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
삿 4:1-3, 23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시 87:1-2
여호와는 전능자, 창조자, 만유의 주라는 뜻으로 ‘스스로 있는 자’로서의 하나님 저의 이름이시다. 저가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 야훼이시다. 하지만 저들은 이 말을 믿지도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요 8:58-59).” 저는 결국 죽임을 당하심으로 그 사명을 다하셨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사 26:8).” 오직 그 이름이 드러나시기를.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시 22:7).
이와 같은 수모를 참고 견디신 이유는 무얼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직 은혜로만, 오직 그리스도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성경으로… 가끔은 존 파이퍼 목사의 이와 같은 논리 앞에서 가만히 숨을 죽이고 그 의미를 되새긴다. 부활절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 교회에 올라가 아침 묵상을 이었다가 저수지로 갔다. 몇 년 만의 행보인 것 같다. 잔잔한 물가에 낚싯대를 펴고 가만히 앉았다가 오후에 바람이 불어대면서 철수를 했다. 누구를 생각하였고 이어폰으로 찬양을 듣다 어느 대목에서는 시선을 떨구기도 하면서…. 오직 은혜로만!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한 데 있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 이것을 위해 나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 다만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 4:24).”
몇 년 만에 물가에 앉아 나는 또 얼마나 나아지고 달라졌나? 하는 생각도 하였다. 주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는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면 저절로 눈이 감기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교회를 맡고 목사로 세움을 받고 늘 그 실적은 저조하여 가시적으로 내세울 게 없을 때면, 이 길이 맞나? 하는 회의에 싸여 괴로울 때도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9:24).” 오늘이 나로 소망을 잃지 않게 하심이다.
늘 오늘과 같은 말씀에서 좌절한다. “에훗이 죽으니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이와 같은 죄의 악순환은 언제까지 거듭되었는지. 저들이 부르짖어 회개할 때에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 이 모든 일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신 것이다(삿 4:1-3, 23). 정죄함으로 죽어 마땅한데, 주를 인정하는 곳에 주의 긍휼하심이 함께 하시는 것.
이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이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주가 아니시면 내가 어찌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6-7).” 이 말도 안 되는 은혜, 죽어 마땅한데 이를 용서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으로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더니 영광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로까지 삼으신다니!
이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초라함으로 몸서리친다. 죄악 됨으로 기겁을 한다. ‘이를 어찌 할꼬?!’ 하며 탄식한다. 이처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그 위로가 실제였다. 오늘을 살며 미래를 여는 순간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럼 그럴수록 그에 걸맞은 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이는데,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우리의 탄식과 함께 우리의 성화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회심이 없다면 성호도 없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1:3).”
물가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가만히 찌를 응시하며 생각을 더하고 말씀을 되새기게 되는 것. 나는 그래서 주를 사유함이 은혜라는 생각도 하였다.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말 3:3).” ‘나 무엇 드릴 게 없어, 이 몸 바칩니다.’ 하는 찬송을 되뇌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17-18).” 이와 같은 말씀이 내 것이 됨을 감사하였다.
곧 나로 옛 자아를 혐오하게 한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 3:12-13).”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은혜였다. 나를 돌아보아 오직 말씀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주를 바라고 사모하고 있는가? 하고 되묻게 되는 시간이었다. 옆 사람은 여러 차례 고기를 잡아내고, 또 저쪽 편에서는 나이 든 동무끼리 투덜거리면서도 사이가 좋아보였다. 간간히 부는 바람은 훈훈하였고, 나는 하나둘 옷을 벗으면서 훈풍에 몸을 맡겼다.
더는 어떤 두려움, 죄책으로부터의 해방이 때론 신기하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14-15).” 하면 나의 구원은 어떠한가? 그 구원은 안녕하신가? 늘 이런저런 일로 부산한데 정작 저의 염려는 저들의 영혼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당장의 고초와 어려움으로 바동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숙명이기는 하겠으나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이와 같은 말씀을 오래 머금고 있으면 그 입이 쓰고 떫어야 한다.
“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4:4).” 한 날의 어느 시점에 어떤 장소에서 어떤 일로 씨름하고 있든지, 우리가 주를 바라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의 은혜 가운데 거할 수 있다면 더는 염려할 것이 없다. 주의 이름이 나의 것이 되었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 9:2, 10).
이를 알고 살 때와 알지 못하고 살 때의 나는 서로 전혀 다른 나이다. 가만히 물가 저편의 산들과 산들 사이의 하늘과 하늘의 구름을 물끄러미 보면서, 내가 받은 은혜가 참으로 귀하다는 생각에 새삼 감사하였다. 비록 이런저런 어려움도 있고 또 늘 곁을 하는 듯한 염려와 불안이 나를 떠나지 않지만, 이미 주의 영이 나와 함께 하심을 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나는 나의 동기에게도 이를 권한다. 저의 태만은 육신을 먼저 엄청난 거구로 비대하게 하였고, 이런저런 신경적인 요인이 저로 집안에 처박아버렸고, 그 무료한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육신이 원하는 즐거움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지경이라… 움직여야 해! 몸도 마음도 주의 것임을 알고, 물론 지금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항변하겠으나, 하여 나는 저에게 권한다.
읽어라.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엡 3:4).” 그 말씀을 우리 일상이 증거하고 있었다. 아내는 모처럼 생동감이 느껴진다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그렇게 바람을 쐬고 오라며, 전혀 뜻밖의 소릴 하였다. 하긴 늘 같은 자리를 맴돌듯 그 심령이 상했다는 것은 의욕을 잃었고, 더는 분별할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소리이기도 하다.
분별하고 드려라.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실은 어제 그처럼 저수지로 가기까지 꽤 많은 생각들이 가로막았다. 갈까 말까 하는 마음부터, 출근 시간을 피해 나름은 계산을 하고 일어났는데 소래포구를 지나 저편 간선도로로 들어서자 갑자기 정체구간이 나타났다. 앞에서 도로 포장을 하느라 한 길을 막고 한 길로만 직진을 하게 하면서였다. 나는 앞서 이와 같은 변수를 두려워하고, 그때도 후회와 함께 그냥 돌아갈까 하는 마음으로 마음은 더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하였다. 고작 5분 남짓? 우리가 주의 길을 가는데도 사탄은 이처럼 기묘하게도 우리의 약점을 잘 안다. 돌아갈까? 그만둘까? 여러 생각이 생각을 물고 온통 초조함이 공포로 확산하기도 한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마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 4:6).” 죄란 곧 병적이고 고질적인 마음이라 이를 스스로 물리치기는 어렵다. 저 또한 정신과 약을 먹고 자신의 문제를 문제로 인식한다는 데서 바람직하나, 계속 그 마음을 비추어야 한다. 만일 그 길에서 나는 차를 돌려서 오던 길로 갈 수도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러 외통수를 만나게도 하신다! 심적으로 가장 무서워하는 게 나는 빼도 박도 못하는 그런 길이다. 한데 실상은 나로 그리 묶어 두심으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못하게도 하신다!
찾아라.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 2:4-5).” 가만히 있으면 주를 사모하는 마음은 자라나지 않는다. 아이가 바동거리고 억지를 쓰고 ‘미운 짓’을 한다 해도 이는 정상이다. 부모의 사랑은 그 이상의 품을 가졌다. 하물며 주의 긍휼하심은 그 모든 것을 수용하신다.
생각하라.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딤후 2:7-8).” 생각함은 기억함이고 기억함은 그 은혜가 감사하여 저절로 주를 찬송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한다. 나에게 낚시는 그런 역할의 한 도움이 된다. 생각을 하려면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하는데, 흔히들 세월을 낚는다는 말을 나는 시름을 거둔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가만히 한 곳을 응시하며 저 작은 미동에도 촉각을 곤두세우며 자세를 바로 하였다가 또 고쳤다가 하면서….
표현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전에 같으면 누가 그러든가 말든가. 저로 인해 마음을 붙들리지 않으려 냉정하였다. 가령 예전에 글방을 하면서 숱한 아이들을 상대할 때, 그때는 마음이 어렵고 힘들던 아이들이 없었겠나? 누구는 친구의 자살로 삽시간에 모든 시간이 정지된 듯 멈추었고, 어느 여자 아이는 부모의 강압적인 요구를 불건전한 이성교제로 해소하며, 은근히 나에게는 저와의 성적인 관계에까지 이른 것을 자랑하듯 여러 차례 떠벌이기도 하였는데… 나는 그때 저들의 문제를 영적으로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흥미로 듣다 ‘문제아’로 치부하기 일쑤였으니까.
기억하라.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딤후 2:8).” 주께서 나를 어찌 용서하시고, 용서하시기 위해 무슨 일까지 서슴지 않으셨는지! 자신을 죽기까지 내어주신 그 사랑을 나는 갚을 길 없어, ‘이 몸 바칩니다.’ 하는 찬송을 어제는 유난히 되풀이 하며 물가에 앉아 있었다. 예수를 기억한다는 것, 저는 야훼, 전능자, 스스로 계시는 분으로서의 여호와이시다. 저가 나를 위하여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이제 나는 기억함으로 갚아야 한다.
전하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이렇게 안 되면 다시 저렇게, 저렇게도 안 되면 또 새롭게. 오직 주만 바라며 주가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저에게 권하고 전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의 어제 하루는 그 잠깐, 여섯 시간 남짓한 자리에도 잔잔한 물가에 드리운 낚싯대 앞에서 세상을 보고, 읽고. 불별하고, 그 마음을 비춰. 찾고 생각하며. 표현하고 기억하기를 전하기까지.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시 87:1-2).
그 문 하나하나마다 주가 두드리신다. 이에,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셀라)
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6-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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