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 당함을 면하게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삼상 5:11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시 113:4
여호와의 언약궤를 약탈한 블레셋으로써는 처지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보다 언약궤를 상징으로 잘못되고 그릇된 숭배 사상의 결과를 치러야 했다. 그런 가운데서 주의 이름은 이방나라 블레셋 땅에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도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오늘 본문은 그 서두부터 블레셋 아스돗 신전의 다곤과 함께 언약궤를 두었다가 저들의 신상 다곤이 파괴된다(1-5). 저들로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고, 이를 함부로 옮겨질 때마다 독종이 재앙으로 내려진다(6-12). 곧 하나님이 힘이 없어 언약궤를 빼앗긴 게 아님을 알게 하신다. 곧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 되심을 말이다.
이를 인정하는 바울의 고백으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오늘의 이 모든 상황과 여건이 주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는 것, 우리가 바로 서지 못할 때 주의 영광이 가려진다는 것,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이는 우리의 의무이면서 동시에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온전하게 살아가는 일,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이로 주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하신다.
행여 그 소행이 바르지 못할 때,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4).” 이것이 주를 의식하고, 주를 바라고 사는 삶이 사명이 된다. 하나님은 가만히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신다. 모세의 기도가 이에 합당하겠다.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내신 그 땅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일 만한 능력도 없고 그들을 미워하기도 하사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하여 내셨다 할까 두려워하나이다(신 9:28).” 곧 오늘 우리의 삶이 그저 나만 어찌 잘 살고 말면 그만인 게 아니라,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나타낸다는 사실, 여호수아의 기도다.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수 7:9).”
곧 우리의 한 날이 주의 이름을 나타내는 데 연결되었다는 것, 그리하여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그러는 것은 우리 안에 두신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환난을 참고 기도로 힘쓴다. 서로를 위하고 남을 대한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12-13).”
세상이 어둡고 그 하는 일이 주를 멀리는 데 있어 문화가 되고 돈이 되고 사람들이 몰리는 일이 되지만 그와 같은 영적 어둠의 시기에도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곧 그러한 때일수록 우리가 더욱 정신 차리고 주를 바라야 한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5-6).”
다곤이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쓰러지고 사지가 떨어졌다.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도금장이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 있고 거기에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사 46:6-7).” 우리가 자처하는 일들로 스스로의 어려움이 깊어진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 17:29).”
우리가 두는 의미부여, 상징물로 인하여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상황이 초래되는 것이다. 어떠하든지 주를 인정하는 것이 우선이지, 우리 손으로 하는 일과 만든 성과로 가늠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곧 우리의 길을 우리 스스로가 어찌 하려 할 때는 상징물이나 표상이 필요하지만, 범사에 주를 인정함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것. 곧 자신의 권리나 주장을 따르지 않고 온전히 주를 바람으로 주를 바라고 참음으로 복음에 지장이 없게 하려는 것,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전 9:12).” 이와 같은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의 삶도 드려지는 것이다.
오늘 날 님비현상과 같이 우리의 집단이기주의가 심화되어 자신들 앞마당에는 좋은 것만, 혐오시설이나 위험시설은 필요하다 해도 다른 집 마당으로 옮겨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이기심이 표를 찍고 당을 고르고 사람을 나눈다. 저들에게 이념이가 가치 따위는 의미없다. 그야말로 이익이 되는지, 내 집 값이 오르거나 내 사업장에 유익을 주는지가 우선이다. 그때는 신앙이고 됨됨이고 그 가치 기준은 모두 쓸모없다. 정치가 그리 쏠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자극함으로 세를 불린다. 집단이기주의가 팽배한 것을 예수님은 아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그러니 누가 죽으려 하나? 필요하다면 남은 죽이고 나는 살아야 하는 게 현실이고 보면, 참 신앙과 올바른 믿음으로 살기란 점점 더 살기 좋은 세상에서는 어려운 게 된다.
일상의 이런저런 일들이 실은 모두 주의 살아계심을 나타나게 하는 것인데, 어떤 이는 어려움으로 또는 더한 비극적인 결말로 자초하기고 하는 것이다. 그러한 결과를 두고 남을 탓할 수는 없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으로 자신을 바로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8).” 자신들의 주장을 드러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부끄러움조차 아랑곳하지 않는 이 시국에 서로를 갈리게 하는 진영논리 앞에서 때론 치를 떤다. 그 뒤에 영원한 멸망을 생각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
오늘 본문에서 사람의 지혜나 그 대책으로는 하나님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8-9). 사람들이 모여 머리를 짠다. 여호와의 궤가 처치곤란이 되었다. 그래서 꾀를 내어(10-11)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 가라.” 하고 새로운 묘책을 내었으나, “옮겨 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하사” 어려움이 현실이 되어 “작은 자와 큰 자”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독한 종기가 나게 하신지라.” 스스로들 어려움을 자초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하고 이를 옮겼다가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이르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 저들이 모여 “죽임 당함을 면하게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그런들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다.”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다는 말씀 앞에서 주춤,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게 된다. 엄중하다는 것은 예사로 여길 수 없이 중하다는 뜻으로 엄하고 위중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오늘 시편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엄중하심, 엄위하심으로 우리를 듣고 깨달아 알게 한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113:1).
그 해결책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묘책이나 어떤 수단으로가 아니다. 우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촉구하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이는 시간적으로 언제가 따로 없다. 영원부터 영원까지다.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2).
곧 매순간, 범사에 ‘어떠하든지’ 주를 찬양하는 것으로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은 주의 것임을 알게 한다. 차마 욥의 고백을 들먹이기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나,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1-22).” 저가 당한 고통을 상상하는 것으로도 숨이 찰 것 같다. 순간 모든 것을 잃고 자식들마저 한 날 한 시에 다 잃고 난 뒤였다. 그러함에도 저의 입으로 원망하지 않는 것은 주를 찬양함으로 그 입을 가득 채움으로겠다.
곧 우리가 하나님의 찬양을 정당화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어떠하든지 지금 그 상황, 그 지경에서도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3).
그러셔야 하고 그러실 수 있도록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아, 이 자주 묵상하는 말씀이 나의 진정한 삶이고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2:27-28).
이 모든 상황이 주의 것임을. 더는 함부로 뭐라 이르지 않고, 저를 판단하거나 주장하지 않는 일,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슥 2:11).” 이를 반드시 알게 하시기 위해 스스로 힘없이 언약궤를 빼앗겨 이방나라 블레셋에 의해 수모를 당하시기도 하는 것이다. 저들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시려고,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10).”
우리의 찬양은 우리의 삶을 돌아 누구는 뜻하지 않은 역경을 통해, 누구는 자처한 고집과 교만의 결과로, 자신도 자기 스스로 함부로 주장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알게 하심이었다. 이를 오늘 시편은 ‘모든 나라’로 함축하고 있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4).
지혜자는 일러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잠 25:6-7).” 곧 스스로 높이면 낮추실 것이고, 스스로 낮아지면 주가 높이실 것이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사 14:13-14).” 나의 일상에서 내 자신이 그러하고, 일련의 상황에서 오늘 날 우리 시국이 그러한 것을 보게 된다. 저마다 자기주장에 함몰되어 도대체 말씀에는 귀를 기울일 기회가 없다. 그러한 때에 오늘 시인은 외친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5-6).
심지어 우리 삶에 구주로 오시기까지 죄 없으시나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기까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이와 같은 주의 은혜로 산다는 것,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그러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것이니, 내가 처한 현실이 ‘진토’라도(왕상 16:2), ‘거름더미’라도(욥 30:19) 거기에서 주를 인정하는 삶,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7-9).
이와 같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는 생이 되게 하시기를.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욥 5:11).” 곧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궁핍한 자는
그의 고통으로부터 건져 주시고
그의 가족을 양 떼 같이 지켜 주시나니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
(107:41-42).
하나님의 결말은 우리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이를 앎으로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9).” 그러므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부디 이것으로 나의 남은 생의 고백이 되게 하시기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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