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95편 / 구원의 반석

전봉석 2022. 6. 17. 07:16

220619 주일

 

시편 95편

구원의 반석

 

시 95: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시 95:2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들어가는 말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는 일은 죄의 가장 뿌리 깊은 현상이다. 가령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아담은 하와에게 죄를 전가하고 하와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3).” 하고 뱀에게 전가하는데, 결국 그 모든 ‘탓’은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가는 회개의 기회도 잃게 하고 탓은 원망의 기회를 더한다.

 

회개는 전적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일이다. 그런데 자책은 자신을 탓함으로 하나님을 비난하고, 원망은 남을 탓하면서 하나님을 모욕한다. 자기비애와 상대를 경멸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것에 대한 경멸이다. 이에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라며 ‘다툼과 허영’을 ‘겸손’의 대척점에 두었다. 허영은 외적으로 분수에 넘치는 겉치레이고, 다툼은 내적으로 자기가 옳다는 토대이다. 이를 물리칠 수 있는 것은 겸손이다. 남을 존중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겸손이다. 이를 지키려면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해야 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지혜서에는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잠 11:2)”,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19:29).”고 일갈하였다. 곧 ‘아직도 가야 하는 길’에서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고전 9:26).” 이를 위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바울은 주의하였다(27). 예수님은 일러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음을 알리셨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이를 에스겔은 훗날 하나는 양으로, 하나는 염소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의 양 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 사이와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심판하노라(겔 34:17).” 하고, 우리 주님은 그날에,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3).” 하고 구분하셨다.

 

본문이해

 

오늘 시편은 100편까지, 절대주권자 <하나님의 구속사>와 <경륜과 섭리>를 노래하는 여섯 편의 시 가운데 첫째 시다. 이 시들은 신정시(神政詩)라 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다룬다.

 

오늘 그 첫 번째 시, 95편은 ‘하나님의 통치’를 찬송한다. 1연은 1-2절로 여호와께 올리는 성도의 찬송을 담고 있고, 2연은 3-7절로 우리의 목양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찬양하고 있으며, 3연은 8-11절로 과거 광야에서의 불순종과 그에 따른 주권자 하나님을 나타낸다. 특히 8절 이하의 내용은 히브리서 3장 7-11절에 그대로 인용하여 영적교훈을 확장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정리하면, 마음이 완고하여 남을 탓하고, 죄를 전가하여 미혹을 당하고, 미혹됨으로 주의 길을 가지 못한다. 고로 오늘 시편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절대통치인 구원의 반석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1. 즐거이 외치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시 95:1).”

 

1) 환희와 기쁨은 우리의 표현이다.

 

‘오라!’ 하고 시인은 우리를 초대한다. 청유형으로 우리를 멈추어 돌아보게 한다. 히브리서를 근거로 이 시는 다윗의 시다.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히 4:7).”

 

오늘, 우리로, ‘오라!’ 하고 부른다. 부르심의 소명은 칼빈의 표현처럼 비밀한 소명이다. 믿는 사람만 안다. 이를 응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의 바지랑대를 치우신다.’ 헨리 나우웬의 표현이다. 곧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우리가 기대고, 의지하는 것을 치워버리시는 것이다. 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3:13).” 세상이 우리를 날마다 미혹한다. 이를 위해

 

첫째, 우리의 신분을 알리기 위해 바지랑대를 치우신다. 곧 우리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신다. 둘째, 우리가 주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린다. 셋째, 그 길을 우리만 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리신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 2:3).”

 

고로 궁극적인 환희와 기쁨은 우리의 것이다. 이김은 여호와께 있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다들 애쓰며 살지만 결국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16:9).”

 

2) 우리는 감사함으로 시를 지어 즐거이 노래한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2).” 앞서도 살핀 것처럼, ‘탓’의 주범은 감사를 상실해서이다.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곧 하나님을 멸시하고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민 14:22-23).

 

감사는 만족이다. 만족은 드려지고 갚아질 때 확장된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시 50:14).” 곧 우리 삶의 여유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과 비례한다. 약속을 따라 산다는 일은 내가 의지하는 바지랑대를 치우는 일이다. 매순간이 싸움터 같다. ‘이 길이 맞나?’ 싶어, 우리의 힘으로 뭐라도 하려 한다. 그러나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100:4).” 다른 길은 없다. 감사는 감사할 수 없는 지경에서 더욱 진실해진다.

 

2. (우리는) 그의 것이로다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3-5).”

 

세상 무엇도 주의 것이 아닌 게 없다. 과학자들은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모두가 우리 지식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에 놀란다. 우주는 물론 사람의 인체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가령 사람의 몸에 퍼져 있는 혈관의 총 길이는 10만 킬로미터로 지구를 두 바퀴 반까지 감을 정도라 한다. 성경은 일러,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대상 29:11).” 하나님은 확언하시길,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이를 명심하자.

 

3.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6).”

 

1) 우리가 무릎 꿇는 것은 주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 내 보잘것없는 것을 주께로 향해 드릴 때,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곧 이를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퍼질 것이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우리는 주의 부르심으로 초대 받은 자들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2) 우리의 무릎 꿇음이 우리의 고백이 되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7-8).” 오늘 시인은 광야 40년에 우리의 불순종을 상기시킨다. 여전히 세상을 그리워하고, 주를 거역하며, 애굽으로 돌아가려 하는 마음에 일러,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9-10).” 곧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 앞에 무릎 꿇음으로 주를 송축한다.

 

4.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자.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9).”

 

1) 하나님은 결코 시험을 당하지 않으신다.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10).” 여기서 두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첫째. 미혹되었다는 것이고, 둘째.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무엇에 미혹되었는가? 한낱 미물에 굽실거리는, “내 백성이 나무를 향하여 묻고 그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하나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그 하나님의 수하를 음란하듯 떠났음이니라(호 4:12).” 실제 저들은 신통하기도 하다. 귀신도 떠들고 사탄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안다. 용한 점술가도 있고, 괴이한 무당도 있다. 그러나 저들의 결말은 하나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6-18).”

 

2) 아직도 가야 할 길.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11).” 이를 역으로 돌려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면 모든 게 허사다. 그 삶은 파멸과 고생뿐이다. 믿는다고 믿는 자들도 주가 주시는 평강의 길을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속에 울화가 억울함이 온통 남을 탓하는 마음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 24:4).” 이에 따른 네 가지 증거,

 

첫째, 이단과 사이비가 넘쳐난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5).”

 

둘째, 끊임없이 말을 만들어낸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6).”

 

셋째, 서로 대적한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7)”

 

넷째, 자연재해가 시작된다.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8).”

 

나오는 말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11).”

 

오늘 시편의 경고를 두려운 마음으로 듣자. 믿으니까 천국 간다는 허황된 신앙으로는 어림없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사탄도 믿고 떠든다. 저들도 두려워할 줄 안다. 죽음 너머는 모두에게 공포다. 하면, 우리는 살면서 구원을 맛보아 안다. 말씀의 맛도 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 8:1).” 이는 다윗이 죽어서 한 말이 아니다. 살아서 사는 동안에 느끼는 것으로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9).” 이와 같은 천국의 맛이 우리 일상에서 느껴져야 한다. 비록 지속적이지 못하고 때론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 해도, 부르심에 대한 비밀한 소명이 없다면 스스로 심각하게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사탄도 믿고 떠든다.

 

이를 집을 짓는 것으로 비유하여 예수님은 가르치시길,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마 7:24-25).” 또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26-27).”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믿음은 어디 위에 지은 것인가?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우리에게는 말씀이 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