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를 송축하라

전봉석 2022. 6. 12. 04:54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날 수는 칠 년 육 개월이더라

삼하 2:11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34:1

 

 

헤브론을 예루살렘으로 천도하기 전의 일이다. 앞서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고 저들의 시신을 수습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축복한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위에 오른 것은 사무엘에 의해 기름부음 받은 지 15년만의 일이다(기원전 1010년). 다윗은 사울이 아직 건재할 때에 다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삼상 16장). 그 이유로 사울의 견제와 핍박에 쫓겨 망명생활을 하였다. 다윗은 이전에라도 사울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를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죽음의 목전에서도 저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였다.

 

사울이 죽고 헤브론에서의 7년 6개월 동안의 왕위는 아직 여러 이스라엘의 지파가 저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사울가의 일족들이 권력을 쥐고 다윗을 대적하였고, 다윗은 때를 기다리며 서둘지 않았다. 그러나 사울의 군장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고, 마하나임 정부를 세움으로써 한동안 다윗의 신복들과 대립관계를 형성하였다(8-11).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일은 더디고 때론 멀기만 하다. 그럼에도 주를 인정하는 것이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이다. 사울은 이를 참지 못하고, 스스로 제사를 드렸고(삼상 13:8-12),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얻어내기 위해 신접한 여인을 끌어들이기도 하였다(28:7-8). 상대적으로 다윗은 고국의 사정까지 하나님께 여쭙고, 주의 주권 아래에서 기다리는 데 있어 온갖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주를 경외한다는 일은 단지 굳은 마음의 일로 전부가 아니라 실제 삶에서 고달픔을 견디는 일이다. 이때 주의 뜻을 알고자,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하는 것이 성경의 이치고,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전 3:14).” 하심이 우리 삶의 실천이 된다.

 

왜 그래야 할까? 다윗은 엄연히 이에 따른 산 증인이다. 먼저 우리는 주의 청지기일 뿐이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 24:45-46).” 종의 본분은 주인의 뜻을 살피고 따르는 일이다. 사탄의 공격은 미혹에 빠뜨려 하나님의 뜻을 앞서게 한다. 스스로의 명분과 신념을 내세워서 말이다. 이는 사울의 사례로 알 수 있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대상 29:11).”

 

우리 안에 선과 악이 한데 있다.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떤 일을 두고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주의 뜻을 우선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도 기도하며 주의 뜻에 가까이 나아가셨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우리가 주의 뜻을 산다는 것, 훗날에 다윗은 이와 같은 기도의 시를 남겼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143:10).

 

아니면 단 한 순간에 무너지고 휩쓸릴 수 있다. 세상은 혼미하고 우리 마음은 어지럽다. 때론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분별하기가 어렵다. 그래서도 순종하는 자세는 매순간 연마가 필요하다. 오늘 본문 1절은 다윗은 이와 같은 자세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다.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주께 여쭙고 주의 답을 구하고 주의 뜻을 알고 행한다는 것,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40:8).

 

어떤 일을 두고 우왕좌왕 할 때 주의 법을 심중에 두고 이를 결정하기란 몸에 밴 훈련의 결과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내가 자주 되뇌며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내용은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말씀에 붙들려 살게 하옵소서.’ 하는 것이다. 나의 삶도 내가 아뢰며 중보 하는 모든 대상도 그러하기를. 이는 마땅한 성도의 도리이고 삶의 주축이다. 주를 중심에 모시지 않은 모든 일은 위험하다. 자칫 그릇 행하고, 아차, 싶을 땐 이미 저지르고 난 뒷일일 때가 많다. 하면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 4:15).” 보자, 우리 안엔 여전히 악이 도사리고 있다.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16).” 누가 그럴 사람인 줄 알았나? 하고 놀라워할 때는 이미 늦은 때일 수도 있다. 해서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나중에, 더 나은 때로 미루는 것은 악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17).”

 

이럴 수 있는 근거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 새 힘을 얻는다. 오늘 본문에서 헤브론은 아브라함의 거주지였고 저의 묘가 있는 곳이다(창 13:18, 23:2, 수 15:13-15). 유다 지파의 중심지이고,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나올 것이란 야곱의 예언이 성취되는 곳이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유다 지파에서 치리자가 나올 것을 모세의 예언이 응하는 일이기도 하다. “유다에 대한 축복은 이러하니라 일렀으되 여호와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의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 그의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주께서 도우사 그가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신 33:7).”

 

말씀은 응하고 이내 모든 계시는 이루어질 것이다.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10).”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수시로 여러 구절의 말씀을 찾아 그 증거를 삼는 것도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55:11).” 결코 나는 나의 이 시간이 헛되지 않음을 안다. 곧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12-13).”

 

세상은 점점 요지경이라, 초등학교 교사를 맡고 있는 친구는 자신의 자리에 경계선을 긋고 아이들과 접촉을 최소화한다고 했다. 자칫 서로의 앞뒤가 다른 것이 오늘 날 아이들이 영악해서가 아니라, 죄악이 관영함으로 서로가 언제 어떤 태도를 취할지 알 수 없음이다. 관영하다는 것은 가득하다는 것인데, ‘에이 설마’ 할 때 사탄은 그 틈을 노린다. 함부로 아이를 바라봐서도 손을 대거나 나무라서도 안 된다. 언제 나는 아내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아이가 엄마와 손잡고 있다 나를 올려보고 웃길래, 어찌나 예쁜지 주머니 속에 있는 사탕을 꺼내어 주려는데 아내가 얼른 말렸다. 서로가 점점 무서운 세상이다. 이때에 우리가 바랄 것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그러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하고 우리 주님은 위로하신다.

 

이래저래 삭막하고 어지럽다. 세상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그래서도 우리가 주의 말씀을 더욱 바라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주가 행하실 것이다. 어제도 무슨 일로 저들 부부가 다녀갔다. 워낙에 바삐 서둘러 점심만 간단히 먹고 헤어졌다. 늘 바쁘고 번잡스러운데 나만 느긋하고 느린 것 같아, 아내는 때로 그런 나를 뭐라 한다.

 

오늘까지의 본문에서 다윗의 느긋하고 느리기까지 한 저의 일을 두고 생각한다면 너무 한가로운 것일까? 세상은 점점 조급해지고 그에 따른 성급함이 다급해지면 상대를 곤혹스럽게 몰아세우기도 한다. 서로의 여유로운 마주함이 결여되었다. 진득하니 한 이야기를 두고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잃었다. “이로 말미암아 땅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어두울 것이라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거기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렘 4:28).” 곧 말씀은 이미 말씀하셨고, 여러 인물과 사건을 통해 경고하신 바이다. 한데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이것이 우리의 의다. 다윗의 의가 되었다. 저는 앞서 사울을 처단할 수 있었고 이미 주어진 명분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저는 망명을 자처하였고 사울의 핍박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이는 단순히 힘과 권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결코 느리거나 느긋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가장 적극적으로 신뢰함이었다. 주가 이루실 줄 아는 것으로, 먼저는 나와 우리 가족의 참여로 이루어진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오늘 다윗도 같은 것이다.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 때에 또 자기와 함께 한 추종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다윗이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읍에 살게 하니라(2-3).” 남들은 어떻든지, 세상은 어떠하든지, 모두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눅 8:39).” 나와 우리 가족, 그 작은 단위의 구성원이 하나하나 더해져 주의 나라를 채워간다. 서로가 지지고 볶고 싸우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이때에,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8:17).”

 

하나님의 적당한 때를 기다린다는 것,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9-10).” 누구 뭐라 할 것 없고, 세상 어쩌고 할 것 없다. 자기 믿음, 자기를 사랑하는 일 하나 바로 행하는 것이 중요한 시절이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 10:12).” 어쩌니 저쩌니 남을 두고 뭐라 하기에는 세상의 죄가 너무 관영하다. 아이들도 영악하고 무섭다. 다만 주 앞에 설 때 우리는 각자다. “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6-8).”

 

공연히 휩쓸리고 자기 공명심에 사로잡힐까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다윗의 헤브론 8년여 생활이 나는 그리 이해된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는 것, 그러는 동안 겪는 여러 갈등과 어려움은 물론 충동과 섣부른 판단에 이르기까지, 이를 제어하고 주의 하는 길은 오직 말씀으로밖에 없다. 우리는 결코 기회주의자도 아니고, 한탕주의자도 아니다. 우직하고 무던한 사람, 늘 한결같으며 일관된 사람으로 주를 바라는 일,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66:10-12).

 

곧 오늘의 시련이 우리로 주 앞에 더욱 바르게 한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오늘 시편으로 이어지면서 이와 같은 고백이 찬송이 된다. 곧 시온을 향해 가는 우리로서는 찬송이 필연이다.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134:1).

 

밤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린 성전에 거한다. 그런 자의 특징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 12:35).” 막연하고 태만한 게 주의 뜻을 바라며 느긋하고 느린 자로도 올곧은 게 아니다. 우리의 태세는 늘 ‘거룩한 긴장’이다. 주의 뜻에 합한 사람이란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 막연하지도 애매하지도 않다.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36-37).”

 

곧 신앙은 뜨겁고 그 마음은 주를 갈망함으로 말씀 곁에 선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산다는 일은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밤이 깊을수록 자신의 자리를 바로 지키는 일이었다. 누구와의 통화에서 또는 어떤 부부의 느닷없는 방문에서 언제든 말씀으로 저들의 사정과 사연을 이해하고 주의 뜻을 가릴 수 있도록, 연마란 손에 익고 몸에 밴 습관 같은 것이다. 어느 날 문득,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 혹여 밤일는지 낮일는지, 혹은 어떤 바쁜 와중에 일어날 일일는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묵묵히 주어진 한 날을 산다는 것은 예배자로서의 그 자리를 오롯이 지키는 일이었다.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2).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란, 어떠하든지 여호와를 송축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 그 성소를 향하여,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대상 16:29).” 나는 가끔 안타까운 것이 누가 우리 교회를 방문했을 때, 저에게 그곳이 나의 개인적인 사무공간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 같을 때이다. 서서 둘러보고 인사 나누고 어떤 안부를 묻기 전에 아주 잠깐이라도 자리에 앉아 주 앞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이 들지는 않는지…. 어제도 누가 휘익, 그렇게 다녀가고 내내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의자를 바꿔야 하나? 분위기 때문인가? 별의 별 생각을 다하며 혼자 마음이 어려웠다.

 

오늘 시편을 묵상하는 데 있어 성소를 행해 우리 손을 들고 주를 찬송한다는 것, 하다못해 남의 집에 가도 주 앞에 기도부터 하며 저의 복을 빌어주는 것이 기본일 텐데. 안 믿는 자들이면 모를까… 뭐라 말로 이를까 하다 그만두고는 그것도 마음에 걸려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생각만 많았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29:2).

 

이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이는 오늘 짧은 시편의 마지막 구절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결론이기도 하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134:3).

 

숨 가쁘게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최종 목적지에 당도하였다. 곧 우리 인생의 모든 결국에 이르렀다. 이를 이 땅에서 리허설 하듯 연마하는 삶이 성도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곧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이 간단한 일이 그처럼 불가능에 가깝다. 너무 어려워서 온 세상이 질식할 지경이다. 그 삶에 닥치는 이런저런 일로 바쁘고 번잡스럽게 간신히 간신히 하루하루를 살면서도 어쩜 우린 이처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에는 힘이 드는 것일까?

 

이를 앎으로 우린 주께 아뢴다.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살후 3:2).” 믿는다고 알았는데 실상은 아닌 경우, 그것을 어느 훗날 주의 심판대 앞에서 알게 된다면? 하면 주님은 항시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하고 경고하신 바 있다. 나는 두렵고 때론 무섭다. 스스로 옳다, 믿는다 하는 마음이 실은 신념이었고 그러려니 여기던 자기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래서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이게 어찌 괜한 소리이겠나?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주를 송축하기에 마음을 단련한다.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