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삿 5:31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시 88:13
오늘 사사기의 말씀을 승전가로 불릴 내용으로 드보라와 그의 동역자 바락의 찬송이다. 저들은 언약 공동체 국가로 오늘 날 우리 교회와 믿는 자들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승전보가 오히려 분열을 야기하게 되는 것을 본다(14-18). 드보라는 시스라의 군대와 대적하면서 이스라엘 지파의 상반된 태도를 보고 저들의 태도에 따라 진술하고 있다. 저들은 신정국가로 하나님의 통치와 지도 하에 뭉쳐야 한다. “하나님의 손이 또한 유다 사람들을 감동시키사 그들에게 왕과 방백들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전한 명령을 한 마음으로 준행하게 하셨더라(대하 30:12).” 이는 오늘 우리의 필수적인 자세이기도 하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6).” 우리는 주 안에서 한 마음을 품어여야 한다. “…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빌 4:2).”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 그러한 마음으로 서로 하나 된다는 것은 가히 불가능할 정도이다. 오늘 16절을 보면 저들은 전쟁을 당해 서로 토론하고 의논하지만,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찌 됨이냐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하고 서로의 태도에 대한 비난과 갈등은 작은 불씨에서 비롯된다. 별로 대수롭지 않을 수 있는 일에서도 위기 단계에는 서로가 예민해진다. 그러할 때 우리의 태도는 오직 하나 주께 간구하는 일이겠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이것이 우리의 기본이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일이 우리 스스로나 서로의 이해와 협조로는 불가능하다. 셋이 모이면 하나는 꼭 이탈자가 생기는 게 사람과 사람 사이라,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 1:16-17).” 스스로 혈육과도 의논하지 아니하였다는 바울의 진술은 우리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 될 수 있는 길은 말씀으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5).
서로의 가치와 주장에 따른 것이 아니라, 말씀을 우리의 가는 길에 빛으로 삼을 때,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돌보아 그들을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슥 10:3).” 주가 행하신다. 주로 행하시게 해야 한다. 곧 성령이 내 안에서 행하실 수 있게, 그리하면 스가랴의 다음 진술은 시적으로 아름답기까지 하다.
모퉁잇돌이 그에게서,
말뚝이 그에게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서 나와서
(4).
우리의 그,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싸울 때에 용사 같이 거리의 진흙 중에 원수를 밟을 것이라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 한즉 그들이 싸워 말 탄 자들을 부끄럽게 하리라(5).” 그러한 날들로 승리하는 맛을 보고 그 싸움을 경험해야 한다. 이는 이론도 누구의 가르침으로도 혹은 따름으로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개인적인 체험… 이를 가장 아름답게 기술하고 있는 것이 로마서 5장 서두 부분이 아닐까? 특히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사실 이 구절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더 자주 묵상하고 그때마다 의미가 새로운 것은 나의 아버지가 뒤늦게 주의 부르심 앞에서 개인적으로 받은 말씀이란 간증을 기억하고 있어서이다. 도저히 그 상황에-아이 넷에, 사업은 실패한 상태로 뒤늦은 나이에 주의 부르심에 응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말씀에 붙들린다는 것은 그 당사자만이 아는 불가사의한, 불가항력적인 은혜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당장 곁에 있는 혈육도 저를 미쳤다, 하기에 딱 좋은 현실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놀라운 사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 이를 어찌 누가 말로써 설명할 수 있고, 듣는다고 이해할 수 있겠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에 대해서 말이다.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홍시 맛이 나는데 어찌 홍시 맛이 나냐고 물으면 뭐라 대답하겠나? 서로 답답할 노릇이나 이는 어쩔 수 없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듯이 서로의 토론과 논쟁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결론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처럼 기이하기만 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다. 사랑을 받음은 경험의 문제지 이해나 상식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15:13).” 그럴 수 있는 자가 있고 죽어도 그럴 수 없는 자도 있다. 사랑은 지극히 주관적이어서 누가 우리 기독교를 종교로 이해하고 서로 하나 됨을 강조하려 한다면 그래서 저들은 이단이다. 종교화합을 운운하는 자체가 모순이다. 사랑은 나눌 수 없고 그 경험은 누가 대신할 수도 없다. 그런데 말씀 가운데 이 또한 모순인 것을 알게 하는 표현이 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하시는데 ‘우리’라는 표현이 무려 세 번이나 반복된다.
정리하면 사랑은 주관적으로 그 사랑을 받은 사람만 아는 것인데, 그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하나둘 모인 것이 교회다. 이때 우리로 한 소망 가운데 모이게 한 것은 환난이다. 오늘 본문의 배경도 전쟁 중의 찬양이다. 환난의 때였다. 저들은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과 은총을 경험하면서도 동시에 분열을 같이 겪기도 한다. 이는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이를 받는 자의 태도에 따른 문제다. 하여 저자는 자책하듯 자신을 나무란다.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 바락이여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네가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살 5:12).”
곧 우리의 오해와 갈등, 분열과 반목은 안이할 때이다. 그 사랑의 감동을 잊을 때이다. 다른 데 정신이 팔리면, 그리하여 주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이를 대체로 있는 자들은 갸우뚱한다. 왜 못 해? 하고 자신의 있음과 많이 배움과 남들로 인정받는 일에서도 얼마든지 동시에 주를 섬기고 온전히 바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저의 다음 반문은, 그럼 믿는 자들이라고 모두 가난하고 비루해야 해? 목사라고 돈도 없고 집도 없어야 해? 그 정도까지 저의 말이 치대면 나는 가만히 다음 말을 잇지 않는다. 이는 논쟁과 토론의 문제가 아니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사랑의 영역이다. 있고 없고, 가졌고 못 가졌고 하는 물질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사람의 사람됨을 잘 아시는 주님은 우리가 먼저 독립된 주체로서가 아닌 하인으로,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로, 사랑의 주체가 아닌 개체로,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물론 사랑은 동등한 나눔을 전제로 하지만 그러기까지 우리의 미숙함은 일정부분은 성장을 이뤄야 하는데, 그것이 재물과 함께일 때는 어려운 법이다. 마치 요즘 어른아이들이 판치는 것처럼, 애착 인형이니 애착이불이니 하는 것을 성인이 되어서도 몰두한다면, 이는 그래도 되냐 안 되냐의 문제가 아니다. 실은 우리 딸아이도 나이 서른이 넘어서야 소위 애착이불이란 것을 버렸다. 아쉽고도 뿌듯한지 ‘나 이거 버린다!’ 하고 내 앞에 들이밀고 한 번 얼굴에 대보이더니 가연성쓰레기봉지에 넣었다.
애착, 이 지긋지긋한 분열, 마음을 빼앗는 것에 대하여 때론 속수무책이라. 어느 연예인이 무슨 나눔 봉사를 하네, 어쩌네 하며 방송에 나오는 걸 보다 저의 집에 모아둔 피규어나 특히 신발, 가방에 대한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것도 수십만 원에서 어떤 것은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것이라, 앞서 저가 보여주었던 어느 나눔의 집에서의 봉사활동이 묻혀버리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그 마음에 부음 바 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실은 우리의 노력이나 임의로가 아니었다. 성령으로가 아니면 이는 아무도, 절대, 경험할 수 없는 느낌, 체험인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누구의 간증을 소중히 여기지만 이를 종교 이벤트화 하는 일에는 극히 주의하는 사람이다. 누구누구 간증집회라든가? 저가 죽었다 살았다는 둥, 죽어 있던 몇 분 동안 천국을 다녀왔다거나 하는 따위의 감성팔이 이벤트를 특히 교회에서 하는 일은 매우 위험하고 경계해야 한다. 물론 저의 말을 믿는다 해도 그것으로 우리가 덩달아서 아멘, 할 수는 없다. 괜한 부러움이나 자격지심이 애착을 부추긴다. 이는 결코 객관적일 수 없고 사실적일 수도 없다. 그럼 이미 일반적인 것이고 일반적인 것에 사람들이 혹할 것도 아니다. 그러니 말 나온 김에 교회 안에서의 이와 같은 종교팔이에 대해서는 화 있을진저! 마치 우리도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믿음을 가지면 된다는 식의 구호로는 어림없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7-8).”
이 소망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의 일로 하나님이 임의로 행하시는 일이다. 이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열심과 충심을 보시고 하신 일이 아니다. 기도 생활 열심히 하고 봉사하고 헌신했더니 그런 체험을 주신 게 아니다. 우린 엄연히, 죽은 자들이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그렇게 가치 없는, 더는 소망도 없고, 싹 수가 노란 존재인 나를 다만 온전히 주의 사랑으로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것이 주의 영광이다. 내가 어찌 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의 사랑이 아니다. 그럼 그게 뭐 칭송하고 영광 받으실 일인가? 우리는 누구도 우리의 죗값을 지불할 수 없다.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시 49:8).
평생을 울어다 다할 수 없고, 그 어떤 노역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것을 두고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이다. 혹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롬 5:7).”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고 쓰러져간 자들이 있다. 이상과 신념을 위해 끝까지 옥고를 치르다 병사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한데 그럴 가치도 없는 죄인을 위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 여기서 확증하다는 과거시제가 아니라 현재시제다. 여전히 유효하고 지금도 되풀이 되는 일이다. 그러니까 지금도 자기 사랑을 확증하고 계시는 것이다.
사랑은 본래 불가항력적이고 초자연적인 일이다. 어찌 ‘저런’ 사람과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할까, 싶은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도 때론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기도 한다.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어떤 감정으로 이끌려서 말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어찌 이해하고 설명하여 누구에게 전할 수가 있을까? 누구는 어느 말씀 한 구절에 붙들려 생전 가보지도 못한 타국의 언어를 배우고 그 먼 곳으로 날아가 평생을 저들과 살며 성경을 저들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한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아, 이 말씀은 무지막지하다. 한 마디로 죽으라는 소리다. 십자가는 지는 게 아니라, 그 위에서 죽는 것이다. 그러려면 자신조차 이해와 납득을 전제로 할 수 없다.
앞서도 잠시 언급한 것처럼 나이 서른 중반에, 사업은 망하고 딸린 가족은 주렁주렁하고 빚은 산더미인데 뒤늦게 한 구절의 말씀에 붙들려 ‘무모하게도’ 주의 부르심에 응한 나의 부친의 지난날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머리로도 실제 나의 경험으로 나는 이를 수긍할 수 없었고, 그래서도 유년시절 남모르게 원망과 좌절의 시간에 묻혀 살기도 했었다. 한데 오늘에 이르러 “우리에게 확증하셨다”는 것, 그 와중에 어쩌다 우리 사남매의 모두 주의 사역자로 그 길을 가고 있으니… 내 밑의 두 동생들도 그 반항과 원망은 저마다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는 현재진행형으로 오늘도 우리의 삶에 실현되고 있다. 다들 세상적으로 궁색하고 궁벽하기 이를 데 없고, 남들이 말하는 노후생활은커녕 당장의 생활도 여의치 않은 길인데도….
희한하지? 결국은 끝까지 버티고 죽어도 싫다던 나에게까지 주의 사랑을 확증하신 셈이니, 하나님을 이길 수 없다. 그 사랑 앞에는 속수무책이다. 이에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4).” 내 삶에 이를 알리신다. 그 증거로 나는 오늘도 끙, 하고 돌아앉으며 새벽 이른 시각에 일어나 앉아 말씀으로 또 한 날의 은혜를 충전중이다. 나를 아는 예전의 친구들은 아마 이런 나를 두고 혀를 찰 것이다. 누군 나더러 사이비가 다 됐다고도 했더란다. 혼자 뭐하나, 싶을 때도 있다. 분명한 건, 나도 모르겠다. 어째서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로 이처럼 주 없이 살 수 없게 하심을, 내가 직접 체험한다는 것. 이 사랑을 어찌 말로다 누구에게 증명을 할 수 있을까? 다만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하는 것인데… 주의 사랑을 어찌 설명할까? 더는 모르겠다. 다만,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하여,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시 88:1-2).
내가 어쩌다 이러고 있다?! 이럴 수 있는 내가 나에게도 대체불능, 설명부족이다. 납득이 안 가고 이해도 할 수 없으나,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13).
그래서도 나는 이 시간을 하루 중에 목숨 걸고 사모하는 것일까? 나도 모르겠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쥘 수도 없는데, 그 이상으로 주의 사랑이 내 안에 확증되고 확증되는 일이었으니.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이제 내가 두려워하는 일은 세상 어찌 될까? 내가 늙어 병들어 죽을 때는 어떨까? 하는 걱정 따위는 없다. 다만 오늘도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는가? 말씀이 나를 붙드시는가? 하는 것으로, 주의 사랑은 그 이상의 놀라운 가치와 무궁한 사랑을 알게 하시려고,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17-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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