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전봉석 2022. 4. 22. 05:30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백 명이 이경 초에 진영 근처에 이른즉 바로 파수꾼들을 교대한 때라 그들이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

삿 7:19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시 90:17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이루어진다. 우리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다 돌려보내시고 고작 3백 명을 이끌고 갔을 때,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삿 7:12).”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아득하기만 하다. 이를 어찌 상대할까? 전혀 예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전략은 이번에도 펼쳐진다. 3백 명도 나누어 각각 백 명씩,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백 명이 이경 초에 진영 근처에 이른즉 바로 파수꾼들을 교대한 때라 그들이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19).”

 

기적이 일어났다. 죽어도 안 올 것 같은 그가 왔다. 사모는 늦어짐을 알리고 ‘기필코 오늘은 같이 갑니다.’ 하고 문자를 했다. 그냥 두고 오라고 하려는데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얼마쯤 시간이 지나 ‘지금 같이 갑니다.’ 하는 것이었다. 순간 아찔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가 뭐라 하겠나? 할 말을 적어두고, 기도를 하다, ‘그러니 어렵게 같이 나선 길이니 인사나 나누고 이런저런 주변이야기로 오늘의 만남은 그리 가볍게 다독여야 할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하였다. 내가 뭐라고! 그토록 애태워 날 보러 오는 게 아닌데, 굳이 내가 속 끓일 일은 아니었다. 주께 돌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시 90:17).

 

우리가 행한 일은 그 손에 기도가 들린다. 오늘 시편이 짧은 아침, 나 혼자 씨름하는 마음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적군들 앞에 말도 안 되는 숫자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뜻,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삿 7:2).” 내가 무얼 어떻게 해야 하나, 할 때는 그렇게 속이 볶이더니, 주께 맡기고부터는 마음이 한결 느긋하여졌다. 앞서 사모는 오늘은 어렵게 데려가니까, 살살 말씀해 달라는 소리에 더 혼동이 왔던가보다.

 

오자마다 나는 그 소리부터 했다. 그러고 언제 또 본다고, 굳이 안 봐도 되잖아? 하고는 평소 다루었던 문제들을 거침없이 말해버렸다. 내가 저의 기분을 살피거나 저들 사이를 고려할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소리까지 했다. 돌아가 둘이 싸우든가, 갈라서던가, 나는 오늘만 볼 사람처럼 말하겠다, 하고 시작하였다. 그러니 사모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표정이고 저는 뭐 이런…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날 보자고 여기까지 오게 하시고 수개월을 기도하며 마음 졸이게 하신 일은 아닐 거였다. 나는 앞서 주가 알아서 하실 것을 미루었다. 주의 종으로, 목사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맞다면 더더구나 말이다. 실은 저들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마음을 졸였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게 더욱 확실해졌다. 주가 하실 일이다. 하실 것이고, 내가 행하나 내 손에 들린 것은 기도뿐, 솔직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난감하긴 하였다. 남의 부부 일에….

 

오늘 시편은 우선 ‘우리의 거처’는 하나님이라는 데 방점을 찍고 시작한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시 90:1).

 

어디에 머물 것인가? 어디를 디딤판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어서 시편을 두 곳 더 보면,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4:8).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91:9-10).

 

뒤에 이어 나오지만, 그야 말로 인생 뭐 있나? 어느새 저도 이제 마흔이라 그 얼굴에 나이가 들었다. 몸은 은둔하는 생활답게 비대하였고, 눈빛은 피로로 찌든 모양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몸을 돌보는 일부터, 가정을 살피고 아내와 맡기신 아이를 두고 지금 그대의 삶은 온전한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삶이 얼마나 허무한가, 하는 데는 오늘 시편으로도 그 주체가 누구인지 알게 한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90:2).

 

이를 안다면, 두려운 걸 알아야지? 하고 다그치듯 물었다. 무섭지 않느냐고 거듭 물었다. 그러다 병들어 일찍 죽을까봐,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내가 묻는 두려움은 ‘하나님이 그대로 두실까봐!’ 하나님을 그 마음에 모시기 싫어하니 그 상태 그대로 그냥 내버려 두실까봐! 나의 질문이 저에게는 어찌 들릴지 나는 가늠할 수 없었다. 뭐라 생각하든 멈출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하는 지혜자의 말이 떠올랐다(전 1:3). 목사가 게임에 오락에 무슨 장난감이니 하는 취미에 빠져 있을 때인가? 하고 직설적으로 되묻기도 하였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1).” 두 왕이 우리 안에서 서로 왕노릇 한다. 하나는 사망이고 하나는 은혜이다. 누구보다 이로 인한 혈투가 지독한 이가 목사이지 않던가?

 

바울도 오죽하니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저가 젊어서 이런 소릴 하면 이해가 될 텐데, 나이 들어 할 만큼 했다 싶은데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하는 소리로 미뤄 그의 내적갈등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하물며 내가 저에게 물은 것도 그것이다. 두렵지 않나? 무섭지 않나? 하나님이 그대로 내버려두심이 어느 훗날, 나는 너를 모른다! 하실까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머잖아 이와 같은 날이 이를 것이다. 곧 우리는 이와 같은 아수라장 같은 곳에서 하나는 이쪽에 하나는 저쪽에 서서 주를 마주해야 한다. 겁나지 않나? 하는 나의 간곡한 질문에 저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야말로 나는 한 시간 동안 저의 말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다신 안 본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딤후 1:1).” 하는 저의 확신처럼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는가도 물었다. 애매한가? 그럼 아내 되는 사모라도 바른 길 가게 해야 하지 않겠나? 하고 다그쳤다. 우리가 ‘하나님을 뜻대로, 생명의 약속대로’가 아니면 무슨 일로 이런 자리에서 만나겠나?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나는 전날에 왜 이 말씀을 먼저 내 가슴에 못을 박듯이 쳐대셨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그게 맞는다면, 확실하다면, ‘위의 것을 생각하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2).”

 

하물며 목사로 세우심을 받은 이가 지금 그러고 있다는 게 말이 되나? 아니면 별의 별 가정이 다 있고 별의 별 인간이 다 있듯이 그러든가 말든가 어쩌겠나만… 주의 자녀로, 주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데 따른 확신이 있는가를 나는 되물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3).” 무슨 말씀인가? 나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니? 여러 의미를 내포하는 표현이겠으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말씀이 그런 의미가 아닐까? 그리 여기고 살고 있는지. 그렇지도 않으면서 목사랍시고 비대해진 바리새인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시 102:26-27).

 

주님 외에 이 땅에 영원한 것은 없다. 저도 나도 서로가 어느새 많이 늙었다는 데서 놀랐다. 예전에 신대원을 다니면서 글방으로 놀러오던 청년의 모습은 사라졌다. 나이는 속일 수 없다고, 싫든 좋든 나이 들어간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지금의 그 일시적인 즐거움과 행복에 사로잡혀 언제까지 주의 사명을 소홀히 하고 있을는지. 나는 부디 나와 같이 너무 먼 길을 돌아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를 부디 빌어주었다. 나이 마흔이면 이제 비로소 목회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그 남은 생이 헛되이 버려지지 않기를. 하여 오늘 시편은 우리로 우리에게 맡기신 자리를 지키도록 하심이 아닌가? 하고 일깨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시 90:3).

 

그러할 때 누구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뚝 서 있는 나무 같이 건재할 것인데, 이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라. 사람의 결국이란 사탄의 종말과 같아서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 1:6).” 이를 여러 번 웅얼거리며 읽으면 두려움이 엄습한다. 나에게 맡기신 자리를 마땅히 감당하지 못하고 이탈했을 때, 그 다하지 못한 소명에 대하여 저나 나나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과연 우리의 온전한 사명이란 무엇일까? 다시 시편에서 그 답을 구한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90:4).

 

다른 시편에서도,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146:5).

 

결국 우리의 궁극적인 복은 주께 그 마음을 두고 사는 일이다. 하나님이 나의 현실이다. 오늘이시다. 이를 알며, 이를 전하여, 주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지 않겠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6-7).” 말씀에 우린 붙들린 자들이다. 부르심을 받았다 함은 그 말씀으로 자신을 맡겼다는 소리인데, 죄의 결국이 허무할 뿐이란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안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 결국에 대하여 오늘 시편은,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시 90:5-6).

 

우리가 그들을 결국을 알면서, 결국 자신을 그리 둔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고 미련한 일이 또 있겠나?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성경을 관통하는 이와 같은 진리를 알고도,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하는 사명을 받고도, 모르는 채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산다면 이 죄가 하나님 앞에 놓여질 것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시 90:7-8).

 

나로 저에게 다그쳐 묻게 하신 것이 이것이 아닐까? 알면서도 그러느니 모르는 자로 살았다면 용서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남았을 텐데… 무섭지 않나? 하고 물었던 것도, “내가 모든 악을 기억하였음을 그들이 마음에 생각하지 아니하거니와 이제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에워싸고 내 얼굴 앞에 있도다(호 7:2).” 나는 이게 무섭다. 말로 하려다 눈물이 핑, 도는 것도 용서하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지만 나의 허물과 죄가 너무 부끄러워, 아니 그것이 여전한 것만 같아서 감히 두렵고 떨릴 따름인데,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눅 12:2).” 나는 저가 나와 같이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 그 두려움이 경외함으로 그의 남은 생애가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받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말하기에 앞서 나의 허물을 두고 주께 아뢰었던 것도 그것이다. 내가 뭐라고 나를 그처럼 만나게 하고 만나려고 찾아왔겠나?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시 90:9-11)

 

인생 그야말로 뭐 없다. 그깟 인생에서 뭘 얼마나 더 누리고 즐기며 늘어지게 살다 가기를 꿈꾸고 이를 행복이라 여기는 것인지… 그런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정작 우리의 두려움은 그게 아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왜 이처럼 성경은 경고음을 울리시는가? 바울은 짐작하였던 것이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 5:1-2).”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 1:5).”

 

부디 우리의 남은 날 수를 계산해 보는 시간이었기를.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시 90:12-13).

 

하여 전도자는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한 마디로 아직 기회가 있을 때 그리하란 소리다. 이를 위해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7:2).”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다. 뭐 좀 가졌다고 우쭐한들, 뭐 좀 덜 가졌다고 힘겨워한들, 다 그 끝은 동일하여서,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2).” 이것이 지혜요, 바른 신앙이고 사명이겠다. 고로 참된 만족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알 수 있는 것인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시 90:14-15).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나라를 위하여,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에 오늘을 목사로 살게 하심보다 더 영광되고 복된 날이 또 있을까?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 63:3).

 

이게 어디 아무나의 고백일 수 있겠나?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107:9).

 

이를 맛보아 알면 다른 어떤 자리도 일도 부러울 게 없다. 꿀은 먹어봐야 맛을 알지… 성분이 어떻고 그 느낌이 어떻고 제아무리 해박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어린왕자>에 나오는 어느 지리학자처럼 온통 저가 읽은 책으로 각 나라의 지리를 알고 그 곳곳에 대해 해박하다 한들, 가 본 적이 있냐는 질문에 저가 말하는 '안 가봐도 안다'는 그 앎은 공허할 뿐이다. 말씀도 그와 같아서 그리 살아야 맛을 알지, 머리로 꽉 차게 잘 안들? 언어학자로 신학자로 평론자로 저가 아는 하나님은 그저 책 속의 인물이시라. 우린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을 산다. 우리의 현실이 하나님이시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20).” 하나님이 오늘도 날 위해 창자가 들끓으실 지경이다. 그리하여 불쌍히 여기시는 그 사랑을 아직도 맛 보지 못했다면, 저나 나나 주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하심을 무슨 수로 알고 감사하는 하루를 살겠나? 이에,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시 90:16).

 

하면 우리가 하는 일이 손에 들릴 줄 알았는데, 실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이 기도뿐이었다. 같이 내려가 식사를 하고, 당부를 하고, 다음 주에도 오라, 하고 권하였는데… 내가 잡는다고 잡힐 것도 아니고, 나는 기도뿐이라.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렘 9:7).” 주가 생각이 깊으시다. 하여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골 4:3).” 나는 저가 돌아가고 오히려 홀가분하면서도 할 일이 많이 남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 손에 쥐어진 것은 기도할 일뿐이었다.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시 90: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