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전봉석 2022. 6. 17. 05:25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삼하 7:18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시 139:23-24

 

 

언약궤를 다윗성에 안치하고 저는 주가 머무실 주의 전을 건축하기를 바란다. 이에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은 알되 저의 손으로 성전 건축을 바라지 않으심을 알린다. 이후 저의 아들의 손에 그 역사를 맡기실 것과 왕권을 높이실 것을 약속하신다. 이는 다윗과의 언약으로 이스라엘의 평안과 다윗 왕조의 견고함을 보장하시고, 다윗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게 하실 것을 이른다. 이후 저의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겠다는 언약이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14).” 성전에 대한 다윗의 소망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언약을 끌어냈다.

 

하나님의 때는 정하신 때에 허락하신다. 그때 우리의 순응과 기다림은 신앙의 초석을 이룬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5-26).” 주께서 선을 베푸심은 우리의 기다림을 타고 흐른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엡 1:9).” 곧 우리에게는 칼빈의 표현처럼 ‘비밀한 소명’이 있다. 이는 하나님과 주를 믿는 사람 사이의 일이다. 다른 누구에게 설명하고 알린다고 이해가 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때가 되면 증거가 이루어진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딤전 2:6).”

 

결코 우리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 “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오늘에 이르러 주가 하시는 일에 더는 토를 달 수 없다. 때론 ‘이 일이 왜 이러한가?’ 하는 회의와 갈등도 일지만 곧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나타내시고자 하는 놀라우신 뜻이 계셨음을 알게 한다. 가령 한 친구가 있다. 이런저런 사연을 말하고 기도를 부탁한다. 때론 뭐 이런 일들까지 말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소소하고 일상적인 것도 있다. 그럴 때면 주의 부르심에 대한 나의 소명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던 중 기도해주어 순탄하게 집 문제가 해결되었다며 헌금을 보내왔다.

 

부르심에 대한 소명은 칼빈의 말처럼 ‘비밀한 소명’ 곧 하나님과 나만 아는 어떤 확신인데, 헨리 나우웬의 표현처럼 ‘하나님은 마침 바지랑대를 치워버리신다.’ 바리장대는 빨랫줄 가운데를 끌어올려 늘어지는 줄을 추켜올리는 장대다. 하나님은 한껏 부르시고 바지랑대를 치우시는 것처럼 누구에게도, 무엇으로도 소위 등 비빌 곳이 없게 하신다. 잘 어울려 이런저런 의지가 되었던 사람들을 떨어뜨리신다. 그나마 내가 기댈 수 있었던 돈이며, 건강이며, 일체의 것을 치우신다. 나는 이를 톡톡히 경험하였다. 다시 부르시고 기어이 신대원을 다니게 하실 때에 갑자기 부모님이 미국에 있는 교회로 부름을 받고 나가게 되었다. 그때까지 내 생의 우상이랄 수 있는 아들을 떨어뜨려 필리핀으로 보낼 수밖에 없게 하셨다. 돈을 마르게 하시고, 내 고집을 꺾으시기 위해 공황장애를 일으키셨다. 가장 가까이 지내던 선생이 기어이 목사가 되겠다는 말에 사이가 멀어지게 하셨고, 함께 어울려 이틀이 멀다하고 붙어 다니던 친구들도 나를 멀리하게 하셨다. 나에게는 정말이이지 하나님밖에는 아무 것도 없게 만드셨다.

 

하나님은 마침 바지랑대를 치우신다는 게 그런 의미다. 비밀한 소명은 때로 잔인할 정도로 가혹하기도 하다. 누구에게 어찌 말할 수 없게 만든다. 말을 하자고 들면 하나님을 욕하는 것 말고는 할 말이 없으니까 말이다. 하나님이 어찌 이러실 수 있어? 하는 원망이 저절로 기어 나오는 것을 일체 차단하신다. 들어줄 사람도 등 비빌 곳도 없게 하신다. 돈이 씨가 마르고 건강은 하루가 꼴딱꼴딱 한다. 그리고는 알게 하시는 것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3-24).” 이와 같이 되물으신다.

 

나로 충분하지 않냐? 아직도 다른 무엇이 필요하냐? 하고 하나님은 물으시는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일러 이와 같은 ‘비밀한 소명’이 없다면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의심해도 좋다. 요즘은 ‘어쩌다 어른’처럼 ‘어쩌다 목회’자도 많은 것 같다. 그런가, 아닌가 애매할 때 스스로를 점검하게 해야 한다. 이는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굳이 그게 아니라면 직업군의 하나로 목사도 많다. 적당히 유능하고 언변이 있고 신앙도 있는데, 저의 확신이 성경적인지는 의문이다. 나는 나를 확신하는 것이 기껏 안 한다고,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을 붙들어 세우시더니 바지랑대를 냅다 걷어차 버리시는 하나님을 지금도 자주 경험한다. 워낙에 의심 많은 도마처럼 내 고집이 강한 것을 아시고, 축축 늘어지는 빨래처럼 곧 땅에 끌릴 판일 때 비로소 바지랑대가 되신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누구의 섬김으로, 또는 어떤 이의 손길로 마치 ‘내가 여기 있다.’ 하고 알리시는 것 같다.

 

오늘 다윗의 심정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아니 여태껏 광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돌리실 때도 딱 그 시점, 시의적절한 때에 도움을 더하시더니, 이제 좀 안정을 취해 주의 전을 건축할 생각을 하는데 이를 마다하시고는 더 엄청난 축복의 언약으로 받쳐주시는 것이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16).” 하나님이 하시는 데는 아무도 말릴 수 없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 곧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91:4).

 

나로 주를 사랑하기까지, 오직 주만 의지하고 의뢰하게 하시려고 일체의 바지랑대를 치우실 때는 알아봐야 한다. 이제는 어떤 ‘은밀한 기대’를 갖게도 된다. 하나님이 뭘 또 주시려고 이러시는가? 하고, 어려움을 통해 소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5-6).” 이미 이루신 일에 대한 증거이다.

 

나는 오늘 다윗의 신앙고백과 저의 시를 동시에 보며 생각하였다. 나의 비천함이 도리어 나로 주를 찬송하게 하신다. 오늘 본문 18절,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하는 저의 심정을 알 것 같다. 아니 이는 우리 부르심의 소명을 가진 자들의 모든 공통된 고백이다. 운전대를 잡았든, 택배 일을 하든,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든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은 사명자들이다. 저마다의 비밀한 소명을 붙들었다. 한데 그 가운데서도 목사는, 말씀 전하는 자로서의 사명은 다르다. 택배 일 하는 이에게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회사 생활하는 이에게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 힘쓰라고 하지는 않으신다.

 

곧 내가 누구며 내 집이 무엇이라고 주께서 이처럼 돌보시는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왕상 3:7).” 나는 그 누구보다 보잘것없는 위인인데 이를 들어 주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삼으시려고 그처럼 바지랑대를 걷어차시곤 하셨던 것인지.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139:23-24).

 

오늘 다윗의 시편 또한 나의 마음을 그대로 옮긴 것 같다. 즉,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144:3).

 

그야말로 나 같은 게 뭐라고, 저는 그 소소한 일들을 말하고 기도를 부탁하고는 하는지. 그러다 이를 감사하여 적지 않은 금액을 헌금하게도 하시고. 이는 내가 아니라, 주께 향한 마음이며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주의 전을 사모하는 것이었으니. 하나님은 이미 나의 생각을, 그 지긋지긋한 의심과 갈등을 다 아시고 능히 답을 주시고 계셨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139:1).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나의 성품이나 기질이 어떠한지…. 어제는 정신과에 가서 또 똑같은 약과 또 똑같은 소리를 듣다 왔다. 한데 저는 마치 말을 하고 싶었던 사람처럼, 언제부턴가 내 신분을 알고는 이런저런 저의 말을 더한다. 저의 책장에 꽂힌 책들로 저 또한 믿는 이인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외래 진료라 밖에 대기하고 있는 환자가 많아 오히려 내가 더 불안할 정도로, 저는 무려 30분이 넘게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왜 이처럼 가슴이 답답한가? 하고 물었을 뿐이었다. 어제도 그렇고, 내가 되레 들어주러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었다. 하나님의 난센스다. 물론 고혈압과 같이 약을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그런 자리에서도 내가 누구인지, 다시 돌아보게 하신다. 이는,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115:3).

 

누가 하나님을 말릴까?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곧,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2-4).

 

오늘 시편의 시구 하나하나가 내가 아뢰고 싶은 말이다. 때론 하나님을 알다가도 모르겠고, 모르겠다가도 알겠다. 그러면서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냅다 걷어차 버리는 바지랑대를 보고 확신하게 된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5).

 

나를 부르시고 세우신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나로 여기에 있게 하시고 두심으로, 그 자체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시는 것을. 내가 무얼 하고, 어찌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게 하시고, 본인이 하신다! 그러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7:1).

 

이와 같은 고백을 내 입에 묶어두시는가 하면,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121:5-6).

 

이를 증거하게도 하신다. 주가 하시는 일이다. 나는 한 게 없는데, 때론 기도를 부탁하며 그 어려움을 호소하는 저에게 뭐라 위로 했는지도 잊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하나님이 저에게로 달려가셨나 보다. 정말이지 나는, 한 게 없고 하는 게 없다. 그러면서도 선명하게 아는 것은,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6-7).

 

그니까, 내가 할 말이 이 말이었다. 이제 내가 주를 떠나 어디로 가겠으며 여기가 아니면 어디서 사람 구실을 하고 살겠나? 그저 말씀 앞에 앉을 뿐인데, 아침마다 말씀을 여시니 나로서는… 뭘 쓰는지도 모르면서 쓴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한다. 주가 하신다.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욥 34:21).” 그저 하나님의 안위와 인도하심으로,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8-10).

 

돌아보면 나를 돌이켜 부르실 때뿐 아니라 내가 알지도 못하고 주의 이름을 부를 때부터 주는 항상 내 곁에 계셨다. 그때마다 주의 사람들이 내 곁에 있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그러니 내가 하는 게 뭐라도 있으면 나도 좀 내어드릴 게 있을 텐데,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11-12).

 

이런저런 어려움이 나의 바지랑대를 차대시는가, 하던 생각이 무색하여졌다. 내가 기대고 의지하던 것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산처럼 우뚝 서 계시는 하나님이었다. 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2-14).”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3-14).

 

그러므로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전 12:22-25).”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5-16).

 

이와 같이 나의 날들이 나에게 증거하고 있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17-18).

 

이를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는 바,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9).”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높으신가?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23-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