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전봉석 2022. 5. 21. 05:22

시편 119편 -1

1-16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심상 11:14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시 119:9

 

 

야베스를 치러 암몬이 들어왔다.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작은 딸에게서 낳은 아들 벤암미의 후손들이다. 큰 딸이 낳은 족속이 모압이다(창 19:36-38). 근친상간으로 그 계보가 이어져 두고두고 이스라엘의 가시로 존재하는 족속들이다. 저들의 공격은 참람하여 눈알을 빼거나 임산부의 배를 가르는 가혹한 짓을 하고 다녔다. 악의 열매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말해준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단지 누구 이야기가 저로 끝나는 게 아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마 7:16-17).” 결국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그러니 성경이 금하고 말씀이 경고하는 덴 다 이유가 있다.

 

일찍이 아이들을 상대하다보니, 늘 보면 아이가 좀 어렵다 싶을 때 영락없다. 그 부모와 부모의 부모로부터 이어져 온 죄의 열매가 엄청나다. 사탄은 동일하게 존재하고 역사한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 2:4-5).” 저의 일은 어디서나 악으로 달려간다.

 

이를 경험했던 베드로는 더욱 더 절박하게 전한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 이런저런 사연을 듣다보면 차라리 어려울 때가 또 나았다. 날마다 교회로 올라와 엎드려 주 앞에 고하던 날들이 있었다. 비록 가난하고 장래가 여의치 않아 암담한 상황이었으나 그것으로 주를 찾고 고하던 시절이다. 적당히 살만해보고 가뜩이나 코로나까지 터지면서… 듣다보면 문제없는 가정이 없으나 그 정도와 대치하는 능력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2).” 정도의 차이는 의미가 없다. 각자의 문제가 가장 절박한 것이어서, 누구는 기어이 자식들로 일이 터져 자기 문제와는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화인을 맞은 양심의 특징은 교회를 멀리한다. 하나님 두려워하기를 사느라 드는 비용보다 가벼이 여긴다. 먹고 사는 게 우선이라, 당장의 이익에 영혼도 팔 것 같다. 보다 못해 여호수아가 외쳤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뭐라 이르면 노여워하다 피하고 이내 돌이킬 때는 더 큰 문제로 씨름하다 기진하여서이다. 그나마 주를 찾는 게 복이라면 복일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주께 맡기지 않으면 않은 만큼 본인들이 짊어지고 사는 법이다. 별 수 없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이처럼 말씀 붙들고 말씀으로 씨름하는 것이 유익인 까닭은 스스로 얻은 대책이란 게 부친을 술 먹여 두 딸이 번갈아 가며 임신한 결과 모압과 암몬이 자자손손 주의 자녀들을 대적한다. 잔악하기 이를 데 없다. 오늘 말씀에서 우선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삼상 11:2).” 하는 요구에게 입이 쩍, 벌어진다. 유예기간을 두고 이를 허용하는 야베스, 이스라엘의 장로들도 어이없다. 구원병이 온다면 모를까 안 오면 그리하겠다는 소린데… 이를 요구하는 나하스나 이를 받아들이겠다는 야베스나 다들 참 악의 끝을 보여주는 것 같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21).” 어제 설교원고를 정리하다, 새롭게 첨가한 내용이기도 하다.

 

스스로 자신을 내버려두는 결국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 그 사는 게 고약하다. 저들의 특징은, 첫째, 스스로 옳다 여기는 자이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1).” 둘째, ‘술 한 잔’으로 스스로 위로를 삼으려는 자이다.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2).” 셋째, 옳지 못한 관행을 따르는 자들이다.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23).” 이 모두는 자신의 판단으로 결국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지, 하고 허용한 작은 틈새가 벌어져서 결국은 거대한 댐도 무너뜨린다. 스스로 믿음이 좋은 줄로 여기는 자의 특징이 어쩜 그리들 닮았다. 저들의 처음 발단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 작은 불씨에서 시작되었다. 안 믿는 자의 돈을 받고 덩달아 부유해진 누가 있다. 그 종자돈으로 저들처럼 주식에 뛰어들고 나름 엄청난 이문을 남기기도 했다. 또 누구는 땅을 사고 되팔면서 몇 년 사이 부자가 되었다. 그러느라 교회는 멀리할 수밖에 없고, 믿는 자들과의 사귐도 끊어진지 오래다. 그러는 동안 아이 둘이 자랐는데 정신과를 들락거리며 산다. 하나는 그 부모를 보지도 않고 멋대로 몸을 굴리며 산다. 돈을 모아 남부럽지 않게 산다 싶었는데 그의 품에 자식들은 영육간이 망가진 지 오래다.

 

이때 사울의 등장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랐다. “사울이 이르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13).”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우리의 생각을 능가하신다. 자신을 반대하던 비류를 죽일 수 없다는 사울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에 가 닿았다. 이와 같이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40:8).

 

곧 사무엘이 백성들을 모은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삼상 11:14).” 지금까지 부족 동맹 체제를 접고 왕정통치의 시대를 여는 것이다. 본래 저들은 길갈에 열두 개의 돌을 포개어 가나안에 첫 발을 내딛은 적이 있다. “여호수아가 요단에서 가져온 그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수 4:20).” 저들은 주 앞에서 할례를 행함으로 하나가 되어 시작하였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5:3).” 사무엘은 이와 같은 사실을 상기시키며 저들이 잊고 살았던 자신들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우리가 무엇보다 주를 가까이 하며 사는 것이 복이라는 사실. 행여 그것이 돈으로 또는 세상에서 추구하는 가치와 기준으로 함몰되었다면 바로 세워야 한다. 이를 다시 일으켜야 한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성경의 외침은 늘 한결같다.

 

이를 오늘 시편으로 정리하면, 잠시 망설이다 시편 119편은 그 내용이 길고 이채로워서 이번에는 조금씩 나누어 묵상하려고 한다. 176절의 내용을 각각 8절로 22연을 구성할 수도 있어, 이를 여러 번 나누어 며칠에 걸쳐 묵상하려 한다. 오늘은 그 첫 날로 나의 신앙, 우리의 마음가짐이 어떠한가를 돌아보게 한다. 곧 말씀으로 붙들려서 사는 게 복 중의 복이라는 것인데,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19:1-2).

 

그처럼 갈망하고 사는, 복에 대하여. 과연 우린 이를 무엇에 두고 어떤 것으로 복을 삼아, 이를 어찌 간직하며 살고 있는지.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자신을 깨끗하게 하며 사는 길은 말씀 앞으로, 주 안에서, 성도의 교제가 끊이지 않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길,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나는 이를 위해 부지런히 성경을 뒤적인다. 누구 이야기를 들으면 성경에 비추어 하나님의 뜻을 살핀다. 그러려고 애쓴다. 아니면 내가 무슨 수로 나의 행위를 온전하게 할까? 온전하다 하시는 이 앞에 늘 서는 길밖에.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신 7:12).

 

참으로 그들은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3).

 

말씀이 나를 붙드심으로, 혹여 죄를 범하면 즉시로 찔려 그 양심이 괴로워하는 것에 집중한다. 무뎌지면 가망이 없다. 앞서 누구의 이야기를 실은 자세하게 기술하기 어려운 것은 그럼에도 저들 부부는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싫어한다. 자식들이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돈으로 어찌 해결하려 하고, 그러느라 서로 싸움이 잦고 이혼을 하네 마네 이틀이 멀다하고 서로가 시빗거리가 되면서도… 별 수 없는 일이다. 주의 영이 아니시면 저들을 어찌 돌이킬 수 있는 방도가 없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8-10).”

 

주께서 명령하사

주의 법도를 잘 지키게 하셨나이다

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4-5).

 

나는 오늘 말씀에서 나에게 더하신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를 꼽으라면 주 앞에 엎드리게 하신 일이다. 더는 내 의지로 어찌 살아보려 더는 세상을 기웃거리지 못하게 하신 일이다. 누구와 통화하다, 나는 나의 오늘을 두고 주 앞에 고쳐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불안이나 공황, 뭐라 붙이든 나의 지금이 나로 하여금 주를 갈망하게 하고 더욱이 내 곁에 두시는 이와 같은 이들을 주의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시는 계기가 된다. 비록 말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늘 나를 억누르는 게 사실이지만, 내가 낫고자 할 때 내 곁에 두신 이의 아픔이 그렇게 또 멀어지기도 한다. 이것으로 내가 이처럼 주의 말씀 앞에 목말라 하는 것,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 말씀이 제일이다. 다른 무엇보다 이를 갈망할 수 있는, 나의 고통이 나의 은혜다. 이것 때문에도 주 앞에 엎드린다.

 

나는 다음의 시편들과 같은 심정으로 아침마다 말씀 앞에 나를 앉힌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27:9).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71:9).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18).

 

나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실까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내가 주를 멀리하게 될까봐 두렵다. 적당함이 또는 넉넉함이 혹은 고통이 또는 즐거움이 행여 무엇이라도… 내가 아는 나는 그리 의지적으로 주를 따를 자신이 없다. 하여 나의 고통이 나의 은혜다. 어디가 아플 때, 무슨 일로 힘들 때, 누구 때문에 마음이 쓰여 진정이 안 될 때, 나는 죽을 것 같아서도 주 앞에 엎드린다. 아침마다 죽어라 하고 눈을 뜬다. 오늘도 두 시 경에 눈을 떴을 때 일어났어야 하는데, 시간을 확인하고 잠시 돌아누웠다가 알람이 한참 진동을 하는데도 몸이 가라앉는 것 같아 어느 순간 화들짝 하고 놀라 앉았다.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6-8).

 

말씀 앞에 나를 세움이 가장 나를 안전하게 한다는 것을 이제는 잃어버리지 않고 싶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나는 이제 죽어도 이를 놓칠 수 없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9-11).

 

말씀으로밖에 다른 길을 나는 모른다. 알려고도 들으려고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누가 어떻게 사네, 어쩌네 하는 말들도 부럽지가 않다.

 

찬송을 받으실 주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입의 모든 규례들을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길들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들을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12-16).

 

됐다. 이렇게 살다 죽자. 더는 다른 데 기웃거리지 말자. 늘 내게 다짐하고 또 붙들어 세우는 마음이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147: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