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룻 3:18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07:1
베들레헴 유다 지파의 보아스가 보리 여섯 되를 룻에게 주었다. 보리를 주었다는 것은, ‘두려워하다, 전율하다, 소용돌이 치다.’ 하는 의미의 히브리어 ‘세오라’ 곧 ‘보리’가 가진 단어의 의미로 짐작할 수 있다. 곧 룻에게 보아스는 새로운 의미가 된다. 성경에서 숫자 ‘6’은 불안, 노동, 불완전의 의미를 지닌다.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요 2:6).” 상대적으로 숫자 ‘7’이란 수는 완전수로 안식을 의미한다. 보아스가 룻에게 보리 여섯 되를 주었다는 것은 자신의 남은 할 일을 이행하겠다는 의미이도 하다.
룻이 이 모든 사실을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알린다. “룻이 시어머니에게 가니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하니 룻이 그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다 알리고(룻 3:16).” 이는 그의 말을 다 들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르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 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하니라(17).” 단순한 이야기로는 가난한 두 과부에게 행한 선행의 하나로 비춰지지만 보아스도 나오미도 이 일을 그저 되는 대로 행한 게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곧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18).” 여기서 우린,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 46:10).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 이는 우리의 믿음과 신앙의 기본자세가 된다.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행 19:36).”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다. 타작마당은 교회를 상징한다. ‘곡식 단 더미’에서 잤고, 그 발치께에 룻이 누웠다. 곧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계 14:15-16).” 룻은 나오미가 말한 대로 행하였다. 저에게 ‘가만히’ 들어가 누웠다. 이는 비밀하고 은밀한 신비로운 비밀의 의미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6-27).”
내 안에 ‘가만히’ 일어난 일, 마치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마 9:20-21).” 이 일을 주님과 나만 안다. 그리고 이르시기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22).” 이는 우리가 주를 경외함으로 내 안에 가만히 들어온 믿음의 작동으로 이루어지는 놀랍고 비밀스러운 기적이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마치 보아스가 자신의 겉옷을 덮어준 것처럼, 우리 주님은 혈루증 앓는 여인에게 자신의 옷자락을 내어주셨던 일을 연상하게 한다. 이를 우리 주님은 선포하셨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 9:22).” 곧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룻 3:10).”
곧 우리에게 베푸시는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할 것이다. 이를 오늘 시편은 찬송한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시 107:21, 31).
곧 우리는 안다. 그 비밀한 일은 우리 주님과 혈루증 앓는 여인이 또는 보아스와 룻, 서로는 알았듯이 구구절절 무엇이라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에 대하여,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43).
오늘 시는 전체 5권, 150편으로 이뤄진 시편 가운데 마지막 다섯 권 첫째 시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감사와 찬송을 올린다. 곧 우리의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영원하다는 것을 선포한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
이는 우리의 의무이면서 특권이다. 에스라서에서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스 3:11).” 하였던 것과 예레미야의 증언에서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하고 선포하고,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하고 노래하는 것과 같다(애 3:22-23). 이와 같은 특별한 은혜를 받고 남다른 감사할 수 있는 것이 복되다. 오늘 시편은 저만이 아는 은혜와 감사를 상기시킨다.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2-3).
곧 우리는 안다는 것,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 중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로다(사 44:23).” 이를 알 때 다른 데 한눈 팔 겨를이 어디 있을까? 이런저런 문제와 여러 기타 어려운 것들이 우리로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사탄은 수시로 방해한다. 이에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3-14).”
어제 주일은 ‘우리의 거처가 되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오늘 이 땅의 기형적인 소유욕에 대해 거론하였다. 유일한 모세의 시로 알려지고 있는 시편 90편에서 저의 첫 마디는 단순하였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90:1).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면서 우리의 거처로 삼는 집에 대한 소유와 우리 영혼이 기거하는 몸에 대하여 우린 너무 기를 쓰고, 이를 마치 생의 전부이고 목표인 것처럼 붙들고 산다. 그러느라 정작 우리에게 놀라우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어디에다 잃어버린 것인지, 누구는 자신의 생을 회환하며 평생 일군 것이 이 집 한 채가 전부라고 하며 허탈해하였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그야말로 영혼까지 탈탈 털어서 평생을 원금과 이자를 갚느라,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일찍이 나의 부친이 교회 건축을 하면서 이로 인하여 겪었던 일과 그 일을 끝내 좌초시키심으로 오늘의 우리 사남매가 복음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한다.
우리로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일은 예상보다 너무 많다. 오늘 시편 4절의 말씀을 그리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107:4-5).
대체 왜들 이렇게 사는 게 고단할까? 끼고 있는 집 한 칸이 애물단지고, 교회마다 건물 건축이 분열을 부른다. 한참 건축이 필요하고 그럴 수밖에 없던 시절에는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릴 장소를 자급해야 했음으로 그리 건축하고 교회 짓는 일이 서로 하나 되게 할 때도 있었지만 오늘에 이르러는 과포화 상태다. 거처로 삼는 집도 가진 자가 더 많이 가짐으로 그 균형이 기울어진 것이지 실은 이미 포화상태를 넘어섰다. 아파트를 올리는데 개펄을 개간하고, 녹지와 산지를 파괴하고, 심지어는 쓰레기더미 공동묘지 위에까지 막무가내로 쌓아올린다. 그럼에도 도심의 아파트 한 채로 그 인생의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도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위안이 다른 것으로 충족된다. 시편은 이를 돌이켜 읊조리기를,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18:6).
이에 주의 응답하심이 들리지가 않는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15).
하긴, 없으니까 하는 소리라 하겠지만 나 또한 죽어라 하고 가지려고 했다. 그야말로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때 어울리던 사람들과 심지어 그때 나의 부친이 만일 교회 건축에 무탈하여 5층 건물의 당시 그 건축이 원활하여 성공하였더라면… 어땠을까? 차마 그때 같이 어울리던 다른 목사님들의 결말을 나는 여기에 옮겨 적기가 민망하고 두렵다. 누구는 그 사모님까지 죽어라 하고 보험을 하면서, 한참 서로가 교회 부지를 알아보고 서로는 마치 교회 부흥의 자표로 교회 건물을 두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둔 것 같았다. 그런 이 가운데 누구는 그의 노년이 어디서 청소일을 하며 근근히 그 노년을 고단하게 산다. 또 어떤 이는 그 교회를 자신의 것처럼 행사하다, 횡령으로 교인들에 의해 고소당하고 현재까지도 그 신세가 말이 아닌 걸로 안다. 저들 목회의 말로를 아름답지 못하다.
나는 그때 나의 부친이 빈손으로 그 모든 것을 잃은 것이, 이제는 가장 큰 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른 교훈이 우리에게도 적잖아서 나도 그렇지만 형제들은 오늘도 목회 현장에서 교회 건축이나 성도의 숫자 목표가 아니다. 한 영혼 그 맡기시는 한 영혼으로 씨름하며 묵묵히 주의 길을 간다. 앞서 부친의 그 일이 우리에게는 교훈이 크다. 부친 또한 주의 은혜 가운데, 그렇게 빈손으로 모든 탈탈 쏟아부었던 것을 날리고(?) 오히려 더 있는 것으로 감사할 수 있었으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참으로 기이하시다. 그 신세가 처량한가 했더니 뜻하지 않게 미국에서 초빙이 들어왔고, 그 사이에 나를 엎어트리더니 신대원을 하게 하셨다. 그때 만일 부모가 곁에 계셨더라면 나는 저들을 의존하고나 원망하거나 하면서 여전하였을 걸음인데, 아들까지 떼어놓아 필리핀으로 보내시고는 나로 하여금 고립무원을 만드신 후에 오직 주만 바라보게 하셨다.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은 두고두고 말해도 끝이 없다. 인생의 다양한 지점에서 나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랑을 경험하였고, 이는 지극히 단순한 돈 문제부터(학비를 한 번도 내 돈으로 마련하여 충당한 적이 없을 정도로), 나의 고질적인 완고함과 기질적인 성향까지도 잠잠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일하심을 일상에서 증명하셨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8).
오늘 시편의 핵심 구절은 내 것이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 행하시는 기인한 일의 상관관계는 오늘도 시시때때로 연거푸 드러나고 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15).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2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31).
같은 시구인데 이처럼 나열한 까닭은 읽고 또 읽고 되뇌어 그 의미를 더욱 깊이 알고자 하는 것이다. 본론이랄 수 있는 4-32절까지의 시구는 ‘하나님을 찬양할 근거’로서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은혜를 네 부분으로 제시하면서, 그 진술의 근거로서 ‘주의 인자하심을 찬송하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를 이처럼 한 마디로 정리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이를 나는 나의 젊은 날 그 교회 건축의 한복판에서 덩달아 빚에 시달리며, 교회 성도들이 떠나가고, 결국은 두 손 들고 빈손으로 나오게 하시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고 그리 겪었다. 그에 따른 나의 한 마디 회고라면,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하는 여러 번의 반복 구절로도 대신할 수 없다. 물론 삶의 여러 어려움은 따랐고, 나는 더욱 악하여져(?) 하나님을 참 많이 싫어하였었다. 그때 매형도, 두 동생도 결국은 부르심의 소명에 순종하였고 비로소 가장 뒤늦게나마 나 같은 죄인조차도 주의 종으로 불러 세우신 결과이니, 하나님은 참으로 대단하시다! 인간적으로 이 일이 어찌 가능하였을까? 오히려 곁길로 가서 더는 주를 멀리하고 교회를 등지고 살았어야 이야기가 된다. 나는 그럴 거였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부친만 돌아가시면 더 이상 하나님과도 상관없이 살 거였다. 한데 하나님은 나의 부모를 위시하여 우리 형제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는 영혼을 그 속에 주신 것이고, 용서 받지 못할 나까지도 오늘 이처럼 주 앞에 부르신 것이니! 때론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한데 시편은 그럴 수 있고, 그게 결국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놀라운 구원사역인 것을 알게 한다.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70:4).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103:5).
물론 나는 짧지 않은 시간을 돈돈거리며 돈 많은 사람들과 어울렸었고 저들은 정말이지 하나님 없이도 어쩜 그렇게 돈도 잘 버는지, 누구는 어디에 전원주택을 샀는데 저가 사는 동네 앞으로 전철이 지나가면서 열 배 이상의 가치가 되었다. 또 생전 연락도 없이 살다 죽은 누구의 부친이 남긴 태백 어디의 탄광촌 산이 수백억의 가치를 가지고 유산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당시 내 눈에 하나님이 안중에나 있었겠나? 누구는 기껏 잘 다니던 기자를 그만두고 사업을 하는데 다들 무모하다 하였으나 오늘에는 연매출 수십억을 남기며 서른 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표이사가 되었다. 내가 저들과 어울려 살 때 나도 그러하기를 얼마나 애태우며 덩달아 열심을 다했는지, 나름은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다. 모 선배의 기획사 작사 일을 도우면서 그때 합류했더라면 어땠을까? 저가 그때 미국으로 진출할 때 같이 움직였으면 어땠을까?
그러니 놀라운 사실은 알 수 없는 손이 우리를 붙드시고 심지어는 다 훼방하듯 막으신다. 나는 그때 이를 불행이라 여겼고, 저들의 잘되는 것을 보면서는 부러움이 늘 가득하였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주 없이 사는 저들의 부유함이 안됐고, 그 나름의 철학과 가치가 불쌍하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107:10-11).
지금 저들과 통화라도 할라치면 그 입에서 들리는 소리는 온통 죽겠다는 소리다. 말끝마다 씨발, 씨발하며 자신이 살아가는 날을 두고 원성이 높다. 누구는 정부정책을 욕하고, 누구는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며 푸닥거리라도 해야 할 것 같단 소리도 한다. 참으로 가지가지라. 예수님은 이를 두고 말씀하시길,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16).” 그러다 저들은 나의 안부를 묻고 그 말이 진심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오늘의 나를 두고 부러워한다. 누구는 평안해보인다며 신기해한다. 내 뭐라 말한들!
“내가 그들이 고난의 바다를 지나갈 때에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규가 없어지리라(슥 3:11).” 어쩌겠나? 부디 주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롬 3:19).” 이에,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107:4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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