠올리게 되고, 이제는 서로가 주를 바라며 주의 자녀로 살아가게 된 것이 기적 같을 때가 있다. 주일예배를 시작하기 직전이어서 저의 확진 소식에 긴 말을 표현할 수는 없었으나 ‘이참에 말씀 보면서 신앙을 점검하고 주를 바라는 유익한 시간이 되길.’ 하고 답을 하였다. 그러자 돌아온 말은 ‘주일예배 잘 드려’. 하는 것이었다.

 

누가 들으면 웃을 일이지만,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난 한 게 없다. 하지만 저는 늘 내게 돌이켜 주께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난데없이 소경이 될 위기를 맞지 않나, 두 고관절이 괴사하여 앉은뱅이가 될 형국이 되질 않나… 늘 사느라 열심을 다해 사는 저의 성실함 앞에서 나는 항상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하였다. 아, 우리를 도울자! “그들이 내 길을 헐고 내 재앙을 재촉하는데도 도울 자가 없구나(욥 30:13).” 그런 거 보면 욥은 항상 모든 고난을 대신하여 지었고, 그 괴로움을 호소할 때면 우리로 주께로 달려가게 한다. “순식간에 공포가 나를 에워싸고 그들이 내 품위를 바람 같이 날려 버리니 나의 구원은 구름 같이 지나가 버렸구나(15).” 이 인생의 덧없음을 알게 하였고, “이제는 내 생명이 내 속에서 녹으니 환난 날이 나를 사로잡음이라(16).” 우리의 생명은 한낱 입김보다 가벼움을 알게 하였다.

 

모두가 나로 하여금 주께 피하게 한다. 이 세상을 보복하실 자가 가장 두려운 법이다.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렘 11:20).” 공의로우신 주 앞에 설 수 있는 자로 나를 부르심이니,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20:12).” 그때마다 나는 주께 나를 아뢰었다. 주 앞에 내세울 것 없는 자로 서게 하셨다. 그제야 알 게 된 사실은 주가 나를 한 번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멀리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저로 알게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본 것을 저에게 들려주고, 내가 들은 것을 저에게 보여줄 수만 있다면…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잠 20:15).” 많이 아프더라는 저의 말이 또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때마다 나는 무난하였고 순탄하여서다. 감당할 수 있는 것 외에는 나로 당하지 않게 하시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오늘 나에게 더하시는 은혜가 놀랍기만 하다.

 

딸애도 엊그제 확진을 받았다. 그런데 식욕도 좋고 아프지도 않아 모두가 잘못된 건가, 할 정도로 의아하다. 어제는 동거인들도 확진여부를 검사하라 해서 하였는데 모두가 음성이었다. 늘 딸애와 곁에서 붙어살다시피 하는 아내도 스스로가 이상할 정도이다. 이럴 때 오늘 시편을 감사함으로 받아 찬송한다.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시 58:11).

 

내가 어찌 의인인가? 저가 나를 무조건 의롭다 하심으로다. 나는 당최 의인, 경건한 자, 복 있는 자로 나를 생각할 때면 역겨울 정도로 부끄럽고 송구하기만 하다. 내가 어찌 의인이랄 수 있겠나? 천만 번을 다시 산다 해도 갚을 길 없는 은혜가 아니고는…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의 더러운 옷을 벗기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갈아입히신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심지어는 나에게 가당치도 않는 정결한 관을 씌우신다.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슥 3:4, 5).”

 

이게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 나는 어떡해야 이와 같은 사실을 나의 친구에게 또는 내 곁의 어려움 속에서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게 알게 할 수 있을까?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하고 복된 이 놀라운 주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신 33:1).” 오늘의 본문이 그래서 더 울림이 큰 것일까?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의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3).” 나는 다만 말씀을 받는다. 모세의 마지막 전언이 모두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 같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29).

 

다윗의 찬양도 내 것이다.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시 58: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