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전봉석 2022. 3. 29. 05:14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

수 7:13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시 66:9

 

 

우리는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 그 귀하신 은혜와 자비하심을 찬송하는 때는 고통 중에서다. 무난하고 적당하다는 것이 우리로 삐끗, 그릇 행하게 한다. 이를 위해 오늘 시편은 우리를 단련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시 66:10-12).

 

오늘 여호수아서의 내용이 딱 그러하였다. 여리고를 함락하고 승리에 도취된 저들은 안이하였다. 그보다 작은 아이 성을 두고는 대수롭지 않은 듯 접근한다. 사람 몇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어 정탐한다. 둘러보니 여리고에 비하면 보잘것없다. 여호수아에게 돌아와 저들은 백성이 다 올라갈 것도 없다고 보고한다.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하며 가소롭게 여기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주께 묻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였다.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는 말에 삼천 명쯤 올려 보냈다가 아이 사람들에 의해 삼십육 명쯤 죽임을 당하고 스바림까지 쫓겨 줄행랑을 쳐야 했다. 여리고를 함락한 것이 자신들의 전략으로 승리한 줄 알았던 것이다. 자만이란 스스로 그리 여겨 자신을 옳다고 뽐내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함정이 있었는데 여리고를 함락하고 온전히 바쳐야 하는 물건으로 범죄한 것이다. 저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었다. 온전히 바쳐야 할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의 진노하심은 저들의 그릇된 판단과 결의를 놓아두심으로 패배의 쓴잔을 마시게 하신 것이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주 앞에 엎드렸다.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7).” 하고 비통해한다. 무슨 일을 두고 과거를 반추해 ‘~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다’는 논리는 아주 고질적인 문제다. 신약에서도 오라비 나사로가 죽자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께 향해 원망할 때 하던 소리도 그러하였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옳은 말이나 틀린 소리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32).”

 

꼭 옳은 생각이 옳은 행동을 미루고, 바른 판단이 바른 행함을 방해하기 마련이다. 누구의 이런저런 판단과 고려는 저의 행동을 미루게 한다. 스스로는 물론 남이 들어도 ‘그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일이 그래도 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은 아이가 확진이 되었고 온 가정이 양성 판정을 받았다. 좀 어떤가? 하고 전화를 하였더니 사모만 혼자 마음을 졸이며 애를 쓴다. 저도 말하길 좀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다. 하긴 우리의 미련함은 막대기밖에 답이 없다. 그 고집을 누가 꺾을까?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잠 26:3).” 별 수 없다. 전에 누가 대들듯 말하길 당해봐야 아는 일 아닌가? 하고 물을 때 나는 입을 다물었다. 당한 뒤는 늦을 수도 있다. 갈 데까지 간다는 것, 결국은 당해보고 깨달은들 구원의 방주는 문이 닫힌 뒤일 수도 있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아득함.

 

성경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 주께 맡기라는 것이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55:22).

 

듣기는 쉬운 것이 따르기는 참으로 어렵다. 맡김이란 심령의 가난함을 자초하는 일이다. 애통함이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렘 32:17).” 이를 알지 못함이 슬프고, 알면서도 맡기지 못하는 자만함으로 슬프다. 이쯤 됐다, 여기는 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특히 주 앞에 드리는 것에 대하여 그 전부가 주의 것인데 십일조를 두고 마음이 흔들리고 주를 섬기고 헌물로 바치는 것에 아까운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슬그머니 스스로 꼽는 마음이 들어와서다. 이 돈을 벌기 위해 내가 어떻게 애썼는데… 하고 자신의 수고를 꼽게 되면서부터 말이다. 그 건강과 재능과 모든 여건이 누가 더하신 것인 줄 잊고 착각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주 앞에 엎드려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고 비통함을 토로한다(수 7:9). 이에 문제의 원인과 모든 잘못을 알게 되고, 아간과 그에 속한 모든 것을 박멸한다.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26).” 우리 안의 아간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수시로 드나드는 아간으로 인해 주께 온전히 맡길 수가 없다. 그럼에도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이 놀라운 은총 앞에서 나의 복이 과분한 것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와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6-7).” 곧 나의 오늘은 누군가의 내일이 된다. 그리 하나님을 나타내는 사명을 부여하셨다. 고로 주께 맡김이란 은혜의 자리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8).” 내 어찌 스스로 내 안에 견고한 여리고를 무너뜨렸던가? 나는 주의 강권하심의 수혜자이다. 주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오늘은 없었다. 한데 이제 와 아이 성을 얕잡아 본다? 행여 그럴까 하여 나는 늘 주의한다고 하는데, 이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9).” 내가 한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때마다 주의 손길이라니! 주께 맡김이란 이 모든 것을 누리면서 상급이 쌓이는 원리다. 이는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 103:13-14).

 

나를 나보다 잘 아신다. 행여 스스로 이긴 줄 알고 아이 성에 쫓겨 물러날까봐, 하나님이 내게 두시는 연약함을 사랑한다. 누가 물으면 나는 기꺼이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약한 게 어찌 자랑이 되겠나? 예전에는 수치요, 부끄러움이라서 행여나 누가 알까 하고 아닌 척, 괜찮은 척, 있는 척, 잘난 척 하고 사느라 얼마나 피곤한 삶이었던지! 그러나 주께 맡김으로 더는 나의 약함이 약점은 아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를 두고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지만 어려움으로 단련하시는 주의 은총도 안다. 이 놀라운 비밀은 아는 사람만 아는 것이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시 68:19).

 

비결은 오직 하나, 기도하는 것이다. 주께 아뢰는 것이 능력이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1-12).” 나는 누구와의 대화에서 어떤 일을 두고 저가 이러니저러니 무얼 원망하고 탓할 때, 그 마음을 주 앞에 토로하라고 권한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시 102:1).

 

여기에 표제는 [고난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로하는 기도]라 하였다. 맡김이란 그런 것이어서,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142:2).

 

참 쉬우나, 이게 그렇게 어렵다. 원망과 볼멘소리로 남을 탓하는 게 더 빠르다. 그래서 기도도 능력인데, 이 능력은 의로운 생활에서 동력을 얻는다. 의로운 생활은 인내가 받쳐준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하여 인내가 우리의 의로운 생활을 유지하는데, 우리는 인내는 하나님과의 화목에서부터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하나님과의 화목은 자연스럽게 우리로 서로 하나 되게 한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이러한 말씀을 주목하고 묵상함으로 사람을 분별하고 하는 일에 유의하게 된다. 가령 나는 어느 전직 대통령의 비운의 삶의 근간을 ‘더러운 돈’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앞서 부친을 잃고 저는 암암리에 더러운 돈 위에 성을 쌓았다. 결국은 탄핵과 함께 인고의 세월을 지나 돌아왔는데, 저의 거처가 또 더러운 돈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그 집을 장만하고 제공한 곳이 어디란 소릴 들으면서 어쩔 수 없는 저의 숙명을 불쌍하게 생각하였다. 굳이 다 보도 된 내용을 밝히지 않는 것은 나는 저들의 말(言)질과 그로 인해 버는 돈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아간과 그의 모든 일가가 돌무더기로 쌓이게 된 아골 골짜기를 연상하는 것도 그것이다. 온통 서로를 향한 말질이 난무하고 그것이 또 돈이 되는 세상이라, 이를 들으며 귀가 굳어지는 것보다 비참한 현실은 없는 것 같다. 하긴 그 대표랄 수 있는 어느 위인은 막말로 고발을 당해 48시간 임의동행이라도 당하면 그 이틀 사이 수천만 원의 후원금이 들어온다고 하니, 나는 그저 아리송할 뿐이다. 아간은 그 와중에 어쩌자고 그런 것에 욕심이 생긴 것일까? 한순간이다. 아차, 하면 늦었다.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욥 9:31).” 정말이지 한순간이다. 그러므로 부당한 것에 맞서는 것도 능력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7-38).” 아닌 것은 아닌 건데, 그게 어려운 까닭은 저가 내 어머니고 아버지라.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36).” 그러니 내적 갈등은 이내 유야무야 봉합하고 마는 것일 텐데, 그러자니 우리 속에 아골 골짜기가 늘어갈 뿐이다.

 

특히 교회 안의 불의는 더 나쁘다. 예수님도 이는 참으실 수 없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21:12-13).” 근데 그게 또 어려운 것은 다들 그러고 산다. 심지어는 목사가 교사가, 앞서 지도하는 이들이 우선하는 데야 어려운 마음뿐이라.

 

나는 누구 일로 자주 한숨짓고 때론 뭐라 심하게 말하는 까닭은 차라리 목사를 그만 두면 나을 텐데… 그런 와중에도 나름은 목사라 하여 그런가, 가까운 교회라도 나가던가! 아내가 섬기는 교회에서 작은 일에라도 쓰임 받기를 사모하던가! 주일에 저 혼자 예배를 드리는지 어쩌는지, 그 와중에 아이와 아내는 주일학교 예배를 줌으로나마 드린다고 드리는데 저는 어쩌는지…. 나는 저의 상황을 듣다보면 내가 오금이 저린다. 믿는 자도 아니고 안 믿는 자도 아니고, 참 애매하다. 스스로도 그렇겠다. 지금 고통 중에 있는 저들을 두고 기도할 때면 지금의 실제 고통이 부디 그 영혼을 깨울 수 있기를. 지금의 모습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일과 다를 게 없어서 말이다. 우리에게 가장 참담한 징벌은 그냥 내버려두심이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그러니 그 이어지는 일련의 작태는 안 믿는 자도 꺼리는 것이라.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14:1).

 

말로야 없다 하나? 스스로는 믿는다, 괜찮다, 하고 있다, 하는 것이 우리 안의 아간이었고, 아이 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이스라엘의 자만이었다. 오늘 본문은 이를 일깨우시며 그 끝은 아골 골짜기라는 데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이다. 백날 말로 한들, “진리를 말하는 자는 의를 나타내어도 거짓 증인은 속이는 말을 하느니라(잠 12:17).” 별 수 없는 것은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15).” 그러니 그 등에 막대기밖에는 답이 없는 것일 텐데, 겪어 봐야 안다는 말에서 나는 비통함을 느낀다. 그게 나였고, 내 안의 아간이었으며 스스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아이 성이었다. 마치 내 힘으로 여리고를 함락시킨 줄 알고…. 어쩔 수 없는 것은 그 입의 말질인 것을,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롬 3:13-15).”

 

그러니 어쩌겠나? 기어이 살아서 살아봐야 알고, 겪어봐야 한다면 갈 데까지 가보는 수밖에. 다만 주의 긍휼하심이 부디 우리 심령을 어느 시점에서는 돌이켜 주시기를. 나는 주께 아뢴다.

 

하나님께 아뢰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말미암아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 (셀라)

(시 66:3-4).

 

그러므로,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그가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눈으로 나라들을 살피시나니

거역하는 자들은 교만하지 말지어다 (셀라)

(5, 7).

 

부디,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9-16).

 

그리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