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전봉석 2022. 6. 14. 05:04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의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더라

삼하 4:6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6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하였던 다윗과 달리(3:31-39), 정치적 암투는 그 곁에 기생하는 자들로 인해 더욱 혼탁해진다. 이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암살한 바아나와 레갑도 스스로의 정치적 입지와 살 궁리의 하나로 살인을 저질렀으나 다윗은 이를 용납할 리 없었다. “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전에 사람이 내게 알리기를 보라 사울이 죽었다 하며 그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그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을 그 소식을 전한 갚음으로 삼았거든…(삼하 4:9-10).”

 

이런 걸 보면 하나님의 계획은 점진적이고 하나님의 사람은 이에 발맞춰 서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2-3).” 우리로 우리 자신의 됨됨이를 돌아보아 성급히 나서는 데 따른 경계를 알리는 것 같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8-9).”

 

곧 하나님의 일이 진행되고 그 일이 드러나는 데 있어 성미 급한 사람은 스스로 발이 빨라 걸려 넘어지기 십상이겠다. 그로 인하여 설마, 하는 안도와 자칫 잊고 지낼까 하는 우려가 생겨난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주의 더디심은 더딘 게 아니라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로 회개할 기회를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이럴 때 세상을 보고 사람을 의뢰하면 마음은 조급할 수밖에 없고 마치 어떤 일이 아니면 모든 게 끝장날 것처럼 불안이 몰려오기도 한다. 믿음이 끊어지고 의지하던 마음이 흐려지면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이 있겠나?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욥 8:13-15).”

 

결국 사울의 일가가 몰락하고 절름발이 므비보셋만 남았다. 왕정시대의 폐단이랄 수 있는 저들끼리의 서열과 정치적 암투는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다. 사람이 사람으로 패거리를 이루고 당파를 조성하는 것은 오늘에도 다를 게 없다. 하여 성경은,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시 146:3-4).

 

이와 같은 결국이 인생의 몫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렘 17:5-6).” 이를 알면서 사회생활이란 게 서로서로 연결되고 누가 누구의 라인을 타고 줄을 서고, 이쪽과 저쪽을 나누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다.

 

오늘 본문의 바아나와 레갑은 형제지간이다(2). 브에롯 출신으로 가나안 족속 중 하나인 히위 족속에 속한 기브온의 성읍 사람들이다(수 9:17). 예전에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다스릴 때 기브아 사람들에게 속아서 화친한 후 베냐민 지파에 속해서 살 수 있게 하였다(3-21, 18:25). 사울 왕 시절 놉 제사장 학살 사건 때 그곳 사람들을 탄압하고 살해하였던 일이 있다(삼상 22:18-19, 21:1-6). 그곳에서 가까운 기브온 성읍은 이를 알고 있었고, 그때 브에롯 사람들은 깃다임이란 오지로 피신해야 했다(3). 이러한 배경으로 사울 왕가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고 그 일로 바아나와 레갑이 나서 그 복수심으로 이스보셋을 죽인 것 같다. 결국 사울의 악행으로 인한 인과응보라 할 수 있으나 다윗은 이를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악인이 의인을 그의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악인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삼상 4:12).” 결국 저들을 죽음으로 다스렸다. “청년들에게 명령하매 곧 그들을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 가에 매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매장하였더라(12).”

 

우리의 역사 속에서 벌어지는 이와 같은 현안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시선, 그 뜻에 합당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은 악하다. “하나님은 그의 죄악을 그의 자손들을 위하여 쌓아 두시며 그에게 갚으실 것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욥 21:19).” 지금은 그것이 옳은 것 같으나 지나고 보면 부질없고 악하였다는 것을,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37:27-28).

 

성경이 제시하시는 우리 삶의 기본 수칙이다. 곧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8-19).” 이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세상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악을 악으로 여기지 않는다. 선을 도리어 빙충맞은 일로 여긴다. 착하다는 게 민폐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성경은 단호하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 13:11).” 우리는 낮에 속한 자들이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8).” 곧 우리 성도의 현세를 ‘낮’이라 비유하셨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나는 이제 이 의미가 확실하다. 이상하게도 악은 어둡고 습한 곳을 원한다. 침침하고 현란하다. 은밀할수록 야릇하고 시커멓다. 하는 일이 음흉하고 밝지를 못하다. 눈짓을 하고 슬그머니 해결한다.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잠 7:9).” 저가 결국 향하는 곳은 “그 때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여인이 그를 맞으니(10).” 죄는 드러나지 않게 가만히 다가온다.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여인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7).” 하여 말씀은 호통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내가 거기 있다.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5-6).”

 

그야말로 아차, 하는 순간에 훅, 간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 16:1).” 결국 기회주의적인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오늘 본문은 이를 상기시킨다. 바아나와 레갑은 스스로들 기회를 잡았다고 여겼고 이를 이용해서 뭔가를 바랐다. 하지만 저들의 결국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용납될 리 없었다. 앞서도 사울의 죽음을 알리던 소년이 죽임을 당했는데(1:1-16), 하물며 나서서 살인을 하고도 이를 인정받으려고 했으니… 문득, 데마는 한때 바울을 도와 복음 전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한데 시련이 닥치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 그럴 수 있다고 여기는 기회주의가 오늘 우리로 잘못된 길로 걷게 한다. 이는 스스로의 판단이다. 그 속에 바위 같은 자기 생각이 견고하다. 저는 결코 말씀을 순순히 받지 못하고, 설령 따르는 것 같다가고 언제 제 갈 길로 갈지 모른다.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눅 8:13).”

 

어릴 때 이런 자들은 교회에서 숱하게 봤다. 언제는 입속의 혀처럼 굴다 순간 아니다 싶으면 등을 보인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별로 믿지 않고 크게 기대하지도 않는다. 자기 필요에 의해서는 간 쓸개도 빼줄 것처럼 굴다가도, 그런 사람이 입을 닦고 시치미를 띈다. 해서도 나는 사람이 무섭다. 더욱이 유난히 살갑거나 친절한 사람을 경계한다. 기회주의적인 성향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만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5).” 그래서도 나는 사람이 두렵다. 누군가에게 내가 또 그러했을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다. 나라고 안 그러고 살았을까?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벧후 2:3).” 그래서도 사람을 대하는 일에 있어 나의 감정이나 의지로가 아니라 주의 사랑으로, 주의 마음으로 그리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보다 덧없고 부질없는 관계도 없다. 유유상종이라고 어쩜 그렇게 닮은꼴로 살아가는지…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 제일 먼저 나를 경계한다. 아니면 순간이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1:7).” 이에 오늘 시편은 연거푸 감사하라며, 주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구절마다 강조하고 있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1).

 

앞서 135편의 시에서는 우리로 주와의 관계가 우상을 섬기는 이와 다를 게 없다고 지적했다면, 오늘 시편은 주의 인자하심에 집중하게 한다. 그의 인자하심은 각 구절마다 다양한 데서 드러난다. 어떠하든 나의 최우선은 감사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이는 전제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7).” 이를 즐거워할 수 있는 게 영적인 능력이 된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95:2).

 

안 믿는 이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안에 뜨거운 감사가 없다면 이보다 더 불행한 경우도 없다. 감사는 훈련과 가르침으로 몸에 밴다. 감사가 없는 사람치고 행복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당장 필요에 의한 충족은 잠시 스치는 바람 같을 뿐이다. 감사하는 줄 알았더니 어느새 불만이 터져 나온다. 감사는 하나님께 아뢰는 말의 빈도와 비례한다. 무슨 일을 가지고 사람에게 구구절절 떠드는 사람치고 그 일이 해소되는 경우를 본 일이 없다. 하나님께 아뢴 말은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해도 감사로 변한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감사도 해본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교회는 다니고 예수는 믿는다고 하면서 살면서 감사가 메마른 사람은 항상 투덜댄다. 누구 ‘탓’이 끊이지 않고, 그 탓의 끝에는 하나님께 향한 원망이 있다. 그럼에도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57:10).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03:11).

 

이를 알면 알수록 믿음은 견고하여진다. 오늘 시편은 이를 알게 하려고 숱한 이유를 같이 나열하고 있었다.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2-3).

 

그리고 난 뒤,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4).

 

여기서 기이한 일은 성도의 고백 가운데 있다. 믿는 자들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을 간직하고 산다. 특히 자기 삶 가운데 어찌 이를 행하시고 역사하셨는가를 확신하면서 말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이를 확신하고 삶에서 직접 간접으로 체험하며 사는 성도야말로 무엇보다 든든하다.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

(89:5).

 

곧 우리의 성실함이 인위적인 노력이나 당위적인 이유 때문이 아닌 것이다. 누가 시켜서 묵상을 하고, 누구처럼 해야 한다는(안 하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으로 하지 않는다. 주를 가까이 하는 일이 언제 어디서나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그러할 때,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5-9).

 

오늘 시인은 이 모든 우주만물이 주의 통치 아래 있음을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더 내 것으로 가져오면 오늘 내 안에 주를 바라는 마음이 예전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없다는 데 놀란다. 최소한 나는 내가 이럴 줄 몰랐다. 곧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다른 무엇보다 내가 이 시간을 귀히 여기고 잃지 않으려 하는 것도 스스로 신기할 정도이다. 내가 나를 알 수 없고, 확신할 수 없으며 없을수록 주를 바라며 주께 의지하는 부분이 커진다. 실제 나는 내가 나를 믿지 못하고, 나보다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연관이 되는가 모르겠으나, 내달 초에 필리핀에 나가 있는 동생네가 몇 년 만에 잠시 다녀간다. 어느새 15년째 타국에서의 선교생활이었다. 그로 인해 요즘 그 짧은 일정에 어딜 가고, 무얼 하고, 하는 계획들을 세우게 되는데 나를 두고 계획을 세우려고 하면 답이 안 나온다. 그때 가봐야 안다는 말이 서운하게 들릴지 모르나 나로서는 뭐라 변명할 말이 없다. 누굴 만나고 어딜 가고 무슨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나도 나를 어찌할 수가 없어서 말이다. 생각 같으면 같이 어디 낚시라도 가서 근사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갈 수 있을지 없을지…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언제부턴가 나는 나의 의지로 살지 못한다. 그 일로 어제 동생과 통화하면서 마음은 어렵고 미안했지만 우선은 나를 우선하지 말고 시간을 짜라고 말해주었다. 조금은 답답하고 한심한 일이지만… 그것이 병적이라 해도,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믿는 것이 중요하였다. 지금은 아무런 답도 확신할 수 없지만 주께서 또한 가장 선하고 의롭게 함께 하실 것을.

 

오늘 시편 10절에서 25절까지는 그와 같은 구원자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사역을 열거하고 있다. 저들에게 출애굽의 역사가 우리에게는 세상을 돌이켜 주의 백성으로 따로 불러 세우신 일과 같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계획을 세우고 설레발을 치며 주도하려 했을 텐데… 이제는 믿음으로밖에는 움직일 수가 없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6-27).” 그와 같이,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0-11, 25).

 

우리의 감사는 날마다 매순간의 은혜로, 예전의 것을 되씹으며 사는 것도 미래에 있을 소망으로 견디는 것도 아니다. 당장, 지금,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의 은혜가 아니면 단 한 시도 바로 설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이는 주가 행하신다. 나는 다만 저에게 맡겨진 바, “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10).” 이를 앎으로 믿고 믿음으로 더욱 안다. 그러므로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4-15).”

 

이제는 모든 게 다 비극적이라 해도 주께 감사하며 그의 인자하심을 믿고 신뢰한다. 때론 내가 나를 못살게 굴듯 우울하게 또는 좌절하게 한다 해도 주는 인자하심을 감사한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그러므로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신 8:10).” 감사는 실제이고 실전에서의 고백이다. 이는 또한 주의 뜻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그러므로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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