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전봉석 2022. 3. 28. 05:02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수 6:10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시 65:10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일하신다. 전쟁의 틀을 깨고 그 형식도 규모도 하나님이 정하신대로 행하신다. 이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이와 같은 말씀이 가나안에 들어가 처음 맞닥뜨리는 여리성을 함락하는 데도 적용이 되었다. 이때 오늘 말씀에서 주목하게 되는 대목은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수 6:10).” 짐작컨대 여러 추측이 난무하고 자기 생각과 주장으로 부정적인 말이 오갈 것이다.

 

어제도 누가 아이의 확진으로 열이 떨어지자 목이 아프고 입맛이 없다며 짜증을 늘어지게 내다 다 저녁에 귀가 아프다며 어쩌면 좋은가, 하고 전화를 주었다. 중이염인가 싶어 혹시 소염제가 있는지 물었다. 그러다 양성판정과 함께 응급 전화번호가 하나 주어졌다고 하여 그리 전화를 해서 문의하는 게 더 정확하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계속 그 입에서 자책하는 말로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부정적인 말들로, 말이 감정을 자극하고 감정은 눈물을 터뜨려 이성적인 생각을 흐려지게 하는 것이었다. 울면서 엄마로서의 자격을 운운하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겠나? 이런저런 말이 끊임없이 자신을 자극하고 슬픔을 더 슬프게 비극적으로 몰아가는 법이다.

 

더욱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 앞에서 우리가 입을 열 때 그 말의 대부분이 부정적이고 자신이나 혹은 남은 비난하고 원망하는 말밖에 나오지 않을 것은 확실하다. 이에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하신 명령은 누구보다 우릴 잘 아시는 이의 앞선 대처였다. 성을 함락하는 데 있어 침묵하고 성을 한 바퀴씩 도는 게 전부라니? 그리고 칠 일째 되는 날에는 나팔을 불고 함성을 지르라는 것은… 이 무슨 조화인지 알 수가 없다. 성을 지키며 저들을 지켜보는 이들도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다. 그러니 하나님의 속을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무슨 자격과 기준으로 나를 선택하고 미리 예정하사 주의 자녀로 삼으신 것인지. 이는 우리가 살며 어떤 모습과 조건에 의한 결정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 25:23).”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다. 이미 알고 저들 나름의 방책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주의 뜻은 엄중하시다.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수 6:2).” 이미 결정 난 일에 대하여 우리는 입을 다물고 주를 신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3).” 순순히 따르기에는 어딘가 미심쩍다. 현재 닥친 일을 두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주를 신뢰하기란 광야 40년이란 엄청난 수련의 시간이 필요하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사랑의 한계는 가히 짐작할 수도 없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 32:11-12).” 오늘에 이르러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수긍하고 아멘, 할 수 있는 것이 복이다. 늘 우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심쩍어하고 갈등하다, ‘내가 그렇지 뭐.’ 하는 투의 부정적인 말로 자신을 깎아내리는 듯하나 실제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이다. 성경은 분명히 약속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이를 남의 말로 들으면 허사다.

 

성경의 어느 사건과 상황도 어떤 말씀도 나를 향하지 않으신 게 없다.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삼하 7:9).”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도 소망이 없다면 대체 우리는 무얼 믿는다는 것일까? 믿음이란 신앙의 문제고 신앙이란 일상의 문제이며, 일상이란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여리고와 같은 우리 안의 난공불락을 점령해야 한다. 그것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생각이다. 아주 오래전 어린아이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이다. 쉽사리 고쳐질 리 없고 스스로는 고칠 수도 없다. 잘못인 걸 알면서도 툭, 하면 터져 나오는 원망과 불평은 주체할 길이 없다.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창 49:26).” 저의 축복이 나의 것으로 들리려면 입을 다물고 묵묵히 준행하는 데서 시작이다. 하루 이틀 만에 끝낼 수도 있는 일을 왜 칠일씩이나 돌리신 것일까? 신앙은 수련과 같아서 단번에 믿음을 고백했다고 해서 뚝딱,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는 독촉을 하듯 계속 이사할 집과 세입자와의 갈등을 두고 기도부탁을 한다. 누군 보채듯 같은 말로 자신을 볶아댄다. 오래 전에 들었던 문제인데 여전히 이고 산다. 주께 맡기고 그 앞에 내려놓는다는 것은 연막이 아니다. 마치 그리고 까먹는 일처럼 주가 행하실 것을 알고, 나는 다만 오늘도 침묵하고 성을 도는 것이 전부다.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하는 일에 충일하는 것. 충일(充溢)이란 가득 채워져 넘침이다.

 

곧 이는 충만함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우리가 할 수 있는 제일 쉬우면서 어려운 일이 말씀으로다. 말씀 앞에 앉기가 그처럼 어렵다. 눈 뜨면 주식현황은 살펴도 주의 이름을 부르기란 그리 어렵다. 말씀 앞에 서면,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6).” 우리의 아픈 아이는 매일 성경을 쓴다. 하루에 다섯 장을 목표로 하지만 때론 한두 장으로 그칠 때도 있다. 그럼 자꾸 나에게 죄송하다고 한다. 누구도 똑같은 말을 계속하다 나에게 죄송하다고 한다. 누군 그렇게 예배 시간을 맞추지를 못하고 늦고는 목사님 죄송해요, 하는데… 실은 그게 어디 나에게 미안해서이겠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송구함을 느낄 때, 그것만으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충분하셨다. 송구하다는 것은 그 마음이 두려워서 거북한 것을 말한다. 나는 종종 누가 내게 감사해하거나 죄송해하면 그게 오히려 하나님께 송구하다.

 

충일하다는 것은 우리의 행동을 작동하게 하는, ‘하다’라는 동사가 붙은 가득 차서 넘침이다. ‘은혜 위에 은혜’라 하면 가슴 속에 가득한 충일, 어떤 기쁨과 만족함으로의 현상이겠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

(시 37:34).

 

우리는 복음의 목격자요 증인이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증거이어여 한다. 성령충만이란 뭔가 신비하고 놀라운 기적의 순간을 의미하기보다 일상으로의 충일한 감사다. 넘치는 은혜다. 그리하여 우리는 볼 것이다.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35-36).

 

당장 우리 앞에 펼쳐지는 여러 일들은 종종 우리를 미끄러져 넘어지게도 한다. 이는 악인이 잘 되는 것을 우리가 질투함이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73:2-3).

 

그러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나? 천년만년 갈 줄 알지만 다시 지나다보니 발견할 수도 없다. 고작 그게 다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권세란 게 길어야 고작 10년이고, 꽃이란 게 고작 아름다운들 십일도 못 돼 시든다. 그런 걸 붙들고 죽어라 하고 기를 쓰고 사는 꼴이니, 성경은 이르신다.

 

온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모든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이로다

(37:37).

 

누구에 대한 말이 아니라 우리다. 내 자신이 온전함은 내 안에 주를 모시고 사는 일이고, 주가 내 안에 거하심으로 나는 평안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주가 나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신다는데…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곧 주가 내 안에 내가 주 안에 가득함이 복이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사 43:2-3).” 이와 같은 말씀으로 새 힘을 얻고 산다는 것, 하루씩 여리고를 돌며 하루씩 입을 다물고 순종하다보면 반드시 나팔 불고 외칠 때가 올 것이다.

 

내가 비록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고 남보다 나은 게 없이 허물뿐이라 해도,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6:8).” 나로 주께 속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나로 인하여 기뻐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내가 아무리 허물과 수치로 가득하여 차마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는 하나,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

 

대체 다른 더 좋은 복이 무엇이겠나? 누가 알아주길 바라지 않고, 어떤 성과나 결과를 앞서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주만 바라고 나아간다는 일은,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이에 순종할 따름이다(수 6:10). 누가 자꾸 주의 길을 가는 데 있어 망설이고 미적거리는 것도, 누구는 주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 다른 이의 걸음이 자꾸 거슬려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덩달아서 못하게 되는 것도… 그럴 거 없다. 묵묵히 또한 무던하게 난공불락(難攻不落) 같은 여리고를 돌 뿐이다.

 

때론 오늘의 어려움이 주께서 그리 두시는 것이라,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골짜기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 그러할 때도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사 8:7-8).” 아픈 아이를 두고 엄마는 속이 타고 안달이 난다. 상대적으로 태평한 남편의 행태가 정떨어진다. 어찌 좀 주 앞에서 잘해보려 해도 일은 자꾸 꼬이고, 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기도를 해도, 교회를 열심히 다녀도, 나름 열심을 다해 믿는다고 믿어도 소용이 없는 것 같아 안 믿는 가족들로부터 웃음거리만 되는 것 같다. 그러할 때에 우린 또 우리 나름의 방법을 찾게 된다. 다른 수를 모색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러할 때 성경은 일갈한다. “너희는 함께 계획하라 그러나 끝내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해 보아라 끝내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니라(10).”

 

결국은 하나님으로다. 말씀으로밖에는 달리 길이 없다. 이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수 6:27).” 하나님이 하신다. 하실 수 있게 우리는 다만 입을 다물고 주 앞에 묵묵히…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시 65:2-3).

 

우리의 의지, 우리의 응답은 오직 한 분 구원의 하나님으로부터였으니,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5).

 

이와 같은 신앙고백이 내 것이기를. 그러할 때에,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10-12).

 

우리는 볼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 가운데서 주를 찬송하고 주의 영광을 내 것으로 차지할 것이다. 부디 믿음 안에서 주를 바라고, 신앙으로 하루 한 바퀴씩, 내 입의 부정적인 말을 삼가면서, 날마다 충일하게! 그리하면,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