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전봉석 2022. 6. 16. 04:56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삼하 6:11

 

여호와여 세상의 모든 왕들이 주께 감사할 것은 그들이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

시 138:4-5

 

엘리 제사장 당시 아벡 전투에서 블레셋에게 빼앗겼다 반환되어, 바알레유다 곧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 집에 약 70년간이 방치되어 있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다윗성에 안치하는 일이 진행된다. 오늘 본문에서 몇 명의 특징적인 사건이 나타나는데, 우선은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흔들리는 수레에서 언약궤를 잡으려다 그 자리에서 죽는다. 그 사건으로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 정도 두었는데 그 기간 하나님이 저와 저의 집에 복을 내리신다. 다윗이 다시 언약궤를 옮겨 다윗성으로 안치할 때 이를 기뻐하며 모두가 소고와 제사로 찬양과 경배를 한다. 그 과정에서 다윗이 즐거워하다 옷이 벗겨지는 일이 생기고 이를 지켜보던 미갈이 저를 비웃는다. 후에 다윗은 미갈을 찾지 않는다.

 

일련의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한다는 것은 그만큼 두려운 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하나님 자리에 모심이 옳은 일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바울은 이를 확장하여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나의 몸, 이 육신을 비롯하여 마음과 뜻을 모두 합하여 산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더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는 사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145:1-3).

 

송축이라 함은 기리고 즐거워하는 일로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근거하여 인정받는 일이다. “너희는 내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22:31).” 단지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이 주된 일이 아니라, 그 일이 말씀을 근거로 하는 데 중요성이 있다. 곧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딤후 2:5-6).” 즉 경기도 농사도 그 정해진 순리에 따라 행하는 것으로, 말씀 곧 계명을 지켜 그 앞에서 행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1-22).”

 

기럇여아림에서 언약궤를 옮겨 나올 때 저들은 그 원리를 바로 따르지 못했다. 언약궤는 반드시 레위인 중에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고 운반하게 되어 있었다(출 24:14-15, 민 3:30-31, 4:15). 그런데 다윗은 우선 무리를 동원하고 새 수레에 싣고 저들 가족이 이를 끌고 옮기게 하였다. 다시 말해서 저는 경솔하였고, 이를 수행하는 자들도 주먹구구식이었다. 결국 웃사의 죽음으로 저들은 정신을 차린다. 말씀을 바로 알고 이를 준수하는 삶이 중요한 것은 자칫 스스로의 경솔함이 일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에 대한 무지는 죄다. 하나님의 진노를 부른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힐 것이요 그들의 귀한 자는 굶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라(사 5:13).” 말씀 앞에서 늘 갈급함을 느끼는 것은 성도의 온전한 관심이기도 하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할 때 우린 하나님을 오해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 하여 자신의 요구나 바람만 구할 뿐 정작 무엇으로 주를 영화롭게 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자칫 그 일이 선한 의도였다고는 하나 웃사의 죽음은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알게 한다. 이는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다시 예전 생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4-15).” 부르신 자의 거룩하심을 알기 때문이다. 특별한 일에는 특별한 자격도 따른다. 물론 누구라도 주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2:9).” 어쩌면 웃사를 비롯한 저의 가족은 수십 년 동안 자신들 집에 방치하듯 모시고 있던 언약궤에 대한 존귀함을 상실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대수롭지 않은 짐짝처럼 이를 옮기는 일에 주의하지 않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래 교회를 다녔고, 또는 믿는 가정에서 자랐다는 경우 그 신앙이 해이하고 안이할 수 있다. 목사가 되고 처음 가졌던 두려움과 경외심은 시간을 더하면서 대수롭지 않은 직업군의 하나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저 자신이 안다, 믿는다, 행한다 하는 데서 무시되는 것이 늘어가는 것이다.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신 11:1).” 항상은 ‘늘’, ‘범사에’를 뜻하는 것으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이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우리로 자라서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에까지 다다르게 하는 일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믿는 것은 아는 일과 무관하지 않으며, 아는 데는 그만큼의 열의와 성심이 따라야 하고, 이를 ‘항상’ 의식하고 주의하며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바탕이 된다.

 

자신에게 엄하고 남에게 관대하다는 것은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궁극적으로는 내가 도로 돌려받는 일이 된다. 가령 누구의 잘못을 두고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일련의 사태를 두고, 다윗은 우선멈춤으로 자신을 돌아본다. 이는 곧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다. 대충 이럴 때 우린 밀어붙이거나 남 탓을 하며 완고함으로 고집을 더할 텐데,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누구 일을 생각하고, 어떤 일로 마음이 어려울 때 주께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은 지혜다. 다윗은 다시 그 일을 시도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한다.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12).”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간 모실 때 70년을 자기 집에 두었던 기럇여아림의 경우와는 사뭇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짐작컨대 저들의 마음과 정성이 어찌 달랐을지 알 것도 같다. 흔히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 실패나 좌절은 우리로 주 앞에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그 일을 위해서도 말씀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마땅하다. 이는 고난이 준 선물이며 그로 깨닫게 된 사실이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119:67, 11).

 

요즘 보면 계속 마음에 더하시는 부분이 말씀에 대한 경각심이다. 그 말씀을 음미하고 묵상함으로 서로가 하나될 수 있다는 것,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9-10).

 

이에,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14).

 

재물로 비유되는 이 땅의 소중함 같이 주의 증거, 말씀으로 즐거워할 수 있는 마음이 귀한 것이다. 곧 이는 성경의 가치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103).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 되게 하기 위해,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18).

 

오늘 다윗은 무덤덤하고 마땅하게 여기며 그 일을 준행하였다가 웃사의 죽음으로 충격을 입고 주의 뜻에 마음을 기울이며 다시 이를 시도하였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14).” 경건에 이르는 길은 때론 심각한 시행착오와 함께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를 더욱 확실하게 안다.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히 10:33-34).”

 

또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표현에는 거칠 것이 없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며 즐거워한다(16). 누구를 의식하거나 체면을 차려 거드름을 떨 일이 아니었다. 이를 보고 가장 가까운 사람 중의 하나인 미갈이 업신여기지만, 우리 안에 두신 감사는 일체 남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심지어 삭개오는 체통이고 뭐고 가릴 게 없었다.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19:3-4).” 곧 우리 안에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이를 오늘 시편으로 되새긴다면,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138:1).

 

더는 누구 앞에서든, 무엇으로든 주를 사모하는 마음을 잃고 싶지 않다. 주신 바 그 생을 다하는 동안 더는 다른 데 기웃거리며 엉뚱한 것으로 마음이 붙들리지 않기를 바라고 또 구한다. 당당히 자신을 알리고, 알고, ‘전심으로’ 주를 찬양한다는 것,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내가 나로 시인하면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심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 4:15).” 이는 그 중심이 교회에 있고 말씀에 두었을 때 가능하였다.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2).

 

누구는 한사코 글방이라 하거나 사무실이라 하지만 나는 기어코 이를 교회라 하고 아침마다 물을 뜨거나 사무실 곳곳을 둘러보며 주의 전으로 축복하고 복을 빈다. 남들이 어찌 보든지 또는 그 모양이나 형편이 내세울 게 없다 해도,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나는 늘 느끼지만 주가 돌보시고, 곁에 늘 마음으로 기도로 물질로 함께 하는 이들을 볼 수 있다. 이에,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3).

 

이러한 힘이 어디서 오겠나? 말씀과 기도와 주의 성전으로 모이기에 힘쓰는 자들의 것이다. 마음을 모으고 뜻을 모으고 생각을 모아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이때에 주를 본다. 주가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느낀다.

 

여호와여 세상의 모든 왕들이

주께 감사할 것은

그들이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심이니이다

(4-6).

 

세상 무엇도 흔들 수 없고 빼앗아 가져갈 수 없는 것,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들의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왕상 8:39).” 곧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5:3).” 하면,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37:7).

 

세상은 이미 어지러웠고, 우리를 두고 누구는 조롱하고 업신여긴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안다.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138:7).

 

이를 어찌 말로 증명하고 설명한다고 이해할 수 있겠나? 각자 주신 대로 사는 수밖에. 여러 기회는 있었고 그때마다 주의 메시지는 이리저리 전달이 되었을 터, 끝내 무엇을 붙들고 살 것인지는 자신들의 몫이다. 이에 성경은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듣거나 안 듣거나 일깨우신다. 누구를 생각하다, 어떤 일을 두고 마음을 쓰다 내가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을 두고 더는 애쓰지 않는다. 저 또한 주가 돌보시고 함께 하실 것을. 다만 그 기간이 너무 길어 부디 먼 길을 돌아가지 않기를 바랄 뿐.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61:3-4).

 

무엇을 의지하고 어떤 일에 전념하고 사는지, 오늘 다윗과 같이 수십 년을 방치하였던 언약궤를 모셔오면서 그에 따른 저의 순정과 열정을 본다. 우리가 앞으로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어찌 알 수 있겠나? 모두가 평안을 원하고 살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도와 뜻대로 우리를 다루시고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가 이를 어찌 다 알까?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한데 요셉의 고백과 같이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이를 다시 읽으면 하나님의 의도와 당신들의 의도가 달랐다. 이를 하나님은 반드시 선으로 바꾸시는데, 우리로 어떤 어려움이나 고충도 허용하심으로 알게 하신다.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05:16).

 

이로 인하여 그럼, 어쩐다?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전 11:5).” 알지 못하나 믿을 수 있다. 보이지 않으나 그 증거를 안다. 바라는 것의 실상을 붙든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이는 이미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고로,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