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전봉석 2022. 3. 18. 05:0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신 30:15-16

 

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55:21-22

 

 

사람 참 모르겠다. 어제는 소망을 갖게 하더니 오늘은 절망스럽게 한다. 저의 일에 내가 너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듣다보면 덩달아서 속상하다. 또 누구네 담임목사님 가족이 모두 코로나에 걸렸는데 문제는 돌잡이 아이가 고열을 앓으며 사투를 벌이는 모양이다. 목사님은 혹여 성도들에게 근심이 될까 하여 일체 알리지도 않는다고 하니 이를 어찌 받아야 하는 것인지. 세상이 어수선하고 사람들이 덩달아 우왕좌왕하는 형국이라, 무슨 일을 두고 이를 어찌 보아야 할지 생각만 많아진다.

 

오늘 말씀은 그런 나의 중심에 쇠못을 박는 것 같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 30:15-16).” 성경은 우리에게 복을 빌며 그 길을 제시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요한의 이때 나이가 90세쯤으로 제자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던 인물로 늘 예수님 곁을 조용히 지키던 자이다. 노인 요한이 우리의 복을 빈다.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모세의 표현처럼 성경은 우리 앞에 복과 저주의 길이 놓였음을 제시한다. 그 잘난 자유의지로 선택해야 할 문제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오셨다가 성경대로 행하시고 성경대로 죽으셨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바울은 자신이 받은 것을 우리에게 전한다. 자,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이에 따를 것인지, 미룰 것인지, 마다할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나는 누구와의 대화에서 하나님만 바라고 우선하여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것을 말하였다. 자신을 보고 자신을 둘러 싼 일에 몰두하면 한도 끝도 없다. 문제는 문제의 연속일 뿐이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붙들어야 한다. 왜 주를 믿고 주의 길을 가게 되었는지를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그런데 이게 참… 그리 녹록하지가 않아서, 감정적으로만 생각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생각 같아서야 뭔들 못하겠나? 하지만 막상 닥치면 사람이 또 그런 것이니.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시 55:12).

 

그런데 그가 누구인가? 나의 원수가 정작 내 가족이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왜 나의 원수인가? 나로 하여금 주를 바라고 주만 의뢰하도록 하지 못하게 한다. 예수님은 이를 아셨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 저에 대한 연민이 사랑이 애착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저해가 된다.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13-14).

 

그럴 때도 있었는데,

 

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21).

 

그러니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고, 멀리할 수도 없고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나는 누구의 말끝에 나로 하여금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별거를 하네, 이혼을 하네, 어쩌고 할 때마다 나는 마음이 어려울 따름이다. 어제는 흐렸다 오늘은 개였다 하는 저의 마음도 문제라,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22).

 

하시는 오늘 말씀으로 가름한다. 우리가 이 길을 갈 때, 주를 사랑하고 믿을 때에 가졌던 확신은 온데간데없고 사람에게 연연하며 사느라 10년 세월이 흘러간 셈이다. 남은 세월을 어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저의 앞에 놓인 성경대로다. 지금처럼 오락가락하다가는 스스로도 어디로 흘러가는지 주체가 되지 않을 터,

 

사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임하여

산 채로 스올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그들의 거처에 있고

그들 가운데에 있음이로다

(15).

 

이 두렵고 떨린 말씀이 아주 먼 곳, 나와는 상관없는 자에게 이르는 것이 아니었다. 저는 내 동료고 친구고 한 식구라.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어 우리로 자꾸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이들이다. 아, 이런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이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이가 우리를 위해 도우신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부디 주만 바라기를.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10:22).” 달리 더 좋은 길을 나는 알지 못한다. 예전에는 사람을 찾고 사랑을 희구하고 우정을 갈구하며 살았더니, 어느새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곳에 서 있었다. 자신의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누구를 맹목적으로 신뢰하거나 졸지에 누구를 적으로 돌려 저를 향해 총구를 겨누기 일쑤였으니. 다 지난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내 안에는 여전히 고질적인 의존성과 불안함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본다. 더는 가망이 없는 것이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돌아서고 난 뒤에야 알았다. 그 모든 상황에서도 나를 참고 기다리신 이가 오늘도 나에게 긍휼하심으로 함께 하시는 것을 본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 7).”

 

점점 때가 악하다. 목사고 뭐고 우리의 직함이 우리를 붙드는 게 아니다.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듯이 별의 별 목사들도 다 있다. 행여 나는 목사가 되었다고 안도하였던가? 이처럼 하루라도 말씀 앞에 나를 세우지 않으면, 나는 여전하다. 내 안의 악함은 건재하였고 세상을 바라는 마음 또한 그대로였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 천하의 바울도 별 수 없는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하루도 쉴 날이 없다. 내 안의 다툼이 격렬하다는 것은 나의 영혼이 주 앞에서 온전하기 때문이라 짐작한다. 일찍 도로 옛 생활로 돌아간 이를 몇몇 알고 있다. 심지어는 시작할 때 가졌던 마음을 모두 잃고 더 악한 길로 빠져든 이도 알고 있다. 오히려 저가 아는 것이 저를 해한다. 저의 믿음이 저를 망친다. 내가 보기에는 그런데 저는 나아졌다면서 자기 좋을대로 산다.

 

일찍이 믿음의 사람들이 어째서 그토록 당부하고 또 당부하였는지를 알겠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우리 안에 늘 두 마음이 있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작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고 성경대로 살아나셨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우리도 그럼 최선을 다해 성경대로 살다 성경대로 죽기를 바라야 한다. 성경대로 어느 날 내가 죽었을 때, 성경대로 어느 날 내가 살아나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이를 위하여 자기 몸을 찢으셨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막 15:38).” 저의 죽으심으로,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눅 23:45).” 자,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 10:22).

 

믿음의 선친들이 우리 손을 잡는다. 예수님도 이르시기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우리가 주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그 길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이 놀라운 말씀 앞에 서야 한다. 더는 주저할 것이 없다. 누구는 죽고 누구는 병들어 더는 운신이 어렵다. 누구도 자신에게 곧 그와 같은 날이 도래할 것임을 인정하지 않고 산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묘비명으로 덩그러니 남은 희극인을 알고 있다. 저의 삶은 유쾌하였고 저로 인해 많은 사람이 생각하기를 미루고 히죽거리며 웃었다. 나는 대중예술에 대해 언제부턴가 두려움이 앞서는 이유다. 누구의 노래가, 누구의 글이, 누구의 연기가 사람들로 위안이 되고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어디쯤에서 후회가 또한 슬픔이 우리를 사로잡을지 모른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인데,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 아뿔싸, 일이 잘못된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 나는 늘 이 말씀을 되뇔 때면 식은땀이 난다. 나름은 믿는다고 믿었는데… 오히려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며 살았는데…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 하시면 그때는 어찌 되는 것일까?

 

자식 보고 산다느니, 돈 모으는 재미로 산다느니 하는 소릴 해대는 정신 나간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철렁한다. 돈만 있으면 살기 좋은 세상이야! 하면서 돈을 사랑하고 그 재미로 사는 사람을 더는 부러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누릴 화평은 돈으로가 아니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세상에서 제일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아직 돌이키지 못하고 정신 못 차리고 살 때,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이보다 더 귀한 보물이 또 어디 있겠나?

 

그렇게들 좋아하는 복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오늘 말씀은 우리로 주목하게 한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신 30:15).

 

모세는 모압에 서서 자신은 들어갈 수 없는 가나안을 두고 그의 후손들에게 이른다.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16).” 이를 아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나님께로 나아갔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7-8).

 

일찍이 모세는 알고 있었다. 저들이 곧 들어가 살 땅에서 어찌 죄악 가운데 빠질 것인지, 그러다 포로 되어 잡혀가는 신세로 전락할 것인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신 30:3).” 부디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자. 한 길 가는 순례자로 살자.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14).” 어쩌면 우리의 병은 모르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이 아는 게 병이다. 저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세상이라. 애들도 뭐라 하면 금세 등을 보이고 돌아선다. 그저 다들 좋다, 옳다, 잘한다, 잘한다 하기만을 바라니 ‘거짓 선지자’들이 난무할밖에.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 2:18).”

 

그 믿음이 아이 적에나 혼동하고 갈팡질팡 하는 것이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자라지 못하는 믿음보다 불쌍한 게 또 있을까? 차라리 몰랐다면 모를까, 이건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고… 비로소 고통이 임하여서야,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시 55:4-6).

 

그저 자꾸 회피만이 능사가 되었다. 아,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7-8).

 

그러려니 세상에 그럴만한 곳이 어디 있겠나? 나를 괴롭게 하고 나를 어렵게 하여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이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13-14).

 

더는 미적거릴 여유가 없다. 결단을 해야 한다. 생과 사와 화와 복이 우리 앞에 놓였다. 갈림길에 서서…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16-17).

 

그러므로,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