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삼하 9:8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시 141:2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았다. 저는 두 다리를 절었다. 저의 신분은 복권되었고 왕의 식탁에서 같이 떡을 뗐다. 전적으로 다윗의 신실함으로 저는 그 모든 것을 거저 받은 것이다. ‘내가 요나단으로 인해 그에게 은총을 베푼다.’ 다윗의 이와 같은 말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데 있어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함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는 전적으로 예수로 인한 것이다. 나의 모든 죄와 허물이 가려지고, 어떤 죗값도 사함을 받았다. 이에 므비보셋의 고백처럼,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삼하 9:8).”
베드로는 예수를 마주하자 엎드려 고하였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밤새 한 마리도 얻지 못하여 빈 그물을 씻고 있는 저들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에 따른 것이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은 뒤였다. 베드로는 한 눈에 예수를 주로 알아보았다. 평생 자기 수고와 애씀으로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18).” 이를 두고 다윗은 시로 고백하기를,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8:4).
이는 오늘 다윗이 보여준 신의와 신실함을 보고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이것,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6-7).”
나는 누구의 사명을 두고 생각하였다. 소명은 부르심이고, 사명은 보내심이다. 서로 하나이면서 다르다. 부르심으로 우린 세상에서 나와 주의 이름을 부른다. 주께 아뢰며 신앙생활을 한다. 사명은 그 직분에 따라 쓰임이 다르겠으나 어떤 일을 하든지, 사명감을 가질 때 주의 뜻에 합한다. 더욱이 주의 종으로 부르시고 보내시는 데 있어서는 어떤 공식이 있는 것 같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면 내가 의지하는 모든 것을 치우신다. 헨리나우웬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바지랑대를 거두신다.’ 하나님만 바라게 하심이다. 또 하나는 날마다 치르는 영적전쟁이다. 이는 내면의 자신과의 싸움일 수도 있고, 나름 평생을 의지하고 살았던 것과의 결별일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결국 하나님이 이기신다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 성경의 그 누구도 주의 부르심과 보내심 앞에 자진하여 나서서 당당하게 자기 실력으로 그 일을 수행한 자는 없다.
이를 보건대 자신을 돌아보며 지금의 내적갈등이 그와 같다면 저는 사명자가 분명하다. 소명자로 안주하는 이들도 많다. 부르심을 받은 데서 소극적으로 그 자리를 고수하려 드는 데는 사탄의 전략도 한몫을 한다. 어쩜 그렇게 시의적절하게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을 나열하고 사람 발목을 잡는지. 누구도 저더러 강요할 수 없다. 소명자로 그친 삶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며 심지어는 일시적이다. 적당히 사는 데 지장이 없는 자로 산다. 때론 세상에서 구분이 어렵다. 믿는 자인데 안 믿는 자와 다른 것이 없다. 오히려 더,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값싼 구원’의 확신이 저로 하여금 ‘그래도 되는 것’처럼 자신을 내버려두게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명자로 산다는 일은 오늘 다윗의 한 가지 실천처럼 저는 요나단과의 약속을 생각하였고 기꺼이 사울의 모든 것을 저에게 돌려주었다. 이는 사명자의 본분으로 바울은 외치기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갈 4:19-20).” 자신의 믿음으로 안주하는 삶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들’을 향한 주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그러는 까닭이 무언가? 이는 ‘택함 받은 자’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딤후 2:10).” 자기 일, 자기 문제 외에 다른 한 영혼으로 고통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사명자로의 삶이 될 수 없다. 어떤 일에서든지 ‘남을 낫게 여기며 사는 것’은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면 그 사랑을 주체할 수 없다. 이 사랑, 이 특별 은총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신 7:7-8).”
이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렘 31:3).” 또한 이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이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3).” 무한한 사랑이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엡 2:4).” 거룩한 사랑이고,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1).” 인자와 자비의 사랑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2, 39).”
사명자가 느끼는 사랑이다. 왜 내가 저 일로, 누구 때문에, 여기에서…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지 답이 없는 길이기도 하다. 답이 없는데 확신은 있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존재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이 말씀은 때로 잔인하고 가혹하다. 스스로도 주체할 길이 없다. 주를 위하여 자식도 가정도 자신도 모두 버린다. 누구에게 권하기에는 너무 가혹하나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
곧 성경의 모든 인물은 ‘여기’ 아닌 ‘거기’를 사모하는 삶으로 살았다. 이에 서로를 향한 사랑도 그 가치를 더한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2-13).” 나도 싫은데 나로 주체할 수 없게 하시는 사랑, 그 사랑으로 누군가를 생각하고 위하고 주께 아뢰게 되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야말로 내 코가 석 자인데 저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젖몸살을 앓는 것처럼 고통을 느낀다.
나는 오늘 다윗이 요나단을 생각하여 므비보셋을 사랑하고 돌보았던 것과 이를 감격하며 자신을 더욱 낮추고 감사하는 므비보셋을 보며 이중삼중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예수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원무궁하신 사랑이 나 같은 자에게 이른 것과 저의 그 사랑을 간직함으로 더욱 가까이 주를 사모하며 사는 것이 하나로 일치되는 것. 곧 소명은 사명으로 이어질 때 그 쓰임을 다한다. 단지 소명에 머물러 사는 삶은 잠깐의 감격과 영광은 맛보았을지 모르지만 세상 염려와 근심으로 무기력하게 살아갈 뿐이다.
갑자기 어디서 들은 게 생각난다. 부산 어느 교회 목사님이 목사가 되게 된 동기는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였다. 저는 공학도로 부푼 꿈을 안고 비행기 안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 한 노부부는 가는 내내 찬송을 흥얼거리며 서로의 두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그것이 참 보기 좋았던지, 저는 두 분이 여행을 가시는가? 하고 물었다. 잠시 말을 고르던 남자분이 실은 아들을 시신을 수습하러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영국에 파견되어 근무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그 시신의 수습하러 가는 길이고, 실은 곧 직장을 은퇴하고 선교사로 나가, 주께서 보내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저의 남은 인생을 헌신할 거였는데… 하나님이 이와 같이 자식을 먼저 주의 나라로 데려가심을 두고 아내와 그 마음을 애도하며 주를 찬송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까지 예수를 알지 못하였던 젊은 공학도는 영국에서 진로를 바꾸어 신학을 하였고 목사가 되어 돌아왔던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시는 말씀 안에는 세상적으로 어찌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노여움도 존재한다. 이유도 없는 괴로움과 원망과 절망도 같이 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주의 보내심을 막을 수는 없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무력한 자로 생을 마감할 줄 알았고, 아브라함은 아들 하나, 이삭으로 그친 줄 알았다. 다니엘과 그 세 친구는 노예로 끌려가 생이 마감되는 줄 알았고, 베드로나 그 외의 제자들은 가난한 어부나 세리로 끝나는 인생인 줄 알았다.
훗날 부산 어느 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목회를 하는 저의 고백 중에는 우리의 그 사소함이 우리로 가장 소중함이 된다고 소회를 밝혔다. 주가 하시는 일이란, 참으로 기이하고 놀랍다.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72:18, 26:7).
이것이 사명자로 사는 자의 찬송이었다. 오늘 시편은 그러할 때에 주 앞에 엎드려 오직 주만을 바라고 의뢰하는 성도의 심정을 진술하는 비탄시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141:1).
우리로 주를 부르고 주께로 나오게 하시는 것은 주의 극진한 사랑으로다. 주의 사랑이 아니면, 그런 대상이 아니면 굳이 저를 돌아오게 하지도 않으신다. 내버려두심으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소명자로만 살면 자칫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그게 전부인 것처럼 주를 영화롭게도 감사하지도 않는 허망한 자로 살 수도 있다. 내 곁에는 늘 배움이 대상이 되는 목회자도 있으나 경계하여 나를 돌아보게 하는 이도 많다. 애써 목사가 되고도 그 사명을 망각한 자들도 있다. 누구는 살 길을 찾아 도로 애굽으로 떠나기도 하였다. 이에 우리는 부르짖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것으로도 값진 소망이 된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107:19-20).
곧 오늘의 고통이 무엇보다 복일 수 있는 것은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부르짖고 말씀의 보내심을 받는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이와 같은 고백을 자기 것으로 삼고 사는 자라면 무엇이라도 망설이겠나?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2).
기도하게 하심으로 참 기쁨, 예배자로 세우신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 말씀 앞에 예민하고 모든 것보다 우선하며 사는 것,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엡 6:18).” 나는 누구를 위해 마음을 쓰다 애간장을 태우며, 문득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겠나? 하는 내적갈등과 또 싸우는 나를 본다. 이런 말을 아내에게 하겠나? 그 누구에게 한들 이해를 할 수 있겠나? 오롯이 하나님으로 씨름하는 것이 사명자의 숙명이다. 고로,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
(3-4).
수시로 드는 인륜가 천륜을 운운하며 우리를 옥죄는 사탄의 전술은 놀랍다. 누구의 사정과 형편으로만은 저에게 더는 뭐라 강요할 수도 권할 수도 없다. 나름 스스로 너무 애쓰며 산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애쓰고 수고하여 자신이 이루었다고 고백하는 이 없다. 주의 사람이면 하나 같이 므비보셋의 고백과 같이 ‘개만도 못한 나를 어찌 사랑하시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황송하고 감격스러울 뿐이다. 하면 말을 삼간다.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 29:20).” 늘 생각하고 또 주의하는 것이지만 나의 세 치 혀를 다스릴 능력조차 나에게는 없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7-8).” 요즘은 다들 반려동물을 애지중지 키우며 사람보다 더 사랑하는 시대인데, 그것만큼만 자기 그 짧은 혀를 돌본다면 우리 사회는 성자들이 사는 평화로운 땅이 될 것이다. 막말과 저주의 말이 난무한 세상이다. 이때,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
(시 119:36).
곧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하여 나는 때로 신물이 나서도 입을 다물고 침묵 속으로 가라앉기도 하는데, 세상 제일 무서운 게 세 치 혀다.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한다. 한 말에 책임을 지지도 않는다. ‘그때는 옳았고 지금은 틀렸다.’ 주 앞에 서원하고 갈망하였던 마음을 하나님은 반드시 돌려받으신다.
나는 일찍이 목사의 아들로 교회 생활을 했고 세례를 받을 그 시점에는 참으로 뜨거운 성령의 내주하심도 경험하였다. 그때 어울리던 친구들과 성경공부도 하고 서원도 하여 저마다 주의 부르심에 합한 삶을 살겠다고 약속도 하였었다. 그러다 생의 질고에서 하나님을 멀리하기 바빴고, 주 없이 살고자 하며 세상을 참 많이 사랑하면서 살았다. 나의 생의 상당부분이 주를 배척하며 사는 삶이었는데, 하나님은 기어이, 나로 듣게 하셨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5).
내 곁에 기도의 사람들과 말씀의 사람들이 항상 포진되어 있었다. 내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할 때도 저들은 나를 두고 주와 씨름하였다. 마치 소돔성에 있는 롯을 생각하며 (저는 아무 생각없이 죄악 중에 살고 있는데) 아브라함은 저의 그 한 영혼을 위해 하나님과 씨름하였던 것처럼, 아내는 공부방으로 오는 아이들 하나하나 그 영혼을 두고, 또는 안 믿는 가정과 저의 부모를 대신하여 가정예배를 드리다 기도한다. 어제는 다른 학원으로 갔던 중3 아이가 탈선의 위기에서 다시 왔다. 당장 기말고사를 앞두고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겠지만 아내는 해석을 달리하였다. 나름은 초등학교 4, 5학년 때부터 가르치던 아이였다. 주가 어찌 다루시려는지.
우문이지만 참 신기한 것 하나가 있다. 우리 집에 와서 공부하는 아이들은 책상에 엎드려 자다 가도 경우에도 성적이 오른다! 그때 같이 그만두었던 다른 아이들의 성적이 모조리 심각하여 차마 점수를 입에 담기도 민망할 정도라 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 아내도 안다. 아내의 실력으로 중3, 고1 수학을 가르치고, 영어를 봐줄 수 있겠나? 그런데 다들 내로라하는 이름 있는 대형학원으로 가서 몇 곱절의 수업료를 내고도, 처음 우리에게 왔을 때처럼 그 점수 그 바닥이라니. 어제는 그 중 아이가 보충을 하고, 우리는 저녁 식탁에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내도 나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우리의 수고는 보잘것없는데 아이들의 성과는 오로지 주의 긍휼하심으로 오른다. 들을 귀도 주가 주시는 것이다.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잠 25:12).” 우린 다만 보내시면, 감당한다.
그들의 재판관들이
바위 곁에 내려 던져졌도다
내 말이 달므로 무리가 들으리로다
사람이 밭 갈아
흙을 부스러뜨림 같이
우리의 해골이
스올 입구에 흩어졌도다
(6-7).
우리의 신실함은 주를 신뢰하는 데서, 주를 경외함으로 얻어진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그러므로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요일 3:12).” 곧 우리의 믿음은 행위를 보고 아는 것이지 느낌이나 마음가짐으로가 아니다. 굳은 결심은 백날 해도 소득이 없다.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나만은 온전히 면하게 하소서
(8-10).
우리의 기도는 직설적이고 단순하며 순전하다. 주를 알고 바라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맹목적으로 엄마의 품에서 안도하는 것과 같다. 자유의지나 자의식을 강조하는 사람치고, 사명자로 굳건하게 달려가는 사람을 내가 본 적이 없다. 저는 스스로 함정을 파는 사람과 같다.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잠 26:27).” 그러니 늘 생각하면 별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과 같은가보다. 그야말로 갈 데까지 가야 정신을 차린다. 것도 주의 은혜가 아니면 이를 알지도 못한다. 눈을 감은 채 내달리는 형국이니 세상 참 불쌍한 영혼이다. 고로 나는 주께 엎드려 고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포악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들은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
(140:4).
그러므로,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14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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