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전봉석 2022. 3. 30. 05:23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수 8:34-35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시 67:1-2

 

 

비로소 아이 성을 점령하였다. 앞서 주의 지혜가 그 모든 일을 주관하셨다.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다(수 8:34). 말씀이 전하여지고, 이에 모든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다(35). 표면적으로는 고전적인 전쟁으로 무참히 도륙하고 점령하는 것 같으나 이는 영적으로 우리 안에 오래 고착되어 지배하는 기질이며 고약한 심보다. 곧 죄 때문에 “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신 30:4).” 비워야 채운다. 없애야 새로 세운다. 그 죄가 여전하다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 22:1).

 

죄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불가능하다. 예수와 함께 하시던 주의 영, 성령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맞이하실 때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 15:34).” 하고 절규하시다 예수 안에서 나오셨다. 그 잠깐 성자 예수와 떨어진 성령 하나님의 절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 27:51).” 하물며 죄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은 멀리 떨어지신다. “주께서 내 심령이 평강에서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내어버렸음이여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애 3:17-18).” 평강이 없고 복을 차는 꼴이다.

 

우리 안의 여리고와 아이를 생각한다. 저들을 하나하나 없이하지 않으면 우리가 저들 가운데서 의로운 척 산다. 가령 욥은 우리와 비견할 수 없이 의로운 사람은 틀림없으나 저의 의는 불안정하고 우리 의는 완전하다. 저는 스스로의 의를 자부하였다. 그럴 만도 하다. 앞서 빌닷이란 친구가 자식들마저 한꺼번에 죽은 것을 두고 정죄하자 저는 억울하였던 것이다. 먼저 저는 자신의 의로움을 꼽아본다. 먼저는 눈으로다.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욥 31:1).” 눈이 함부로 보지 못하도록 주의 하였고, 다음은 삼가 걸음을 조심하여 허튼 길을 따르지 않았으며 손을 깨끗이 하였고, “만일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거나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랐거나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다면(7).” 어릴 때부터 어려운 이들을 도왔고,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과부를 인도하였노라(18).” 재물이 많으나 재물에 현혹되어 살지 않았다. “만일 내가 내 소망을 금에다 두고 순금에게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다면 만일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다면(24-25).” 그러니 스스로의 의로 억울하기는 하겠다.

 

그러나 저의 의와 우리의 의가 다른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의로, 욥은 자신의 의로 살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산다. 이에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곧 우리의 의는 스스로 내세워 자랑할 수 없으나 하나님 앞에서도 정죄함을 당하지 않는 의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그래서도 우린 자신을 주장하지 않고 남을 판단하지 않는다. 욥의 친구들과 같이 누가 뭐라 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유는 그래서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시 19:8).

 

저들이 아이 성을 점령하고 말씀을 읽은 것도 그래서이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도 그 이유다. 함부로 자기 죄를 정죄하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결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내가 죽기 전에는 나의 온전함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욥 27:5-6).” 심지어 저는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하였다.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의 호흡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숨결이 아직도 내 코에 있느니라)(2-3).”

 

어느 가족이 모두 확진이 되어 고통 중에 있다. 좀 어떤가 하고 전화를 할 때마다 이 기회를 잘 살려서 주를 더욱 바라고 사모할 것을 권면한다. 그럼 저는 늘 한탄과 함께 이런저런 부정적인 말로 복을 찬다. 그 속에 원망이 많아 그런 것이겠으나 결국은 그것이 우리 안의 ‘아이 성’이다. 더욱이 상대할 수 없는 견고한 성이 여리고다. 저들을 무너뜨리고 점령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저를 세우신 이가 있느니 존중하고 위하되 지금의 그런 심정은 하나님께 고하라고 권면하는데도 그게 실상은 쉽지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눈 먼 자’의 문제보다 저를 보는 사람들이 문제라(요 9장). 하루는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은 물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곧 우리는 어떤 불행을 두고 죄책감을 부추겨 ‘무엇 때문인가?’ 하는 점에 주목하려 든다.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1-3).”

 

결국 일련의 사태는 누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 하심’이다. 이를 알고 바르게 분별하려면 기다려야 한다. 때론 그 기다림이 기약이 없다. 당장 오늘은 고약하고 내일은 암울할 뿐이다. 그러니 저도 모르게 툭, 터져 나오는 말이 ‘차라리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안 될까요?’ 하는 것이다. 그만큼 어려우니 하는 소리겠으나 다른 사랑인들 별나겠나? 겉으로 보기에는 남은 다를 것 같으나 그 속은 똑같다. 보이는 것과 실제는 다른 법이다. 더욱 우리를 고약하게 하는 것은 이를 아예 느끼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는 자들이다. 저들을 가리켜 ‘혼미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라 한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롬 11:8).”

 

다시 요한복음 9장의 내용에서 보면, 소경이 눈을 떴다는 놀라운 일보다 전혀 엉뚱한 것으로 설전을 벌이고 정죄하는 사람들을 본다. 저들은 자신들이 아는 지식으로 판단한다.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요 9:16).” 그 놀라운 행사 앞에서 안식일을 두고 씨름하는 것이다. 스스로 좀 안다는 교만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40).” 그러니 전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비통해하시며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41).” 차라리 같이 눈 먼 자였더라면 희망이 있었을까? 스스로는 본다고 하니 그게 더 큰 비극이다.

 

우리 신체 가운데 눈의 소중함을 두고 성경은 자주 말씀하시곤 한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 6:22).” 실제 우리 눈은 하루에 이만 오천 번 이상 깜빡거리며 미세하게 눈물로 안구를 씻어낸다고 한다. 눈이 보지 못하면 아무 것도 분별하기가 어렵다. 세상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13:16).” 곧 주의 말씀을 듣고 말씀으로 일상을 보는 것으로 귀하다. 한데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롬 11:10).” 우리의 고집이란 그와 같이 등을 굽게 하여 곧게 서지 못하게 하고, 눈은 흐려져 분간하지 못한다. ‘그러지 마.’ 하고 저에게 이르나 저도 그게 안 되니 답답한 것이겠다. 스스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 의였다. 누구도 의로울 수 없어서 제아무리 욥이라 해도 저의 의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성경 그 어떤 위대한 믿음의 선친이라도 주 앞에 온전한 것은 주가 그리 여겨주심으로 가능하였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베드로는 전하였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벧전 3:12).”

 

그러니 영의 눈이 멀어 아예 보지 못하는 심령으로 사는 자를 감당할 수는 없다. 저들의 완고함이란 자기 의를 기반으로 하여 어떤 말도 듣지 않는다. 잘못된 생각은 통념을 따르고, 통념은 시대를 반영하면서 비틀린다. 어느 당의 젊은 대표의 자가당착에 나는 할 말을 잃는다. 저는 아마 누가 뭐래도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출근길에 장애인 단체의 시위를 두고,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네 마네 하는 논리로 접근하는 이상 답은 없다. 그런 논리라면 저들이 세상에 나오는 것부터가 피해다. 남에게 불편을 끼치는 일이 된다. 차들이 오가는 길 위에 누워 시위하는 사람들, 벼랑 끝에서 저들이 오죽하면 목숨 걸고 그러할까? 하지만 저 젊은이의 아는 지식이 자신의 눈을 감기고 있다는 것을 본인은 모른다. 막말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 남의 치부를 들추어 밥벌이로 삼는 사람들, 이를 정보라 해서 오늘은 ‘정보가 곧 권력이다.’ 상대의 약점이 무기가 되는 세상이다. 영적으로 눈이 흐려진다는 것은 실제 우리 사회의 암울한 현실로 드러난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내가 내 스스로에게 되묻게 되는 것은 자라가야 한다. 성장을 멈추는 영혼은 가망이 없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문제는 그대로 멈추면 굳어진다는 것이다. 굳어진 판단은 외골수 같다.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주장만 한다. ‘세월호 막말 인사’로 알려진 누가 여전히 언론에 언급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도 참… 그 밥에 그 나물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겠나? 자신이 판공비를 가져다 아내에게 주고 생활비로 썼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고 다닌 인사가 떠나는 이의 발목을 잡듯이 남의 일을 판단하는 ‘명언기’처럼 굴 때면 역겹다. 젊은 애들이 그곳에 질문을 던지고 저는 ‘사이다 발언’으로 이 말 저 말을 쏟아낸다. 뭐나 된 듯 우쭐하는 모양이다. 결국은 하나뿐이다. 우리 모두는 주에게로 돌아간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나는 가급적이면 정치나 종교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누구와도 대화조차 피하고는 한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바라보는 곳이 다른 것인데, 이를 두고 논쟁하는 것보다 소모적인 것도 없다. 생긴 대로 산다고, 보이는 대로 사는 수밖에. 하면 우린 무엇을 보고 살 것인가? 오늘은 아이 성이 함락되었다. 저들이 모여 하나님께 제단을 올리고, 모세의 율법책 곧 말씀을 전하고 듣는다.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수 8:34-35).” 이는 그 목적이 하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시 67:1-2).

 

인생은 나그네 길이 아니다. 오늘은 어디 머무는 여인숙에 있지 않다.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에 오늘도 저와 내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의인으로 죄가 없다는 게 아니다.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욥 9:20).” 스스로 근신함이란 누구에 의한 게 아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언제 공격당할지 모르므로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잠 2:11, 5:2).” 이는 오직 말씀으로다. 욥은 외쳐 고하기를,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내가 받게 하시오며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점검하시나이다(욥 13:26-27).” 이것으로 죽을 만큼 힘들다 해도,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15).” 오직 주를 신뢰한다는 것.

 

‘저 인간은 믿을 수 없고, 저 인간만 아니면 된다는’ 투의 누구의 말에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저를 주가 세우심인데… 아, 참 어려운 일이다. 우린 어떤 일을 당하면 대뜸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어떤 일 때문에’ 하고 연관 짓기를 잘한다. 오전에 내가 그러그러했더니 오후에 그런 일을 당했다, 하는 식으로…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인가?’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접근하기 일쑤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를 일갈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모든 일이 그러하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 함부로 말질하다 구원의 법칙도 망각하기 십상이다.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시 67:3).

 

찬송은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인정하는 일이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이를 우리는 볼 것이다. 그러므로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셀라)

(4).

 

시편은 언제나 절제된 언어로 우리를 돌아보아 주의 뜻을 알게 한다. 노래로 때론 침묵으로 주 앞에 세우고 듣게 하신다.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6-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