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삼상 7:1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시 115:11, 15
여호와의 궤를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았다.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다.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었다. 이스라엘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였다(1-2). 사모하였다는 것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쳐 깨달아 하나님의 구원을 바란다는 의미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였다.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저의 설교에 이스라엘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겼다(3-4). 그러자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미스바로 모이게 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회개하였다.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렸다(5-6).
본문의 서두에서 우상, 곧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신들을 제거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모하면서도 동시에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길 수 있다. 바알을 시리아 일대의 ‘남신’으로 주, 소유자란 뜻을 가진 천후와 풍요를 다스리는 주신으로 천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천동, 금, 은제로 신상이 만들어졌다. 아스다롯은 가나안의 신들 중에 가장 선호하는 신으로 아스타르테, 아쉬타르 등 앗수르와 그리스에서도 사랑 받았음을 알 게 된다. 엘 신과 아세라 신이 결혼하여 낳은 자녀가 바알과 아스다롯이라 하였다. 바알은 여동생들 중 가장 아리따운 아스다롯을 사랑하였다고도 한다. 그처럼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그리스 사람들은 사랑의 여신으로 아프로디테라 하고 로마 사람들은 비너스라고도 하였다. 또한 저는 파괴의 여신이기도 하여 바알 신전에서는 아스다롯을 함께 제사하며 섹스와 광란이 아수라를 이루었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과 저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동시에 자행되던 시기에 사무엘은 이 모두를 없이할 것을 명하고 백성들을 금식하며 회개하게 하여 주께 돌렸다.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리에 블레셋 사람들이 치러왔으나,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고,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다(7-9). 이스라엘은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블렛셋을 치며 쫓아냈다. 사무엘이 돌을 가져다가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우고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여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였다(10-13). 블레셋 사람들이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회복되었고,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다.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다.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처럼 온전하시다. 우리의 생각과 다를 때도 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우리가 겪는 이런저런 일들이 때론 버겁고 어려우나 그 일을 통하여, 주가 이루시고 하는 구원이 있음을 알게 한다. 하여 주님의 섭리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서로 뜻이 다르고 생각이 다를 때 그 가운데 주가 계심을 알게 한다. 어떤 일 앞에서도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행 5:12-13).” 누구는 믿고 누구는 오히려 상종을 하지 않는다. 뭐라 이른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어제는 뜻밖에도 대학 때 친했던 동기가 전화를 했다. 어디 지방지 기자로 평생을 사는가보았다. 저의 사투리며 욕지기는 대학 때와 다를 바 없이 여전하였다. 그러면서도 나를 구분하여 ‘니는 환자들 돌보느라 정신없을끼고’ 하면서, 말끝마다 예외를 두었다. 저에게는 믿는 자가 환자나 원수다. 그런 표현을 거침없이 쓴다. 늘 그렇지만 성령이 아니시면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저로 알게 할 수도 없다. 이는 로마서 8장의 주된 논거이다. 로마서에는 '영, 성령'이라는 표현이 서른 번 정도 나오는데, 그 가운데 스무 번이나 그 표현이 8장에 집중되어 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4).” 즉 아주 가끔 저와 통화를 하게 되면 철없이 마냥 즐겁기만 하였던 대학시절로 돌아가는 듯하다. 목소리나 사용하는 어투가 어쩜 그대로인지, 찰지게 이어지는 저의 욕설에도 그리 마음 상하지가 않는다.
다만 은연중에 저를 전도하려 하면 원수니, 환자니 하며 경계를 한다. 그러는 것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뭐라 더 말하려다 그만둔다. 이는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이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6-17).” 덕분에 어제는 저로 인해 로마서 8장이 새삼 귀하게 여겨졌고, 나는 어찌 주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을 수 있었는지를 생각하며 아찔한 느낌마저 들었다. 누가 믿고 안 믿고, 더디 믿고 멀리하고 하는 모든 일에 두고… 오히려 저들을 보며 이제 나는 더욱 주를 의지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오늘도 미스바에 모여 회개하며 수중의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하는 마음이 복이 있다.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행 8:22).” 목사가 되고 참 좋을 때는 안 믿는 친구에게도 은연중에는 주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조심하게 하는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저의 말투에서 원수니, 환자니 하는 소리에 내심 마음이 걸렸지만 저가 알지 못하여 하는 소리라, 오히려 그 심정이 어떠한가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우리의 가는 길은 저들이 흔들 수 없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 예전에 주를 멀리하고 지내던 때의 일이라, 나도 저의 이런저런 말과 그간의 일을 들으며 여전히 그러고 살듯이 내가 전에는 저러했구나, 하는 생각에서 아찔하기도 하였다.
이때 주의 길을 간다는 것은 막연하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오전에 일찍 또 한 친구가 어디 건설 현장에 나갔다가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전화를 했다. 무슨 말 끝에 너는 뭐하냐? 하고 묻기에, 나는 월요일에는 설교 원고 초안을 쓴다, 하고 대답했다. 그럼 내일은? 하고 또 묻자 내일은 참고 문헌이나 주석을 찾고 오늘 쓴 것을 다시 쓴다고 했다. 그럼 수요일에는? 하고 재차 묻자, 그날은 고쳐 쓰고 첨가한다고 하였다. 목요일에는? 다듬으면서 간추린다. 금요일에는? 문맥을 정리하고 오류를 바로 잡는다. 토요일에는? 다시 읽고 이제 출력한다. 그렇게 묻고 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게 나의 한 주간의 일이었구나, 하는 것을 새삼 나도 깨달았다. 그때 친구는 무슨 설교 한 번 하는데 일주일 내내 설교원고만 쓰냐? 하고 되물었다. 나도 저에게, 너는 건물 한 채를 짓는다고 벽돌만 쌓고 마냐? 하고 되물었다. 또한 그게 두 채든 열 채든 해야 하는 일은 같고, 하는 일은 늘 다르지 않지 않냐? 하고 되물었다. 그래도 물러서기 싫었는지, 그래도 그걸 일주일 내내 쓰고 또 쓰고 하냐? 하고 묻기에, 건물 한 채를 올리는데도 설계를 하고, 구청이든 관할 부서 담당자에게 승인을 받고. 요즘은 설계 뿐 아니라 감리까지 하면서 법적으로 하자가 있나 없나 검토하는 일에까지… 내 일이 네 일과 같다! 하고 말해주었다. 본문 한 편에 주석을 찾고, 누구의 서적도 읽고, 어떤 이의 설교도 듣고, 메모도 하고, 검토도 한다. 나도 그런다!
일부러 저의 말에 이처럼 일일이 길게 답한 것은, 말씀을 듣는 데 있어 전하는 일의 수고에 대해 말해주고 싶었다. 곧 성령의 역사라는 게 그저 관념이나 개념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곧 오늘도 성령도 바삐 일하신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27).” 그리하여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21).”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일이 그저 막연하게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일로 그치는 게 아니다.
곧 우리의 믿음이란 감정의 일로 막연한 소요가 아니다. 한 알이 씨앗이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기까지, 땅은 굳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물이 스미고 햇살이 들어 흙과 흙 사이가 헐거워지면서 그 사이로 수많은 미생물들이 동시에 작용을 하고 쉴 새 없이 일을 한다. 이를 성경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8).” 그러는 동안 왜 저 흙이 벌어지는지, 그 사이로 물이 스미고 햇살이 더하여 바람이 들고 나며, 흙은 헐거워져 비로소 썩어진 싹에서 돋아나는 줄기를 밖으로 밀어내어 자라나게 하는지, 우리는 때로 알지 못한다. 어쩌다 내게 이런 일이, 하고 생각되는 우리의 모든 일이 실은 다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의 역사다. 어떤 일은 억울하고, 어떤 일은 원망과 고단함만 거하는 것 같다 해도, 훗날에는 알게 된다.
누가 장문의 문자로 기도를 부탁하였다. 현재 저가 당하는 회사에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데, 그 작은 시골 마을에서의 괴롭힘이라 더 어렵고 힘든 것을 두고, 우리는 수만 가지의 이유가 서로 뒤엉겨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일찍이 중고등학교 시절 소위 말하는 왕따, 은따, 집단 따돌림, 괴롭힘 등을 다 당해봐서 안다. 당하는 입장에서도 수만 가지의 억울함이 있지만 이를 행하는 입장에도 수만 가지의 이유가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아이는 저에게 형제가 여덟이라,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 새엄마와 살고 있었고, 걸핏하면 부친의 폭력으로 시달려야 했다. 곧 모든 일에는 '악의 고리'가 존재한다. 이는 마치 악순환과 같아서 끊을 수가 없다. 그럴 때 우린 겪은 일에만 열중하지 실상은 그 일을 통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하심은 알지를 못한다. 어린나이에도 나는 괴롭힘을 당하면서 그 아이의 사정을 이래저래 알고 불쌍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잠시 저에게 그 말을 들려주며 오늘은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저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것이 복이 되었다. 물론 나의 학창시절은 지옥 같았다. 그래서도 어쩌면 하나님이 싫었고, 대학에 들어가면서 순간 만끽하는 해방감에 실컷 나를 풀어놓았는지도 모른다. 청소년시절, 번번이 나는 조퇴와 결석을 일삼았고, 회피와 의기소침, 무력감은 지금도 고질적으로 나를 괴롭힐 때가 있지만, 그것으로 주를 바란다. 지금은 그것으로 한 영혼- 저 환자, 원수들을 이해하고 돌보는 데 있어 주의 마음을 알겠다. 곧 그때의 교훈이 내게는 큰 자산이고 소중한 거름이 되어, 찬양하는 영혼의 자양분이 된다. ‘모든 게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은 참으로 오묘하고 기이한 하나님의 세계를 담고 있다. 하면 우리의 기쁨은 무엇일까?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시 115:1).
곧 오늘의 이 모든 상황과 사실과 비록 저 악순환의 연결고리에서마저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구원이 된다. 이는 우리가 받을 영광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로 구원을 얻게 해달라는 호소다.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겔 36:22).” 주의 이름이 영광을 받을 때 우리는 가장 값지고 영롱하게 빛난다. 그러므로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3).” 나로 주 앞에 할 말을 잃게 하신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이로써 나의 사명이 규정된다. 예전에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에게 나는 나로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거가 돼야 한다.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68:4).
오늘의 나로 살게 하심은,
어찌하여 뭇 나라가
그들의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115:2).
감히 어디 있느냐? 하고 말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성령으로가 아니면 주 앞에 나올 수도 주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다! 이에,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14:1).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92:5-6).
주가 막으시면 우리로서는 열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인데, 그럼에도 저들 앞에서 주의 살아계심을 증인이 되고 증명이 돼야 하는 것은,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115:3).
이에 산 증거로 사는 일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어찌 누가 막을 수 있겠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누가 나처럼 청소년 시절을 그리 보내고, 특히 초등학교 때는 둔재도 아니고 거의 특수아동으로 저능아 취급을 받아 전학 가는 학교마다 특수학교로 보내라며 받아주지도 않을 정도였는데, 오늘 이처럼 하나님 앞에 그 무엇도 가리지 않고 살게 하셨다! 곧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욥 26:6).” 이는 나의 간증이 되게 하시면서 동시에 내게 보이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하는 영혼을 두고 씨름하게 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물론 나는 그렇다고 완전하다는 게 아니다. 정신과에서 우울증 약과 공황, 불안에 의한 안정제도 타서 먹고 산다. 내 말은 그와 같은 제약이 나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유하게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왜? 시편이 이를 찬송한다. 저의 찬송이 나의 것이 되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33:13).
그것을 오늘 시인은 묘사하고 있는데, 입이나 눈으로(5), 귀와 코로(6), 손과 발과 목구멍이 있지만 아무런 기능도 우리는 발휘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곧 우리 하나님이 아니면 모든 게 바알이고 아스다롯인데 이와 같은 우상은 그저 짊어지고 사는 엄청난 무게의 짐이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4-7).
그러니 저 한심한 것을 두고 씨름하고 힘에 겨워 바동거리며 사는 인생이란 얼마나 더 고단하고 힘에 겨워야 하는 것일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신 주의 말씀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다들, 요즘 어때? 하고 물으면 돌아오는 말은, 죽겠다는 소리다. 그러니 “조각한 우상을 의지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사 42:17).” 우리의 어리석고 우둔함이여,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은장이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렘 10:14).” 그러니 뭐라 이른들,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96:5).
오늘 시인도 이를 증거하는 것이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115:8).
우리 속에도 형상화하지 않았을 뿐 우상이 참 많은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곧
그들이 그들의 탐욕대로 음식을 구하여
그들의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78:18-19).
이는 여전하여서 이스라엘의 광야시절이나 오늘 우리 안의 숱한 의심이나 서로가 전혀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이때 우리와 저들의 확연한 차이는 우리 안에 성령이 두시는 소망으로 판가름 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5-6).” 이를 우리는 영광으로 여기고 저들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소망의 감정이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삶으로다. 살아서 사는 동안에 우리 삶이 주를 나타내야 하는 사명은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 때문이다. 이 소망은 영적인 감정으로 그저 즉흥적이거나 일시적인 느낌으로가 아니다.
곧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의와 평강과 희락, 이는 우리가 이 땅에서 맛보고 느끼고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일이다. 때론 우울하고 슬프고 아프고 힘든 일들이 짓누르지만 오히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하여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신 8:19-20).” 고로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아 너희는 모여 오라 함께 가까이 나아오라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들이니라(사 45:20).”
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진저리친다. 더는 주를 멀리 하지 않기를 주께 빌어 주의 도우심만을 구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15:11).
아, 이 놀라운 말씀만 있으면 더는 무엇으로 두려워할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12-13).
이 복은 정해진 자의 것으로 주를 경외하는 자의 것이다. 이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잠 19:23).” 곧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살 5:31).” 이 복의 기반은 성령으로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소망이 넘치게 하심이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고로,
여호와께서 너희를
곧 너희와 너희의 자손을
더욱 번창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
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로 내려가는 자들은
아무도 찬양하지 못하리로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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