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삼상 10:6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18:28-29
사무엘 선지자는 마지막 사사로 신정통치의 시대에 막을 내린다. 사울은 왕정통치의 초대 왕으로 세움을 받는다. 개인의 직분과 사명은 하나님이 더하신다. 바울도 스스로는 전에 ‘훼방자’로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또한 ‘죄인 중의 괴수’로,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15).” 또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8).” 또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 15:9).” 자신을 괴로워하였다.
오늘 사울은 왕으로 세우심을 받으며 그 영이 새로워지는 것을 본다.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삼상 10:5).” ‘새 사람이 된다는 것’ 곧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6).” 하는 말씀에서 거듭남도 주의 역사로 새로이 부여되는 사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를 다시 바울의 고백으로 가져오면, 하여 저는 다른 사도보다 수고했고 그것이 은혜였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우리가 받는 직분에 대해, 이와 같은 소명의식이 없다면 어찌 이 귀한 사명을 다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이는 모두 우리 뜻이 아니라, 영원 전 예수 안에서 이미 더하신 은혜인 것을 묵상하게 된다. 더도 덜도 말고, 사울이 처음 마음 그대로 그 직분을 감당하였어도 좋았을 텐데. 심지어 저는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었느니라.” 할 정도로 자신의 쓰임에 몸 둘 바를 몰라 하였었다(삼상 10:22). 주의 일을 감당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도구’로써의 소명의식이 우리를 얼마나 겸비하게 하는지,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다만 주가 쓰시는 그릇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일찍 눈을 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앉는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앉으면 말씀을 더 오래 또 다양하게 찾아보며 묵상할 수 있다. 나의 하루가 이 시간으로 집중된 것을 감사히 여긴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하는 일도 없지만, 그래서도 주의 사역을 감당한다고 할 수도 없는 걸 잘 알지만… 누가 출근 전에 어떤 어려움을 두고 사연을 적어 보낸다. 그리고 기도를 부탁한다. 그럴 때면 적절한 말씀을 떠올려 주의 위로를 건넨다. 이런저런 사정이 늘 우릴 옥죈다. 숨을 틀어쥐고 있는 것 같다. 사는 게 다들 늘 힘겹다. 한 아이는 점점 되바라져 이제는 막말을 하며 버릇없이 군다. 나는 참다못해 인상을 쓰면 아내는 ‘아픈 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 엄마의 심정은 오죽하겠어?’ 하고 핀잔을 준다. 그러게, 주의 영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나의 수고는 모든 게 허사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성령으로가 아니면 이 일은 무의미하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 나에게도 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그러니까 일련의 이런저런 일로 우리가 누구인가를 되짚어보게 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기도, 그럴 수 있는 능력, 내 안의 주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만 가능한 일. 그러므로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6).” 나는 내 의지로는 할 수 없지만, 나로 하게 하시는 이가 내 안에서 함께 하신다.
사울의 처음, 저는 짐보따리 뒤에 숨을 정도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 일이 어느 순간 감투가 되고, 권력이 되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두려운 마음으로 되새기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곧 저를 보면서 나를 마주한다. 누구에게도 말했듯이, 곁에 붙이는 이가 실은 다 나였다. 이제 느끼겠지만 저의 미운 짓이 내 모습이고, 들춰보고 싶지 않은 나의 지난 모습이다. 이를 느끼면 느낄수록 싸움은 더욱 맹렬해진다. 희한하지? 스스로 허물과 죄가 크게 여겨지면 여겨질수록, 보내시는 이로 주를 찾게 된다. 가령 아내에게 누구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아내는 대뜸 ‘당신이네, 뭘!’ 하고 일갈한다. 그 맹렬함이 내 안에서 찬송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여호와께 구속 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사 51:11).” 더러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때, 나의 옛 이야기가 때론 슬프고 어려울 때, 그것이 오히려 찬송이 되고 감사하는 기회가 된다. 이를 오늘 시편이 노래하고 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18:28-29).
이 시는 공교롭게도 다윗이 사울을 피해 극심한 고통을 겪고, 비로소 왕 위에 오르면서 부른 노래다. 곧 금방 읽은 시구는 하나님께 대한 결단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감사와 찬송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 토대가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다. 오늘의 이런저런 우리의 고통이 주의 선하신 뜻을 기초로 한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18:1).
이를 함께 따라 부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복된 신앙은 없다. 어려운 중에 고통 가운데서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송할 수 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63:1).
다윗이 사울을 피해 유다 광야를 떠돌 때에 지은 시라니! 시를 읊조리다보면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누가 어떤 어려움을 어렵게 토로할 때, 저가 나를 친구로 또는 그저 아무개로 여긴다면 어찌 그런 소릴 할 수 있겠나? 그 속에 차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수십 년을 쌓아두고 살았을 고통스러운 이야기에서 저가 주를 인정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그래서도 나는 누구의 하소연이나 슬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함부로 흘려듣지 못한다. 루이스 세플베다의 소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노인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는 꾸부정하게 아마존 강을 내다보며 창가에 서서 ‘억장이 무너지는 사랑 이야기’를 읽는다. 저의 고집스럽고 유일한 위로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바로 알기란, M. 퍼시그의 <선을 찾는 늑대>처럼 홀로 떠도는 길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다.
주의 인자하심이 말씀 안에서 유효하다. “네가 그의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내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출 23:22).” 하나님이 내 편으로, 나를 대적하는 것들을 대적하신다. 이를 위해 누구의 ‘어려운 말’에 나는 마음을 기울인다. 저의 사연에서 나의 이야기를, 나의 사연에서 주의 말씀을 청종한다. 그 구원,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한다. 이는 엄연한 ‘사랑의 빚’이다. 사랑에 빚진 자로,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이제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118:2-3).
오늘 시편은 지속적이어서,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30:12).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145:1).
어쩌면 오늘의 사울이 왕으로 세우심을 받은 것은, 훗날 다윗의 이 놀라운 찬송들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나에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되었다. 치밀하신 섭리다. 위급하고 어려울수록 주를 의지하고 하나님만 붙들게 하시려고,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118:4-5).
참으로 절묘하다. 어느 것도 허투루 스쳐가는 게 없다. 창밖으로 상현달이 높이 떴다. 수천 년 전 어느 날 유다 어느 광야에서 혹은 수풀더미 후미진 곳에서 몸을 숨기고 다윗이 올려다 보았을, 그때 그 심정을 메모하고 떠올려서 오늘의 시를 지었을 것을 생각하면 벅차다. 수천년이 지난 오늘, 새벽에 일찍 일어나 턱을 괴고 앉아 다윗의 시를 웅얼거리다 그때를 상상한다. 그리고 오늘 내 곁의 이런저런 이의 사연을 떠올린다. 나의 말 못할 어려움을 되새긴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의 고백이 그러했을까?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 2:2).” 문득 이 모든 게 하나로 연결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연관이 있다는 데서 놀란다. 주의 성실하심을 생각한다. 그럴 때면,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118:6-7).
언어와 언어가 서로를 마중하는 것 같다. 수천 년 전 다윗이 올려다보았을 저 하늘, 오늘의 내가 바라다보는 저 하늘에 걸린 상현을 보며, 두려움을 없앨 수는 없지만 견딜 수는 있겠다. 함께 느끼는 동질감으로도 말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16).” 이를 히브리서는 ‘허다한 증인들’로 비유하여,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이사야도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이와 같은 고백이, 그 언어와 언어가 어느 가까운 훗날에 우리가 함께 모여 주 앞에 서서 한 목소리로 읊조릴 찬송이 된다는 것. 곧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30:11).
반드시, 그와 같은 날에 우리는 주께 찬송하며 서로를 알아볼 것이다. 이를 오늘 시편은 은유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118:8-9).
그리하여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어떤 도움을 저들에게서 얻고자 하지 않았다. 서로의 고백은 내가 나의 이야기로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고, 저가 보여주는 살아가는 이야기로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들려준다. 이는 우리의 노래면서 다윗의 시다.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9:9).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91:9-10).
곧 우리가 주를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다. 주의 이름을 알고 이를 부를 때 주의 역사는 멈추지 않으신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4).” 이는 지존자, 전능자,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아무리 상황이 어떠하다 해도,
그들이 벌들처럼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 같이 타 없어졌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너는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는 나를 도우셨도다
(118:12-13).
이와 같은 체험이 나의 주관적인 게 아니었다. 모두의 공통된 고백이었다. 계통을 거슬러, 수천 년 전의 다윗의 어느 날이었고, 요나의 어느 날이었고, 한나의 어느 날이었고, 야곱의, 아브라함의 어느 날의 찬송이었다. 그때마다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신 28:7).” 이 말씀을 오늘 아침, 누구에게도 들려주어야겠다. 그러니 저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것들로부터 주눅 들지 않기를. 피하여 도망치지 말기를. 곧 우리의 능력은 주의 권능이라는 것을.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28:7).
하면,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곧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118:14).
이와 같은 찬송과 고백이 우리의 남은 날들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는 사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모두가 모여 <천 개의 바람이 되어> 노래를 부르는데, 나는 그 프로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나의 아저씨>에서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야!’ 하고 말해줄 수 있어 고마움이 또 눈물이 흘렀다. 우리는 반드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10).” 하고 외칠 것이다.
의인들의 장막에는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
(118:15-16).
이를 삶으로 삶의 한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가는 나라, 그 길의 여정에서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히 11:33-34).” 어찌 그럴 수 있는지는 일일이 다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으나,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118:19-20).
도저히 아무도 열 수 없는 그 문이 우리에게는 열려 있었다. 그러므로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그러할 때 우린 환난 가운데서 기뻐함이 곧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앎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 이에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아,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놀랍고 시끄럽고 가까운 일인지!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118:21-23).
이를 내가 이제는, 확신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비록 더디고 어눌하고 때론 빙충맞다 해도,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내 수고, 내 노력으로였어야 했다면 어쨌을까?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하면,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그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으니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118:25-27).
그저 되새겨 다시 읽고 또 돌아봐도 은혜뿐이다. 내가 한 게 아니어서 다행이다.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겔 20:12).” 주를 기리며, 나의 하찮은 지식과 글쓰기로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묵상글을 쓰고, 누구의 말에 위로를 말을 남기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면서…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그러니 다만 무던하여서 묵묵히 이 길을 끝까지 가게 하시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18:28-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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