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전봉석 2022. 3. 24. 05:15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수 2:21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시 61:2

 

 

요즘은 서로의 신의나 신뢰가 헌신짝처럼 버려지기 일쑤여서 오히려 누굴 믿고 맡긴다는 게 불안을 유발한다. 신뢰는 ‘평안함’을 어원으로 갖는다. 누가 우리나라를 평가할 때 한국은 ‘저신뢰 사회’라고 했다. 우리는 그만큼 강한 것 같으나 약하다. 그렇게 저마다 믿음 없이도 살 수 있을 것처럼 굴면서도 해돋이를 보거나 생일 촛불을 켜고도 소원을 빈다. 자신의 이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빤히 알면서 스스로를 의뢰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하나님에 대한 강한 신뢰가 없이는 어렵다. 오늘 본문을 읽다 기생 라합의 믿음이 무엇에 기인한지를 주목하게 된다. 저는 두려워할 줄 알았다.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 2:11).” 우리가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두려워할 줄 알 때의 공경과 우러름이다. 여기서 두려움은 경탄의 의미다.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사 41:9).” 나는 이 말씀을 붙들었다. 두려울 정도로 이것은 엄위하신 말씀이다. 곧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은 이처럼 무겁다. 사사로이 여겨 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10).” 이는 모두에게 하시는 약속이 아니다.

 

주께서 나를 부르시고 돌이키시기까지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보면 나는 오금이 저릴 정도이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숱한 죄악 중에서도 하나님은 나의 편이셨다. 아주 어릴 적, 철없고 사리분별도 잘 못하던 때에도 하나님은 그때마다 날 위해 주의 사람들을 곁에 두셨다. 저들에 대한 기억이 이제야 주를 향하게 하였음을 확신하게 된다. 또는 나를 어렵게 하고 괴롭히던 사람들로부터 나를 보호하시고 지키셨다.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11).” 그때는 참 어렵고 힘들던 기억이 오늘에 이르러서는 여러 모양의 사람을 이해하는데 유용하다. 더는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은 없다.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허무한 것 같이 되리니,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12-13).”

 

이와 같은 고백이 얼마나 의미 있게 전달될지는 알 수 없지만 말씀과 같이 나를 특별히 붙드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14).” 언제부턴가 나는 주 앞에 설 때마다 버러지만도 못한 것을 인정한다. 그런 나를 하나님이 도우시고 함께 하신다. 곧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살아온 날들의 무게만큼이나 확실하다. 그럼에도 때때로 의기소침하고 낙심하는 이유는 무얼까?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 성경의 이르심만 붙들자. 누구에게 그리 일렀다. 우리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여 마음을 요동하게 할 것이 아니라 모두 주께 맡김으로 거침이 없기를.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신 7:9).” 일찍이 모세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하나님의 신실함을 확신하였다.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왕들이 보고 일어서며 고관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신실하신 여호와 그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사 49:7).”

 

어쩌다 저를 만나 결혼까지 한 게 아니다. 어쩌다 저런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그리 형성된 병적인 기질 때문이 아니다. 어쩌다 맞이하는 오늘은 없다. 하나님의 섭리란 이 모두를 주관하신다. 이를 믿고 신뢰할 때,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이를 좀 더 쉬운 성경으로 읽어보면, “그분이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그분을 신뢰할 것이네. 그러나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밝힐 것이네.” 하는 소리다. 곧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잘 알고 고하겠다는 것이다. 한 사람을 돌이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일찍이 나는 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잘 알고 있다. 저를 움직여서 새롭게 변화시킨다는 것은 그가 살아온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과도 같다. 하물며 한 영혼을 주 앞에 세우는 일이란, 더욱이 저가 맡은 주의 사명을 일깨우고 주의 길을 바로 가게 하기란 우리 힘으로는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하여 이 일은 전적으로 믿음으로밖에는 불가능하다. 돼도 않을 일을 두고 신실하신 하나님만을 의뢰하지 않고는 감당이 안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신실할 것을 바란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엡 1:1).” ‘행필정직 언행신실’이란 말이 있다. 행동은 바르고 곧게, 말은 미덥고 성실하게 하라는 뜻으로 믿는 자의 기본 덕목이겠다.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골 1:2).” 곧 우리가 신실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이란 게 얼마나 한심하고 때론 감성적인지 모른다. 템블턴이란 유명한 목사가 있었다. 저는 성경학자로 명설교자였다. 그런데 어느 날 사진 한 장으로 무너져 목회를 등지고 하나님을 떠났다. 사진은 어느 가난한 제3국의 한 어머니가 죽어가는 아이를 품에 안고 하늘을 향해 간절한 눈빛으로 절규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유명한 믿음의 사람이 이 사진 한 장을 두고 몸서리치며 회의에 빠진 것이다. 자신이 전하였던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상황을 두고만 보고 계실 수 있을까 하고, 이내 저는 그 확신을 얻지 못하고 믿음마저 저버렸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충동적인 게 아니다. 궁여지책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도 아니다. 욥의 결의와 같이 하나님이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주를 신뢰하겠다는 것, 이는 미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모두가 그러했다. 오늘 우리만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성경의 모든 믿음의 선친들이 그러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하고 성경은 우리를 이끄신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도 그러하셨다(히 12:1-2).

 

가끔은 이 길이 맞나? 싶을 때, 이래도 되나? 싶을 때 나는 히브리서 11장과 12장을 읽으며 새 힘을 얻는다. 허다한 믿음의 사람들이 앞서 이 길을 걸어갔다. 아무런 보장도 없었고 뚜렷한 증거도 없었다. 그럼에도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11:36-37).”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은데, 그래서도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38).” 기꺼이 외로움을 감수하고 고단한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9-40).

 

믿음으로 증거를 삼았지만 삶은 달랐다. 예상했던 것에서 엇나가기도 하고 되레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저들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실제로 믿음이란 이런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1).”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일어날 가망성도 희박한, 그러나 말씀의 증거는 그것을 향함으로 묵묵히 그리 믿고 바라는 마음으로 가능한 것. 이는 하나님이 어떠하신가를 믿고 아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두 정탐꾼을 목숨 걸고 숨겨주는 라합의 믿음은 바로 이것이었다. 하여 저는 그들이 돌아가고 난 뒤 바로 약속의 증표를 창문에 맸다.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수 2:21).” 그게 언제 일어날지, 그날이 언제일지 알지 못하면서도 일찌감치 대비하였던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 연약함을 안다. 어찌 감히 템블턴이니 빌리그레함 목사니 하는 이들과 비교나 될까. 하여 나는 비루하나 그와 같은 비루함마저도 주가 쓰시기에 합당하다면 기꺼운 것이다. 성경은 때로 이를 연습하라고 이른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전 5:4).”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은 죽으나 사나,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주만 바라고 간다. 그럴 때 나를 쥐고 흔드는 의구심과 불안과 초조함을 두고는,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시 61:2).

 

오늘 시편의 이 한 구절이 나를 바로 세운다. ‘내 마음이 약해질 때에’ 그게 어느 정도냐 하면 ‘땅 끝에’ 내몰리는 것 같은 두려움이기도 하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그래서 영영 그대로 끝장일 것 같은 외로움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인은 거기서부터 끌어올려 주께 부르짖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은 미쁘사 나로 반드시 반석 위에 세우실 것이란다. 이와 같은 하나님을 생각하자. 그렇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이것이 성경이 우리를 이끄시는 방향이었다.

 

혼돈 가운데 질서를 세우는 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내가 알려 주었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43:11-12).” 늘 미래와 과거만 있는 현재에서 나는 무엇을 붙들고 살 것인가?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18).” 지난 일을 붙들고 씨름할 거 없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그 이상으로 역사하실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19-20).” 이러한 불가능한 일에 우리가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 놀라운 기적을 목격하고 누리고 증거하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다. 

 

고로 우리의 문제는 자꾸 현재의 일에 얽매이는 것이다. 누구를 격려하고 용기를 더할 때 나는 이와 같은 말씀으로 굳건하기를 기도하였다. 우리는 결코 우리 힘으로 한 사람을 돌이킬 수 없다. 하물며 한 영혼을 주 앞에 바로 세우는 일이라니, 그것도 주의 종으로 온전히 그 길을 완주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성령이 하실 일이다. 다만 우리는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 14:18).” 주만 보고 하자. 아닌 건 아닌 것이고, 아니면 죽어도 아닌 것이다. 아닌 것을 두고 씨름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분명히 주는 말씀하셨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하면 주가 하실 것이다. 우린 다만 그의 도구라. 주의 종으로 쓰시는 데 합당하면 된다. 바울과 실라는 이를 알고 환경을 초월하였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지금 그 와중에 찬송이 웬 말인가? 사자굴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게 믿음으로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우린 하나님만 보고 한다. 사나 죽으나…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결코 내가 저보다 나아서, 믿음이 더 강하고 담대해서도 아니다. 오직 주를 바람으로 말씀을 의지하는 것뿐이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 43:25).” 현재란 늘 스쳐갈 뿐이지 머물지 않고 과거가 된다. 그리고 숨 돌릴 때마다 미래다. 그런데도 우리의 가장 심각한 오해는 현재를 산다고 여기는 것이다. 조금 뒤, 오늘 오후 혹은 내일이 나에게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이에 오늘 다윗은 주께 아뢴다.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시 61:1-2).

 

우린 누굴 의지하고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므로 우린 언제나 주 앞에서 안전하다.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