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를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수 4:23-24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 63:3
주를 경외하는 것보다 지혜로운 것은 없다. 이를 의식하고 사는 일은 어색하다. 경외함이란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일로 호흡하는 것과 같다. 의식하고 숨을 쉬지 않는 것은, 자신이 잠드는 것을 초조하게 살피면서 잠들 수 없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삶으로 아는 것,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10).” 곧 우리가 주를 경외한다는 일은 자신이 얼마나 허물이 많고 죄악 중에 있는가를 실감하며 사는 것이다. 스스로 철들어가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철들지 않는다. 요한의 설교는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6).” 오늘의 행함을 보면 안다는 것이다.
말로 이루는 성은 모래성만도 못하게 형체조차 없다. 꿈도 못 꿔? 하는 반감이 들 수 있지만 꿈꿀 권리를 내세우는 자는 행동을 미루고 있다는 증거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7).” 마치 무의식적으로도 숨을 쉬고 자신을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행동거지를 바로 하는 것과 같이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8).” 말과 행동과 생각하기와 실천하기는 그와 같이 엄청난 거리를 둔다. 그래서 요한은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9-10).
나는 종종 말씀을 각 어절로 끊어서 운율에 놓고 읽기를 즐겨한다. 성경의 언어는 함축적이다. 수천 년 전의 일이 고스란히 오늘의 내 이야기로 전제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 곧 하나님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으시다. 이를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그렇게 결국 요단을 건넜다. 이를 기념하게 하신다. 기억해야 한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를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나의 삶에서도 이와 같은 일은 거듭되었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수 4:23-24).” 오늘 말씀을 축약하면,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 63:3).
하는 오늘 시의 한 구절로 함축되겠다. 이를 우리 요한은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죽으시면서도 끝까지 사랑하심을 강조하는데, 끝이 없으신 존재이니 나를 향하신 사랑이 영원하다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겠다. 그러니 시인의 고백처럼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생명보다 낫다. 곧 나의 생명보다 주의 인자하심이 더 귀하다. 이를 욥의 고백으로 전환하면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주를 신뢰한다는 말이 된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참 귀한 그 사랑이 바울에게는 어떻게 이해되었을까?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이름, 그의 의로 살았다. 의롭다 하심도 모두 주의 것이다. 나의 공로는 없다. 하여 신앙이란 다음에 더 잘해야지, 하는 게 아니다. ‘저는 못합니다. 주님이 도와주세요.’ 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1).” 우리로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는 것. 이 사랑, 그의 인자하심 앞에 우리는 붙들림 바 되었다.
창밖으로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다. 창을 열었는데도 바람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른 새벽, 나는 무작위로 떠오르는 누구를 위해 기도한다. 아이가 양성 판정을 받고 고열이 나고 고통을 호소한다고 하였다. 이제 저들 부부가 좀 더 주의 이름에 가까이 다가갈 때이다. 누구는 어떤 일로 생각이 많다. 실패는 때로 여러 생각을 동시다발적으로 떠넘기는 일이다. 누구는 원하였던 일들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애타게 기도부탁을 하다 더는 아무런 소식이 없다. 누구는 제2의 인생을 운운하며 여러 갈래의 길을 도모하는데 생각 같지 않은 모양이다. 누구는 또 그의 친정모친이 넘어져 이번에는 팔이 골절되었다. 코로나 정국에서 연세가 많으신 터라 이래저래 걱정이 많다. 이들은 마치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 같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그러하다.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사 40:17).” 하고 되묻는다.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18).”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하고 물으시는 주님의 속내는 저들의 생각이 아니라 바로 나의 생각이었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이때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 하는 대답이 내 것인가? 과연 온전히 그러한가? 그럴 수 있다면 “네가 복이 있도다.”하신다. 왜냐하면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아이가 열이 오르며 고통을 호소하고, 생각했던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고, 뜻하지 않은 일로 여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래저래 인생은 뜻하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기만 하는 것 같을 때,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 63:3).
그 입술이 복이 많다. 이를 찬양하게 하심이 하나님의 은혜다. 결국은 주께 맡긴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신뢰하는 것으로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주께 아뢰겠다’는 성도의 고백이 복되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무궁하다고 성경은 알리시는 것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마른 요단에서 각 지파대로 돌을 주웠다. 숭배의 의미가 아니라 기억의 의미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어느 정도냐 하면 그리스도의 순종을 나의 순종으로 여겨주시는 사랑이다. 저의 죽으심으로 나의 죄를 없었던 일로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있는 그대로, 이 놀라우신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말하길 한 팔이 어려우면 한쪽 팔로 하면 된다. 한쪽 다리가 힘을 못 쓰면 다른 쪽 다리로 하면 된다. 그마저도 어려우면 몸뚱이로 하고, 이도 여의치 않으면 눈빛으로 한다.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처지에서 할 수 있는 것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넓고, 깊고, 높고, 길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우리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다. 곧 우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다. 이에,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시 63:6-7).
비가 내리기 전까지는 온몸이 쑤기고 아프더니 비가 퍼붓기 시작하면서 한결 수월해진 새벽이다. 이것으로도 감사, 한 주간 딸아이의 양성으로 내가 돌보고 매 끼니를 챙겨야 해서 유난히 빠듯하고 어려운 한 주였다. 그리고 다시 어제 저녁에 나란히 앉아 자가 검사를 해본 결과 딸아이는 물론 아내도 여전히 음성이었다. 서로가 요란하게 재채기를 하고 우린 한바탕 웃었다. 주 앞에서의 감사란 그의 도우심을 이처럼 실감하고 누리며 사는 삶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말하길,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체험하고 사는 게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였다. 이런저런 여건으로 놓고 보면 가족 중 누구 한 사람이 양성을 받아도 모두가 난감한 노릇이 된다. 그럴 때 우리의 책임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주를 신뢰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막 12:27).” 이를 알고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공통되게 자신의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솔로몬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하는 저의 기도에 하나님은 감동하신다(왕상 3:7).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10).” 곧 우리의 최종적인 신앙고백은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하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은 반드시 찾아오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누구도 먼저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들고 주를 찾은 적이 없다. 모두가 은폐하고 도망치고 숨기기 바쁘나,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4:10).” 주는 다 아신다. 내가 보았음이라! 방주로 들어가라!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7:1).” 내가 네게 줄 땅을, 가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2:1).” 어디로 가느냐?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16:8).”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행 9:4).” 나를 따르라!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마 9:9).” 나를 따르라.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막 2:14).”
언제나 먼저 찾아오시고 때론 세미한 음성으로 때론 우레와 같으 천둥소리로 우리를 불러 세우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아,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어찌 우리 지식으로 이해하고 상식으로 알 수 있을까? 왜 나 같은 것을 그처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지, 난 알 수 없다. 그리하여 솔로몬이 구한 것은 묵상하는 마음이었다.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이에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10).” 묵상이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듣는 마음이다. 누구누구의 이런저런 사연을 두고 마음에 이르고, 저를 생각하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2).
저로 인하여 내가 주 앞에서 귀를 기울인다. 말씀에 주목한다. 곧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결코 이 일을 포기할 수 없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몸이 아프다 해도 일어나 앉을 수만 있으면,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상심하였다 해도, 뜻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다 해도… 어떠하든지. 마치 먹이를 물고 필사적으로 놓지 않고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또는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38:14).” 매일 했던 말 또 하고 그 내용이 그 내용인 것 같은 것을 두고, ‘네 눈이 쇠하도록’ 주여, 나는 못합니다. 주님이 도와주세요. 하는 우리 주님의 절대적인 중보를 바람이었다.
이런저런 계획을 갖고 아이들을 대하였는데 학년이 올라가면서 무심히 다른 학원 시간과 겹친다며 그만두겠다고 할 때, 누구 일로 기껏 마음 졸이며 주의 이름을 부르고 보채고 애면글면하였는데 전혀 상관없이 가겠다고 할 때, 나는 나의 난감함마저도 주 앞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성경을 뒤적거리는 것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굳이 아쉬워하거나 오래 서운해하지 않는 이유다. 다른 이유없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
나는 다만 오늘도, 말씀을 들을 뿐이다. 그러할 때 오늘 시편의 말씀처럼 나의 마음을 고스란히 성경은 담고 있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시 63:1-2).
내가 하는 최선이다. 그러할 때 나의 입에서 또는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주의 더하신 마음이 울려나온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3).
다른 더 무엇으로 할까? 다만,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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