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전봉석 2022. 6. 10. 05:09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

삼상 31:11-13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시 132:7

 

 

결국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 왕가의 죽음이 이어졌다. 사울은 죽으면서도 자신의 종교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했다. 저는 화살을 맞고 중상을 입었을 때, 이방인의 손에 자신의 죽음이 넘겨질까 의식하였다. 그러자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언뜻 저의 종교심이 신앙심으로 비춰질 듯하나, 그 모든 된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못했고 회개할 기회조차 생각하지 못하였다. 당연히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결국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4).”

 

더욱이 저의 세 아들들도 한 날에 같은 전투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6).” 이는 앞서 저를 두고 예언하셨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12:15).” 말씀을 중시하지 못하고, 사무엘의 경고도 듣지 못하고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13:14).” 결국은 신접한 여인의 말에서도 그와 같은 경고는 뒤로 한 결과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28:19).”

 

말씀을 등한히 여긴다는 것, 이 예언의 말씀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하면 오늘 저의 죽음은 예고된 것이었고 수차례 경고에도 자신의 명분과 종교심으로 견지한 자기 믿음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저의 사후는 더욱 끔찍하고 비참하였다. 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들 사이에서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을 발견하였다. 이에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내었다. 그의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았다(9-10).

 

한 가지 의문은 요나단의 죽음이다. 의인을 악인의 죽음과 같이 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생각하면,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으나 악인은 자기의 길로 가느니라(잠 11:7-8).” 곧 “악인은 엎드러져서 소멸되려니와 의인의 집은 서 있으리라(12:7).” 한데 저의 죽음이 사울과 같았고, 이는 사울의 왕가로 분류 하나님의 뜻이 다윗에게 있음을 알게 한다.

 

회개의 기회를 잃으면 모든 게 허사다.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겔 19:31).” 단지 이 땅에서의 죽음으로 그 결국이 전부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흔히 회개하는 것에 대해 그리 어려울 게 없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누구는 선택받은 자라면 어찌 살든지 죽기 전에 회개하면 된다는 식의 논리를 펴기도 한다. 그러나 회개는 구원과 같이 전적인 하나님의 의지다. 우리 의지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34:18).

 

충심이란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참된 마음이다. 마음이라고 다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소리다.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마음과는 다른 것이다. 이는 일시적이지 않으며 환경과 형편에 따라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사울은 인본주의와 개인의 종교화에 대한 경고다.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사 2:17-18).” 그 날은 엄연히 주가 정하신 주의 날이다. 나는 사울을 볼 때면 저가 취할 수 있었던 종교심과 남을 의식하고 따랐던 것을 두고 오늘 우리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저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았고, 그의 뜻을 바라기는 하였다. 한데 우리 기독교의 기본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주의 뜻을 임의로 선사하시는 것을 안다. 결국 사울의 죽음을 정의하자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이야기 후반부의 길르앗 야베스의 행실을 주목할 만하다. 야베스는 앞서 자신들을 구하여준 사울을 잊지 않고 있었다(11:1-11). 곧 저들이 암몬 나하스에 포위되어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사울은 군사를 소집하여 야베스를 구하였다. 곧 마땅히 여길 수 있는 일이었는데 저들은 이를 잊지 않았고, 그와 같은 선행은 영향력 있는 자리로 이끈다.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이는 마치 공식과 같아서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 5:4-5).”

 

곧 길보아 전투의 최후에서 길르앗 야베스가 보인 행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의 보답이며 예의라 할 수 있겠다. 은혜를 받고 그 은혜에 보답함으로 더 큰 은혜를 가져온다. 야베스가 암몬의 위협으로 저들의 오른쪽 눈을 빼겠다고 위협하는 가운데, 사울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분연히 군사를 이끌고 암몬을 친 것은 40여 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야베스 족속은 이를 잊지 않고 있었고, 자청하여 사울의 시신을 수습한다. 이에 우리는 주의 인자하심이 서로의 선한 영향력으로 그 행사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이와 같은 참담한 소식을 들었다. 저들은 밤새 달려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야베스로 돌아와 화장하였다. 그리고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이를 두고 금식하였다(11-13). 저가 아무리 사울이라 해도,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1-2).

 

오늘 본문으로 신본주의와 인본주의 생이 그야말로 한 끝 차이도 나지 않는다. 주께 향한 열린 마음이 선한 삶을 이끈다. 사울의 삶은 종교심이 강한 인본주의 생의 표본이다.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 사이에서 저의 선택은 언제나 사람들로부터의 인정과 나름의 자긍심이었다. 물론 선택은 자유다. 흔히 이를 자유의지라 할 때,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자유의지마저 주의 뜻에 내려놓는 것이다. 사울의 최후는 그 죽음까지도 자신의 명분을 사랑하였던 결국이다.

 

이어지는 시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열세 번째의 시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할 때 드린 기도의 한 대목과 “여호와 하나님이여 일어나 들어가사 주의 능력의 궤와 함께 주의 평안한 처소에 계시옵소서 여호와 하나님이여 원하옵건대 주의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입게 하시고 또 주의 성도들에게 은혜를 기뻐하게 하옵소서 여호와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시옵고 주의 종 다윗에게 베푸신 은총을 기억하옵소서 하였더라(대하 6:41-42).” 오늘 시편 8-10절의 내용이 중첩되는 것을 본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옷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마옵소서

(8-10).

 

우리로 근심하게 하는 하나님의 근심은 우리로 거룩하게 한다.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

(1).

 

그의 모든 겸손이라 표현했는데, 앞서 번역된 개역한글판에서는,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근심한 것을 기억하소서

 

라고 언급하였다. 근심이란 표현을 순화하여 겸손이라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성경은 엄연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곧 우리의 근심은 둘로 나뉘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우리로 거룩을 향하게 한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11).”

 

포괄적인 의미로 겸손이란 단어가 틀린 것이 아니지만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게 하는 근심은 보다 구체적으로 주를 사모하게 한다. 이는 겸손의 바탕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 곧

 

그가 여호와께 맹세하며

야곱의 전능자에게 서원하기를

내가 내 장막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고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2-5).

 

우리로 주를 경외한다함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잠 14:26).”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보장된 길로 인도한다. 곧 우리의 열정은 주를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담대하고 적극적이게 한다. 마음뿐 아니라 모든 수고를 결집하는 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이는 다시 바울의 놀라운 설교로 이어진 것과 같이,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곧 우리로 거룩을 바라고 취하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옷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

(6-9)

 

우리는 내면을 가꾸어 가는 사람들이다. 비록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어제는 모처럼 아이와 만나 점심을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전날 치과에서 뽑을 이를 잘못 건드린 것인지, 밤새 통증으로 시달리다 아침나절에는 기어이 내과로 내려가 진통제까지 맞고 왔는데도 진정이 안 되었다. 치통이 엄청난 고통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이를 만났을 땐 거의 기절할 정도의 통증이 찾아왔고, 간신히 아이가 점심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사과를 하고 아이들 돌려보냈다. 서둘러 다른 치과로 가서 응급처치를 받았다. 몇 시간 남짓 고통 가운데서, 쏟아지듯 주의 이름을 부르며 도우심을 바라였다. 곧 오늘 하루하루의 삶이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즉 우리 안의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가꾸어 가는 일이 ‘하나님 앞에 값진 일’이라는 사실을,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마옵소서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하지 아니하실지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왕위에 둘지라

(10-11).

 

주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일, 그 언약을 이행하시는 데 있어 때로는 고통과 어려움이 우리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새삼 발견하게 한다. 이는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딛 1:2-3).” 그러하면,

 

네 자손이 내 언약과

그들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그들의 후손도 영원히

네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12-14).

 

나를 두고 이르시는 말씀으로 들리는 것이 복이다. 나로 주의 거처를 삼으시고자 하고 주가 영원히 쉴 곳으로 거주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으로 사는 일,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 이는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나로 주 앞에 바로 세우시기까지,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고통도 따라온다. 그 가운데서

 

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떡으로 그 빈민을 만족하게 하리로다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옷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

(15-16).

 

9절의 말씀과 반복되는데, 그만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단지 그럴 수 있는 일로 치부하고 말면 그만일 일도 우리에게는 모든 게 다 주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알게 하신다. 고로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 35:10).” 그 차이는 엄연하여서,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10-11).” 나는 그저 말씀 앞에서 안도한다. 이에 오늘의 어려움을 견디는 힘도 더하신다.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위하여 등을 준비하였도다

(17).

 

뿔, 나에게 더하신 그 믿음의 소망을 붙들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믿음으로 사는 게 관건인 것을, 사울의 믿음이 달랐고 다윗의 믿음이 달랐던 것으로 알게 된다. 그러나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내 안의 것은 주가 끝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믿음이 더하여지는 날들이기를,

 

내가 그의 원수에게는 수치를 옷 입히고

그에게는 왕관이 빛나게 하리라 하셨도다

(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