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삿 2:3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시 85:13
사사의 시대가 어쩌면 오늘 우리의 일상을 그려주는 것 같다. 잠시도 사사가 없는 때에는 더욱 타락하여 그 마음이 강퍅하게 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는 모두 주의 직접적인 허용 안에서이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삿 2:18-20).” 이와 같은 날의 반복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이에 오늘도 한참 머물게 되는 말씀이 있으니,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3).” 그런데 결정적으로 오늘 시편에도 이 모든 일의 결국과 그 원인이 서술되고 있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시 85:13).
이 모든 게 의라. 하나님의 의는 우리로는 불가항력적이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부활의 새벽에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오늘 이렇게 ‘하나님의 의의 산물’로 주를 바라며 감사와 영광을 올릴 수 있는 것이 기이하기만 하다. ‘말씀으로 나를 낳으셨다.’ 하는 것과 같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이런저런 상황에서 때론 그것이 우리로 갈 바를 알지 못하게 하고 다른 길로 접어들게도 하면서 갈피를 잡지 못해 방황할 때도 있으나, 이미 내 마음에는 말씀이 심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21).” 곧 내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는다는 것.
모처럼 친구와의 통화에서 가끔은 날마다 일찍 일어나 묵상글을 쓰는 일에 대해 놀라워하곤 하는데, 나에게 이는 마치 숨을 쉬는 일과 같아서 어떤 날은 쉬고 어떤 날은 거두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게… 신대원을 시작하면서였을까? 그 이전에는 어찌 살았을까 싶을 정도지만 매일 나의 묵상은 나로 살게 한다. 이는 상대적으로 나의 일생에서 그 반대에 섰을 때와 확연히 차아가 난다. “…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 8:37).” 그러했던 날들을 생각하면 끔찍하고 두렵다. 어찌 그러고도 살았을까 싶을 정도이다. 그때는 너무 많은 다른 것이 내 안에 가득했었다. 나름 수고하고 애쓰는 것으로 용을 쓰며 살았던 것도 같다.
특히 감사한 것은 그때 그처럼 가까이 지냈던 친구 몇이 이제는 같이 주를 바라며 이 부족한 묵상글을 날마다 읽고 함께 주를 바라는 것이다. 다른 이 열의 백 마디 말보다 저의 한 마디 말이 더 큰 힘이 되는 것은 나의 나 됨을 누구보다 저들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야 말로나 듣고 그런가? 하고 에이, 설마 하는 정도이겠으나 저들은 나의 참상을 다 안다. 우리는 그렇게 어울렸고 그러면서도 적당히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더랬다.
더는 그럴 수 없는 것이 이 말씀이 우리 마음에 심어진 바라. 이를 ‘온유함으로 받는다’는 것은 주님도 말씀하신 것처럼,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온유함이란,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더는 토를 달지 않고 기꺼이 배우려고 하는 것. 주를 더 알고자 하는 것. 주어진 상황에서 주를 바라며 이를 극복하고 주신 대로 감사히 받으려 하는 것.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심기어졌다는 것은, 더는 의심을 버리고 나의 의구심을 물리치고 도려내고 주를 신뢰하고 주만 바라고자 하는 것. 이를 시편 1편은 한 마디로 ‘복 있는 사람’이라 하였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2).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함으로 더는 악인들의 꾀를, 죄인들을 길에, 오만한 자의 자리에 따르지도, 서지도, 앉지도 않으려고 한다. 누가 물으면 그나마 내가 사는 것은 이 부족한 묵상글 쓰기로 인함이라 자신한다. 여기서 구하는 힘이 나온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아니면 무엇으로 오늘의 현실을 감당하며 살겠나? 다 큰 자식들도 더는 나의 말에 꿈쩍도 않는다. 정색을 하고 뭐라 나무랄 수도 없다. 하물며 남들이야 무슨 말로 다스릴까? 한데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이 믿음이 어디서 나겠나? 무엇으로 숨을 쉬겠나?
내 안에 주의 말씀이 거하심으로 나는 온유하여 간다. 온유는 나의 타고난 성품으로 오랜 인격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숙한 자아나 경륜이 허락하는 범주의 것도 아니다. 나이 들어 노인이 더 괴팍하고 완고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소위 ‘꼰대’라 하여 서서히 나이가 들면서 나의 마음이 넓어지려니 했던 게 착각이었다. 옹졸하여질 뿐만 아니라 자기 주장만 옳다고 여길 때를 보면 알겠다. 마치 이것이 나잇값인 줄 착각할 때도 있다. 저것들이 뭘 알겠나? 싶은 자기 판단이 주를 이룬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 잔뜩 먹은 게 탈이다. 그런 상태로 주의 잔치에 참예한들 즐거울 리가 있겠나? 더 먹었다가는 배가 터질 것만 같고, 그러니 주의 말씀도 버겁다. 달가울 리 없다.
엊그제 살펴본 것처럼 이사야 5장에서의 ‘여섯 가지 화있을진저’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경고의 음성이 들릴 리 없다. 다른 것으로 그 마음이 가득 찼다. 말씀이 그 속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 성령이 내 안에 앉으실 자리가 없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하셨는데, 종종 그게 나 자신인 것을 고백하게 된다. 더는 아니었으면 하는데도 여전한 것들에 대하여. 말씀에서 나는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온통 죄뿐이다. 우리가 믿는다 하고, 거듭난 자녀라 하면서 말씀 한 끼도 없이 며칠씩 살아간다면 그게 어디 정상이겠나? 하물며 이를 호흡이라 할 때 단 1분? 5분?? 매순간도 숨을 쉬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데, 살면서도 자신을 살았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희한한 일이다.
우리가 살았다면 말씀을 받아야 하고, 주어진 상황을 주의 뜻으로 분별해야 한다. 아무리 아이라도 살았다면 꿈틀대고, 징징거리고, 꼼직락대고, 물고, 빨고, 먹고, 싸고 그 생을 다해야 한다. 한데 미동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믿는다, 거듭났다, 살았다 하는 것이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우리 안에 주의 말씀이 심어졌다면 온유하여져야 하고 온유함이란, 있는 그대로 받아야 한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세계라. 주가 모르실까? 범사에 주를 인정하라시는데 정작 저런 인간하고 살고, 이런 상황에서 허덕이고, 나는 무엇으로 씨름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실까? 그렇다면 내가 죽은 것인가? 하나님이 주무시는 것인가? 둘 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언제나 하나님은 선하시다! 이를 아는 것은 나의 영혼으로다. 나는 저의 물가에 심겨진 나무라.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 1:3-4).
이 둘의 대비를 보며 나는 한 생에 다 가지고 살았다. 그래서 전에 같으면 나의 과거(?)를 다 아는 사람들을 꺼려하고 부담스러워하여 멀리하고 싫어하기도 했을 텐데, 이제는 나의 허물까지도 자랑이 된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이들에게는 더욱 더 주가 어찌 나 같은 사람과 함께 하셨는가, 산 증거가 된다. 어찌 나 같은 자를 돌이키셨나? 하고 서로가 기이함으로, 주를 바라고 주의 말씀이 우리 안에 심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복되다. 가끔 서로가 놀리듯 놀라워 하는 것은, 우리가 이런 대화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입에서 주를 찬송하고 서로의 기도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아, 서로의 일상이 서로에게 희소한 게 아니라 넉넉히 차고 넘쳐 자랑할 것으로 채워져 가는 일이었으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하는 바울의 이 놀라운 고백이 언제부턴가는 내 것이 되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21).” 하는 것도 날마다 부러워만 할 게 아니라 바라고 구할 게 되었다. 이는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존재함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여 지난날의 나의 모습이 부끄럽지 않은 것은 그것까지도 주의 긍휼하심이 나를 용서하심이니, 사나 죽으나…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이 놀라운 말씀 앞에 서로가 같이 아멘, 할 수 있는 것이 복이다. 아니면 우리도 유다가 되지 않았겠나? 예수를 따르고 섬기고 함께 했다고는 하나, 우리는 날마다 배신할 뿐이다. 그런 가운데 하나는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하고, 하나는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27:5).” 하는, 그 결국은 극과 극으로 갈린다.
믿는다고 하면서 그 마음에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는 이제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비록 나의 삶은 그대로고 나의 성질머리도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 괴로울 때도 있지만, 그래서도 숨이 차서 이처럼 다시 이른 아침에 말씀 앞에 몸을 앉힌다. 말씀과 성령이 따로 떨어질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이에 더 무슨 증거가 필요할까? 말씀은 내 안에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결국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 자신도 내 자식도, 나의 영혼도 남의 영혼도, 하여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0, 13).” 성령을 구한다는 것, 이처럼 말씀 앞에 앉는다는 것, 이는 모두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바라는 것이니,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시 25:8).
하여 내 안에 두시는 마음으로 나는 아이와 줌으로 연결하여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전날에 다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개인방송의 문제와 그 허상을 설명하며 ‘그럴 수 있으나 그래도 되는 것과 그래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해 이해할 것은 이해하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임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또 누구와는 카톡으로나마 요즘은 좀 어떤지, 정신과 약은 어떻게 먹고 있는지 등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하여야 이 아이의 마음에 말씀을 심을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주가 마음을 주실 때는 안부를 묻고 이런저런 말을 나누는 중에, 행여 나의 섣부른 판단이나 행동이 주의 뜻을 그르치지 않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싫든 좋든 예전부터 늘 ‘꼰대’여서, 선생이란 어쩔 수 없이 뭐라 참견하고 잔소리를 하게 된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줘야 할 것 같고 실은 그래야 하긴 하지만… 이제는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딤후 1:11).” 그러니 누구는 나의 연락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안다.
예전 같으면 그런 꼴을 당할까 하여 내가 먼저 경계하고 저를 멀리하기도 했는데, 주가 주시는 마음에 이제는 기꺼이 나를 복종시켜 주 앞에 앉히는 일이 온유함이었다. 내 힘을 빼는 것, 내 의지나 나의 주장을 스스로 물리치며 주께 아뢰고 주께로만 의뢰하는 것.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부디 이 말씀이 내 마음 안에서 활동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하시는 것이 실현되기를. 내가 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라, 부디 나의 간구가 역사하는 힘이 되어 주의 영이 함께 하심을 저로 알게 하시기를.
하여 나는 이제 당당히 누구의 기도부탁도 듣는다. 수첩을 열고 그 날짜에 그의 이름과 사연을 메모한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내가 판단하지 않는다. 누군 자주 집이 잘 팔리기를, 좋은 세입자가 들어오기를, 좋은 집을 만나 계약할 수 있기를… 하는 사연으로 자주 부탁을 한다. 내가 무슨 부동산 업자도 아니고! 그럼에도 얼마든지…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저를 위해 기도한다. 들어주실 것을 알고 저에게 확답을 먼저 하기도 한다. 무슨 배짱으로? 주는 선하심을 알기 때문이다. 우선은 저가 내게 기도를 부탁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실 것이고, 그 일로 저의 여러 상황을 유도하여 허용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신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어찌 됐든 주는 선하시다. 이는 진리다. 가장 선하게 저의 일을 이뤄가실 것을 나는 믿는 것이다. 이 앎은 믿음이다. 이는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반드시 저도 하나 되어 주 안에 거할 것임을.
그러므로 성경의 ‘받으라.’ 하심은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깨끗하여진지라(마 8:3).” 그래야 한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 그러할 때, 베드로가 달라졌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하고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같이 시작하여 누구는 유다가 되고 누구는 베드로가 된다. 저들이 같이 있을 때에는 알지 못했다. 유다도 그러려고 그런 것은 아닌데, 결국 저의 비극이 이 땅의 일로 끝난 게 아니라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섬뜩하다. 유대교였던 바울이 돌이켜 전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곧 우리는 받기만 하면 되는데,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러는 숨을 참지 못하는 것처럼 나의 하루는 말씀을 받음으로 하루를 산다. 이는 하루하루 매일 매일의 일이다. 어느 날은 쉬고 어느 날은 건너뛰는 그런 게 아니다. 되레 이제는 무의식적으로도 그리 행한다. 이에 시편 1편에서는,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5-6).
곧 우리의 결말은 완성되었다. 하여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하는 고백이 내 것이다. 우리의 것이 된다. 이를 그렇게 강조하는 것이 아이러니 하게도 살아계실 때는 그처럼 알지 못하던 혈육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이는 예수님의 젖동생 야고보 자신의 고백이기도 하다. 그 부모는 예수를 알지 못하고 성전에서 그를 잃은 적이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눅 2:49).” 아울러 어느 날,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마 12:48).” 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한참을 갸웃하며 머문다.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시 85:6).
오늘의 나로 두시는 것도 하나님이시라. 하면,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7).
어찌 감히 이를 구하는데,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
(9).
말씀이 내 안에 머물게 하신 이의 뜻대로이다. 그리하여,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10-11, 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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