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전봉석 2022. 5. 18. 05:23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삼상 8:7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시 116:5

 

 

저들이 왕을 원한다. 그 이유는 황당하다.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20).” 결국 남들처럼 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다른 행보를 염려하지 못하였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9).” 없을 땐 있기만 하면 모든 게 행복할 줄 아는데 있음으로 더 큰 어려움이 닥쳐올 것이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다. 곧 “그들이 그 나라와 주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큰 복과 자기 앞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을 누리면서도 주를 섬기지 아니하며 악행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느 9:35).” 사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사무엘은 이를 염려하여 설명한다.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다.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할 것이다. 그 병거 앞에서 달려야 한다. 또 너희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다.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다.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다.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다.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다.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다.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저들은 괜찮다며 왕을 요구한다.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래도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한다. 그저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다.’ 하고 원한다.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고 원한다. 그게 보기 좋았던 것인지… 그에 대하여 하나님은,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7).” 그러니 한 치 앞도 알지 못하면서 저마다 떠들어대는 소리에 때론 현기증이 난다.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사 47:8).” 저들이 참으로 아둔하여 더 무서운 결과를 알지 못하는 것인데,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마치 하나님의 통치만 아니면 뭐라도 괜찮다는 식으로 여긴다. 글방에서 교회가 되고, 선생에서 목사로 바뀌면서 나는 이러한 게 어떤 것인지 알았다. 어느 아이의 엄마는 노골적으로 더는 글방에 보내기를 싫어하였다. 이유인즉 하나님이 싫은 것이다. 여러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지만 저는 내가 ‘종교인’이 되었다는 표현을 쓰며 아이 둘을 그만두게 하였다. 아이들이 순간 사라지고, 친구들이 순간 어려워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때 나는 심한 외로움으로 치를 떨기도 했다. 그러다 알았다. 사람들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말이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그 뒤로 왜 우리는, 세상은 그러할 수밖에 없는지를 알 게 되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뿐인가?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29-32).” 그러니 오늘의 세상이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사람 사이도 좋을 때나 좋은 것이지, 옳은 말, 싫은 소리 한 번이면 졸지에 원수가 된다. 누구도 감히 서로를 충고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 일은 우리 스스로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예수님도 이르시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게 우리 자신이고 서로를 돌봄이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진정할 수가 없다. 위하고 들어주고 그저 그 비위를 맞춰줄 때나 ‘좋은 사이’다. 의견을 달리하면 졸지에 원수가 되기 십상인 게 사람이다. 저들이 왕이 어떤지, 저 스스로 신격화하는 일이 얼마나 하나님을 능멸하는 일인지 모른다. 나는 역사를 잘 모르지만 한 가지 참 다행이다 싶은 것은 조선이 망한 것이다. 왕과 신분제도가 없어진 것이다.

 

성경은 이를 밝히셨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2-14).” 곧 하나님의 자녀로 누리는 그 자유함에 대하여 억압을 당하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모르는 일인가보다. 오늘 시편이 이를 알게 한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116:1-2).

 

말씀과 현실은 다르다. 이론과 실제가 다른 것처럼 때론 그로 인하여 갈등하고 좌절할 때도 있다. 한데 우리는 믿음으로 그 빈자리를 채워야한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믿음으로만이 우리가 견고할 수 있다. 주를 바람이란 주의 영광을 위하여 주가 능히 행하실 것을 확신하는 일이다. 곧 이 일을 시작하시는 이는 주님이시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고로 우리는 주께 아뢴다. 나의 비장의 무기는 기도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곧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욘 2:7).”

 

밤늦게 누구의 문자가 들어왔다.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을 때면 미주알고주알 기도를 부탁하는 친구다. 새벽에 앉아 말씀 묵상 전에 보니, 이런저런 말끝에 하나님이 ‘기도하는 친구’를 주신 데 감사하고 있었다. 그런 소릴 들을 때면 나를 더욱 돌아보게 된다. 부디 저의 삶이 저의 영혼으로 평안하게 하시기를.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3-4).

 

저의 문자 뒷부분에는 ‘죽은 엄마가 늘 자신을 기도해주었는데, 하나님이 그런 친구로 주심’을 감사하고 있었다.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강력한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이는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약속이시다. 이와 같은 직접 통치를 포기하고 왕을 요구하는 오늘 이스라엘의 아둔함에서 내 안의 무력감이나 답답함을 동시에 느낀 것도 그 때문이다. 하나님께 기도할 생각은 못하고 한숨과 넋두리로 일관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어떤 어려움을 앞에 두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이와 같은 놀라운 은혜와 특권을 저들이 알지 못함이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50:15).

 

우리가 주를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오직 한 길,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116:5).

 

어려움 가운데서도 이와 같은 고백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살아가는 일, 친구가 나를 두고 고마워하는 것이겠나? 주의 마음이 저의 속에 함께 하시기를 위하고 기도한다. 이는,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6-7).

 

기도함으로 더는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주가 알아서 하실 것이고, 그것이 설령 나를 더 곤란한 지경으로 몰고 가는 것이라 해도…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8).” 더 귀하고 더 나은 것으로 더 좋게 하시려고 주가 그리하심을. 주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우리로 이 땅의 멸망에서 건지시려고, 더는 악한 길로 가지 않게 하시려고,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8).

 

이를 더욱 예민하고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삶이 복되다. 우리의 간절함은 단지 이 땅에서 남들처럼 사는 게 아니다. 어제도 막내 동생이 새벽예배 마치고 어디 일 때문에 가다 들렀다. 오전에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있어서 그 있는 것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이 많다는 것에 놀란다! 누가 어떤 부자인데, 저는 있음으로 신앙이 엉망이다. 누군 또 어떤 일을 하는데 그 일이 잘 돼서 하나님을 등기지도 한다. 그러니 그게 다 허사다. 헛되고 헛될 뿐이다. 아주 잠깐 그것으로 행복했을까? 주께 감사하기는 하였을까? 곧 건강을 잃고 또는 더 큰 가난과 절망이 닥쳐서야 잃어버린 주의 이름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 우리의 무능함이란 이 땅에서 잘 되고 못 되고를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주를 바로 알지 못함이, 나와 주의 관계를 바로 설정하지 못함이 저주였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이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인가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6).” 나중에야 알고 후회할 때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9).

 

아, 이 놀라운 시편이 내 것으로 항상 내 삶을 주관하시기를 기도한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것이 가장 크고 귀한 복이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하여 항상 주와 함께 함으로,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어느 날 나는 죽었고, 어느 날 나는 살았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와 같은 고백을 내 것으로 알고 삼고 붙들고 살아가는 일보다 복되고 귀한 게 또 있을까?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

내가 놀라서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10-11).

 

그럴 때에도,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12-14).

 

오늘 시편의 구절구절마다 우리로 기도의 모범을 보이는 것 같다. 헛되고 무력한 사람으로, 또 헛되고 무력한 사람을 의지하며 사는 일이란 게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부디 사람 볼 거 없다. 서로 의지할 것도 없다. 그러려니 우리가 사람이니 그러려니 하면서 위로하고 불쌍히 여기며, 부디 저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영혼의 여유를 잃지 않고 살기를.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118:8-9).

 

고작 이 나이쯤 살고도 조금은 알 것 같다. 어제는 가정예배를 드리고 아내가 어느 아이 이름을 말하며 기억하는지 물었다. 인천으로 오고 초기에 글방에도 왔었다는데 나는 기억이 없었다. 그때 무슨 일로 아이끼리 싸우고 그 일로 엄마들이 시비가 붙더니 급기야 공부방을 다 같이 그만두면서 욕을 하고 관두었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그 애들 가운데 한 아이 엄마가 전화를 했단다. 그리곤 아이가 벌써 중3이 되었는데, 하고 다니는 짓은 물론 공부를 작파한지 오래라며 한참을 하소연하다 눈물까지 흘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보낼까 한다는데, 아내는 싫은 마음이고 그때도 그렇지만 억울한 마음도 있는데… 이를 우리는 마다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해주었다. 모질게 떠나는 사람들을 붙들 수도, 다시 오겠다는 사람을 마다할 수도 없는 것이다. 주의 일이란 때로 우리를 한계에 직면하게도 하신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지금 오는 아이 중에도 점점 더 말투며 성질이 고약한 아이가 있다. 나는 참다못해 성질을 내곤 하는데, 아내는 궁싯거리면서도 그 애와 그 애 엄마를 불쌍히 여긴다. 여기서도 못 가르치겠다고 돌려보내면 저들이 갈 곳이 없다. 가는 족족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쫓겨나기 일쑤라, 벌써도 마음이 한참 상한 경우라.

 

그럴 때 우리가 이를 악 물고 할 수 있는 일은 주의 마음으로다. 주의 사랑이 아니면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 애도 애 엄마도 시쳇말로 싸가지가 없는 데는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는데, 그런 우리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사랑하시는 주의 사랑이 아니면… 그러므로 우리가 구하는 것은 주의 권능으로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15).

 

그저 감사로 제사를 삼고 주가 내게 향하신 사랑으로만이 한 영혼을 주의 마음으로 사랑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아니면 우리가 우리를, 서로를 무슨 수로 사랑할 수 있으려나…. 이와 같은 무던함이 주가 보시기에 귀중하였고, 주의 영광으로 여기시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우리를 지으셨고 오늘 여기에 머물게 하심이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그러므로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일은,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100:4).

 

이는 사명이고 우리의 본분이다. 오늘 시인도 이를 우리로 알게 하려 하심인가.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16:16-17).

 

곧 나의 한 가지 할 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신 8:10).” 오직 주로만, 주만 생각함으로, 주로 인하여 맡기신 날들을 채워가는 일,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15:4).

 

곧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민 30:2).” 이를 오늘 시편은 결론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

(116:18).

 

이는 내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살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게 하려 함이다. 누구를 사랑하고 어떤 이를 이해하고 용납하는 데는, 주의 마음이 아니면 감당이 안 되는 것을 인정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2-3).” 누구를 염려하고 생각하는 일이 사소한 일이나 이와 같이 엄중한 사실을 안고 있음이었다. 부디 주가 맡기신 날 동안 주의 영광이 되게 하시기를.

 

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곧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지키리로다

할렐루야

(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