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신 34:9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시 59:17
젊은이들은 결혼보다 비혼주의로 동거를 선호한다. 노인이 되어서는 졸혼이 허물이 될 게 없고, 일찍이 이혼은 그럴 수 있는 일로 흔해졌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애물단지가 되고 누구는 혼자서 정자를 받아 아이를 낳기도 한다. 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실 리 없다. 사랑한다는 것,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막중한 의무다. 누구와의 통화에서 나는 그리 말하였다. 사랑은 사명이다. 주의 마음으로 주의 사랑이 아니면 감당이 안 된다. 결국 사랑은 주의 권능으로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이는 첫째 되는 계명이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39:40).” 결혼은 서로의 이웃이, 남남이, 부부로 사이를 맺고 평생을 산다는 일이다. 숱한 우여곡절이 있기 마련이다. 졸혼이니, 동거니 하는 것도 이해는 된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졸혼은 자신을 사랑함으로 더는 못 참고 자기가 좋을 대로 살아보겠다는 소리다. 동거는 좋은 것만 바라는데 나 자신처럼은 사랑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 날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악한가.
뜬금없이 이런 소릴 먼저 하는 까닭은 어제 오후 두 사람과의 통화가 공교롭게도 그런 내용이었다. 저들의 공통된 화두가 부부 사이였고,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그 사역을 함께 이뤄가야 할 가정인데, 이혼까지 운운하며 못 살겠다고 하는 것을 들을 때면 마음이 안 좋다. 물론 그 사연은 이해가 된다. 듣다보면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한 사람을 주의 종으로 바로 세우는 일이라, 서로에게 맡기신 사명이다. 여느 가정과 좀 다른 이유다. 주께만 의지하고 싸워보자! 하고 저에게 말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상하지? 우린 저마다 그들 부모의 길을 따라간다. 그와 같은 파국으로 갈라섰고, 이에 따른 트라우마가 저에게도 있었다. 좀 떨어져 시간을 갖자는 말에 남편은 생각보다 겁을 먹었다. 실은 저의 부모 이야기가 재현되는 셈이다. 그래서 고분고분해졌고 자신의 잘못을 고치려 한다고 했다.
문제는 그 과정인데 그게 어디 쉬운가? 그러니 억울함을 아이에게 전가한다. 부모 때문이었다. 모두가 남 탓이다. 자신을 돌아볼 여력이 안 된다. 결국 어제는 정신과로 데려가 진단을 받았다. 심각한 우울증과 홧병이 그 속에 가득하다고 했다. 저는 목사다. 환장할 노릇인 것이다. 세 종류의 항우울제를 처방받았고 이틀 뒤에 다시 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성적인 문제로 비뇨기과로 가자고 하는 말에 드디어 폭발을 했다. 별의 별 욕을 다하다 뛰쳐내려 따로 갔다. 저의 처는 안쓰러워 괜한 짓을 했나? 하고 전화를 했다. 아니다. 이제 시작이다. 영적전쟁이 시작되었다. 하고 나는 저에게 말하였다. 실은 나 역시 두려운 일이지만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주의 종으로 부르신 게 맞다면, 지금 싸우는 것도 맞다. 오히려 늦었다. 어차피 이혼까지 생각하며 못 살겠다고 했었으니, 죽기 살기로 싸우는 수밖에.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게 아니다.
우린 누구나 말 못할 사정을 안고 산다. 이를 주 앞에 내려놓지 않으면 별 수 없다. 이고 지고 자신이 감당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자기 고집대로 사는 것이다. 별 수 있겠나? 사는 게 지옥 같은 이유는 천국문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거스러미처럼 거슬리고, 조금만 휘저으면 삽시간에 쌍욕이 올라오는 홧병이니! 그 영혼은 또 얼마나 혼탁할까? 평소 아무도 건드리지 않을 때야 만사 태평이라. 100키로가 넘는 체구에 당뇨와 비만 오만가지 병을 다 안고 있으면서도 게임하는 목사라! 정신 나간 소리다. 나는 사모를 다그쳐 싸움을 부추겼다. 하나라도 정신 차리든가 아니면 진짜 갈라져서 각자 자기의 사명을 다 하든가 말든가. 누군들 평온할 때야 너그럽지 않겠나? 끈질기게 싸울 것을 당부하였다. 주가 함께 하신다. 다윗을 골리앗 앞으로 몰아세운 건 하나님이시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상대해야 한다. 욱, 하고 별의 별 욕을 다 들으면서도… 부부로 산다는 일이 실은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두 사람의 일과 두 가정의 만남과 두 세계의 혼합이 결혼이다. 각각의 세계는 충돌하게 돼 있고 충돌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몰아내야 한다. 그 부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야 한다. 특히 안 믿는 부모들이라면 더더욱이나 주의 길 가는데 가장 큰 적이다. 가정마다 우여곡절이 있고, 서로 엉겨, 때론 날벼락이 치고 때 아닌 폭우가 쏟아지기도 하는 것이지만 그러면서 서로 한 몸이 되어 주의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고 실현해가는 것이다.
오늘은 하물며 수십만 명을 이끌고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던 광야 40년의 세월을 마치고, 모세가 죽었다. 본문에서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죽음은 초라하다. 저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고, 이방 땅 모압에서 죽었고, 저의 무덤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신 34:6).” 참으로 비참한 결국인 것 같으나 저는 개의치 않았다. 저의 일생에 한 가지 소원,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1:31).” 저에게는 하나님과의 동행이 있었다. 저는 그의 품에 안긴 듯 평안히 왔다. 이곳까지 인도하신 이의 긍휼하심을 마지막까지 설교하며,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31:6).” 하고 자신한다.
이는 자신이 알고 경험하고 직접 함께 하였던 하나님에 대해 확신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의 종이다. 하늘이 두 쪽이 난다 해도 물러설 수 없는 확신,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34:9).” 그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말씀에 순종하였다.
나는 앞서 누구의 일과 그 가정사를 진술하려는 게 아니다. 모세가 어디서 죽었든, 그 묘지가 어디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처럼, 나는 저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말하고 싶었다. 그의 역사하심이 증명될 저들의 인생과 그 부부 사이와 앞으로 기대되는 목회에 대해서까지. 어제는 그 와중에 충돌이 있었고, 악을 토해내다 일단락되어 주춤하게 하지만 멈추면 안 된다. 우리가 시작한 일은 남들처럼 잘 살아보겠다고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한 분, 모세의 하나님이고 아브라함과 바울의 하나님이셨던 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안타까운 마음에 나 역시 안쓰러웠다. 그래, 차라리 그냥 갈라서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주춤거리되 끝까지 가야하는 길이다. 아직 우리 길은 끝나지 않았다. 이는 엄연히 주가 시작하신 일이다. 주가 마저 감당하게 하실 것이다. 주의 권능으로, 주의 마음을 가지고, 주의 사랑으로 나아갈 때 반드시 주가 책임지신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말씀. 나는 이 말씀을 붙들고 간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건 내 책임이 아니다. 나는 주의 것이다. 그렇다면 주가 책임지실 것이다. 오늘 시편은 이를 알게 한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시 59:17).
오늘에 처한 그 모든 일은 한 사람을 돌이키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다. 주의 앞에 세우는 일이다. 그리하여 주의 일을 감당하는 자로 만드는 일이다. 거기에 우리가 쓰임을 받고 있다. 아내로서 사모로서 여자로서 저밖에 상대할 사람이 없다. 강하고 담대해야 한다. 나는 그와 같은 성경을 보내주었다. 엄청난 저항을 받게 돼 있다. 영적인 전쟁이다. 사니 못 사니 하는 정도의 부부 문제 정도가 아니다. 주가 맡기신 영혼들을 살리고 죽이는 일이다. 두려움이 없이 이 일을 감당한다면 그게 더 미친 짓이다. 지금 그대로이면 소망이 없다. 본인도 안다. 아내도 안다. 하나님이 거하실 마음이 없다. 서로가 반목하고 으르렁거리며 ‘애 때문에’ 산다는 식이면, 더는 가망이 없는 집구석이다. 그땐 정말 이혼을 하든 나가 죽든, 내가 상관할 바 없다. 문제는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는 사람으로 주의 일을 어찌 감당하겠나?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지는 곳은 거룩한 곳이다.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시 87:1).
우리 몸이 주가 거하시는 전이면 서로가 가정을 이뤄 사는 곳은 어떻겠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7).” 우리가 거룩한 것은 주를 모시고 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유야무야 세월만 축낼 수 없다. 주의 일을 나몰라라 할 거면 평범한 인생으로라도 살아야지! 평범하다는 것, 안 믿는 사람들도 최소한의 존중과 예의는 갖추며 부부 사이로 사는데, 이 무슨 개꼴난 가정인지. 나는 저들 이야기에 왕왕 흥분했던 이유는 그래서다. 별 수 없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예수님도 말씀하시길,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주의 부르심을 받은 종이다. 그 확신이 없다면 그만 둬야지!? 그 쓰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야 주께서 고쳐 쓰실 일이고, 확신도 없고 삶도 없고, 믿음도 없고 행함도 없으면서 어찌 주의 일을 한다고??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우리가 알 것은 우리가 택한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선택한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고 부르셨다. 이런 확신이 없다면 ‘착한 사람, 성실한 사람’으로라도 살아라! 최소한 안 믿는 사람들도 착하게 살고 아내를 존중하며 헛짓거리 안 하며 산다! 나중에 흙으로 돌아갈 몸도 그리 공들여 사는데, 하물며 영생을 안다면, 우린 엄연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입었다. 그런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시 87:2).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되어야 한다. 시온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이유다. 존재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이를 알지 못하고 믿음이 없으면,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그러니 우리의 존귀함은 존귀하신 이를 찬송할 수 있는 것이다. 곧 우리가 주의 일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될 것을 믿고 나아가는 삶이다. 노아가 그러했고 아브라함이 그러했으며 모세의 일생이 그러했다.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 (셀라)
(시 87:3).
성경은 우리로 오라 하신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 2:2-3).” 말씀이 살았고 이에 그 삶이 말씀대로 실현되는 것,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행 13:33).” 그것이 오늘 우리를 여기에 두신 목적이다. 허투루 사랑을 하고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결혼을 하게 하신 게 아니다. 살다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 그만둬도 되는 그런 게 아니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1-22).”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실체다.
믿지 못하고 어찌 바랄 수 있겠으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어찌 믿겠나?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때론 우리 안에는 일어나는 믿음을 우리도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하는 이해와 확신이 있다. 합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스스로도 이상하고 미친 짓 같다. 그러느니 가정을 깨고 새 출발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차라리 다음 세상을 운운하며 일찍 인생을 하직하는 것도 합리적이다. 그러니 자살률은 높아만 가고 허무주의자들이 판을 친다. 저가 그러겠다는 것을 결국 돌이켜 세운 것은 부르심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다. 부르심이란 간단하게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데 우리가 ‘구원의 모태’로 쓰임 받는 것이다. 누군가의 징검다리가 되어주는 것,
나는 라합과 바벨론이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것들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
(시 87:4-5).
이방계집 같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 같으나 지존자가 친히 거기에 거하시면 이는 시온이 세워진다. 바울은 그래서 우리더러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나는 백번을 읽어도 다 공감한다. 즉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이를 위해 오늘 나를 여기에 두셨다.
다시 말해 우리를 부르심으로 우리로 주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게 하심이다. 주의 자녀 될 자들로 돌이키게 하려 하심이다. 그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일로 그치는 인생이 가장 나중에 후회가 많을 것이다. 굳이 뭘 더 바라겠나?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아름다운 덕을 위해 우리로 목사로 교사로 성도로 부르셨다. 믿는 자의 일상이 그런 것이다. 결국 구원은 만민에게 이르나 만인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주의 자녀란 그리 될 자들로 그리 된다.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셀라)
(시 87:6).
이와 같은 말씀을 묵상하다보면 오늘을 하루 더, 왜 나에게 허락하시는지가 분명해진다. 어쩌다 사는 하루가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어쩌다 어른, 어쩌다 부부가 된 사이는 없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 13:46).” 말씀을 거부하면 그 말씀은 우회한다.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의 길로 우회하여야 했던 것처럼 불순종이 부르는 결과는 끔찍하다.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롬 1:6).” 그러니 나는 뭐 별 다른 사람이었던가? 그런 쓸모없는 나를 부르심이었으니, 예수의 몸 된 교회 안에 참된 기쁨과 생명이 전하여지는데 쓰임 받는 일이라니!
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시 87:7).
그렇게 내 곁에 붙이시고 나로 저 때문에 맘 졸이게 하시는 것도 그 이유다. 이는 때로 해산하는 고통과 같아서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갈 4:19-20).” 자식을 낳고 기르고 훈계하고 마음 졸이며 살듯,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 그것이 고통스럽고 힘든 만큼 주의 뜻을 다하는 게 아니겠나?
예수님은 일러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우리 배에 어찌 똥만 찼겠나? 자기 욕심과 아집으로 가득하던 것을 비우고, 그곳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하심이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7-39).” 곧 우리는 성령으로 이 일을 감당한다.
모세는 저의 사명을 다하고 죽었다. 세상에서는 비록 초라한 죽음이고 저의 무덤조차 알 수 없다 해도, 어느 훗날 우리는 그의 영광된 모습에 찬사를 보낼 것이다. 나란히 서서 주의 영광을 찬송할 것이다. 이에 오늘 시편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근거를 찾는다.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
(시 59:9-10).
우리는 볼 것이다. 지금은 막연하고 어려운 일 같으나,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16).
누구의 이런저런 일에 혹은 어느 가정의 사연을 두고 나는 말을 거들 때에 주의 뜻을 생각한다. 말씀으로 다가간다. 주가 원하시는 일이면 과감하게 행해야 한다. 고로 주가 함께 하실 것을 믿고서 말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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