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삼하 15:30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시 147:10-11
4년여에 걸쳐 아살롬은 치밀하게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아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다윗의 우유부단함과 압살롬의 패역과 탐욕이 결국은 일을 냈다. “그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오십 명을 그 앞에 세우니라(1).” 저의 중심에는 반역과 모사만이 가득하였다. 이를 치리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다 다윗은 스스로의 발등을 찍은 셈이다. 마음의 위선과 악독을 알아야 한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 주님은 이를 두고 심히 화를 내신 바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분별력이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요 7:24).” 겉으로야 누군들 그 속을 감추지 못할까?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어떤 점에서 압살롬은 처세술에 능하였고 백성들은 저의 외모에 혹하였다. 사람이 그 말의 힘으로는 당하지를 못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두 사람의 각기 다른 처세가 이 지경의 파국으로 치달은 것인데, 압살롬의 무례함이 극에 달한 것을 본다. 이를 다윗은 피하여 도망친다. 아들과의 대립은 물론 그로 인해 백성들의 난국과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압살롬은 자기 인위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훔쳤다.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6).” 곧 스스로를 높임인데, “압살롬이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정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4).” 저의 위선은 가증스러울 따름이다. “사람이 가까이 와서 그에게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그에게 입을 맞추니(5).”
결국 스스로 무얼 하려 할 때 우린 우리도 모르게 꾸미고 더하여 거짓을 진실인 듯 스스로도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성경은 이를 일거에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곧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잠 27:2).” 그 지혜의 길이 어디인지를 알게 한다. 곧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하나님이 하시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뿐이다.
하긴 아무리 기름진 땅이라 해도 햇볕만 내리 쬐면 곧 마르고 타들어 사막이 되는 법이다. 아이라 해서 그 마음이 선하고 순진하지는 않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 22:15).” 아이들과 오래 같이 지내 와서 나는 조금 안다. 그 마음에 영악함이 어른 뺨친다. 이에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29:15).” 요즘 일련의 교육 방식이 옳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저들은 한 인격체가 되어가는 과정이지, 누구도 그 인격이 완전한 사람은 없다. 하면 스스로 자신을 쳐 복종하게 하지 못할 때는 훈계와 가르침이 필요하다. 곧 오늘의 압살롬은 다윗의 자녀 교육이 옳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더 많은 시간을 갖고 서로 밥상을 같이 하고 인격적으로 저를 양육하였더라면 어땠을까?
서로가 처음이라, 우린 모든 게 다 서툴다. 할 때 주님은 어떠하셨나?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8).”
여러 약속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1).” 그렇듯 사탄은 수시로 우리 곁을 맴돈다. 혹시나, 하고 틈을 노린다. 결국 압살롬의 부름에 따른 사람들과 심지어 다윗의 동역자였던 이도 있다. 거짓은 순간 사람의 마음을 흩으는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2).” 우리가 주의 영광을 마음에 두고 산다는 일은 행여 주의 이름이 망령되게 일컬음을 받을까 주의하는 일이다.
요나단은 이를 서슴지 않았다. “사 년 만에 압살롬이 왕께 아뢰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내가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7).” 저는 거짓을 고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였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상실하면 스스로의 거짓에도 참인 줄 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신 5:11).” 그러니 우린 누구라도 완전하지 않아 언제든 압살롬이 될 수 있다. 하여 예수님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먼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그의 나라가 임하여 우리로 통치하시기를. 우리가 맡은 책무이면서 동시에 이 땅에서 이루어가야 할 사명이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자칫 언제 혹, 하고 넘어갈지, 누구라도 그럴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종종 나는 엉뚱한 기도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떤 능력’을 구한다. 특히 ‘아이’와 같이 있을 때 나는 주께서 주의 권능을 주사 저를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면… 하고 은근히 서러움도 든다. 어제는 아이와 같이 점심을 먹고 차를 들고 산책을 좀 하면서, 아이가 새로 옮긴 병원에 대해, 먹고 있는 약과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가족들과 특히 아빠에 대한 기억을 한데 뒤섞어 이야기 할 때, 나는 추려서 그의 말을 이해하다 울컥, 하는 심정으로 주께 구하곤 하는 것이다.
하긴, 하나님은 내게 그와 같은 은사를 주지 않으셨다. 한 번도 나의 그러한 기도에 응답하신 적이 없다. 나를 위해서도 또는 누구를 위해서도, 특히 요즘은 주변에 정신과를 다니는 이들이 어쩜 그렇게 많은지! 저들을 위해 기도하다보면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것 앞에서 주의 뜻을 분간하게 된다. 이 말 저 말 아이가 유난히 수다스러울 때,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하는 표현이 잦은 날은 어떤 불안이나 우울이 저의 마음에 강하다는 것을 짐작할 뿐 달리 나로서는 어찌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누구의 어떤 사정과 그 가정의 이런저런 이야기 앞에서도 나는 무력함을 느낄 뿐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서 주께 기도하게 될 뿐이다.
오늘 압살롬의 반역과 다윗의 도피가 전달하는 의미가 누구의 자가당착과 또는 회피본능이 가져온 결과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두 사람 모두 주 앞에서 기회를 놓친 셈인데, 오늘 우리 사회나 우리 가정의 모습은 과연 다른가?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이것들이 너무 흔하고 자연스러워서 누구의 사연을 들으면 저마다 첫 마디가 ‘다 그렇지 뭐’ 하는 말로 치부하고 만다.
다 그런 일이 되어버린 것들을 놓고, 아이들이 병들어 간다. 멀쩡한 것 같으나 그 속은 곪아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는 일은 다반사고 전혀 앞뒤가 없는 구실로 무기력해지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윽박지르고 야단치고 애원해도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사이가 되어버린 뒤에야 이를 병적으로 다루어 정신과로 전전긍긍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기껏 대학 잘 들어가 나름은 잘 이겨냈다 했는데 아뿔싸 우울증이 아이를 사로잡거나 피해망상으로 누군가를 원망하며 자해를 하기도 하고, 자기 방문을 닫고 일체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제야 이 일이 어찌 됨인가? 하고 후회한다 한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나는 차마 누구의 일을 글로 옮길 수는 없다. 마음에 두고 저를 생각하며 주의 이름을 되뇔 뿐인데, 어떤 안타까움이 또는 서러움이 옥죌 따름이다. 사람으로 사는 일이 얼마나 고단하고 어려운 일인지를. ‘엄마 돌아가시고 이제 네가 곁에서 기도해주어 고맙다’는 저의 문자 앞에서 나는 두려움이 먼저 들었다. 두려워 주의 이름을 앞서 부르게 된다.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내가 무얼 할 수 있기는커녕 나 하나도 건사하지 못해 쩔쩔매는데, 어쩌자고 하나님은 내 안에 이 귀한 보물을 담아두신 것일까?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사 26:3-4).” 나로 일체 다른 데에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게 하시려고, 무엇에 기대어 의지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예전처럼 사람 좋아 사람 사이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온통 마음을 빼앗길까 하여, 오직 주만 신뢰하게 하시려고. 나로 오늘에 두신 이런저런 병적인 요소들을 사랑한다. 부디 저들에게 이와 같은 놀라운 질그릇의 축복을 알려줄 수만 있다면. 나는 예사로운데 유난히 내 곁에 나와 같이 마음을 상한 이들이 많다는 데서 주의 특별하신 은사를 짐작하게 된다. 내가 죽겠어서 나 역시 안정제를 한 알 물고 저의 말을 듣는다. 듣다 지쳐 주의 이름을 부른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곧 이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내게 있지 않음을. 왜 나의 기도, 어떤 은사를 하나님은 기어이 허락하지 않으시는지도 알겠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147:1).
오히려 어떤 어려움이 나로 주를 주로 바로 알게 한다. 가령 아침에, 이 평온한 시간에,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인데 말씀 앞에 앉아 묵상을 시작하고 묵상글을 쓰다보면 이 얼마나 좋은가? 한데 곧 얼마 지나지 않으면 잠에서 깨어난 육신은 발악을 하듯 의자에 앉은 몸을 불편하게 하고, 장마철이라 더욱 그렇겠으나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아파 연신 꿈틀거리며, 마음은 또 저 혼자 출렁거리다 기어이 안정제를 주워 삼켜야 진정이 되는 것을 매일 경험하면서. 아, 나의 몸도 마음도 나로서는 감당이 안 되는 것으로 오히려 감사의 깊이가 있다. 이 선한 싸움을 다하기까지, 오늘 시편의 고백처럼 ‘찬양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하는.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이 말을 하며 자신을 이해하려 했을 바울을 생각한다. 인간적으로야 얼마나 고달픈 시간이었을까?
나의 이 사소한 괴로움을 감히 언급할 수는 없으나, 씨름하는 일에서 하나님은 나로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알린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 곧 영원한 쉼, 나의 안식이 예비되어 있을 것이다. 다만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가는 동안 내 곁에 두시는 나와 같은 이들, 저 한 영혼을 두고 나의 고단함과 저의 서글픔이 중첩되어 눈물짓기도 하지만 반드시 이 길 너머에서 기다리고 계실 영광의 주를 바라본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2-3).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이미 그 자체로 치유되었다. 더는 나을 게 없다. 아이를 보내고 상대적으로 나의 어려움까지 중첩되면서, 이른 아침 누구의 장문의 내용과 저의 고마워하는 표현 앞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다가,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6).” 그렇지 않으면 나는 금세 마른 사막이 되어 푸석거리거나, 시커먼 개펄이 되어 질척거릴 거였다. 하여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욥 5:18).” 때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골고루 내리셨으니,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나로 날마다 주의 십자가로 가까이 나아가게 이끄신다.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4).
아무 것도 모르시는 바 없는 하나님이 가장 선하고 의로운 것으로 나를 채우셨고 그것을 또한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 1:7).” 이를 알게 하시려고,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 8:3).” 하나님이 먼저 알아주시는 것에 대하여,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9).” 나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심으로 죄를 멀리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내가 바라고 구하는 게 얼마나 실은 나를 위한 것이었는지를.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5-6).
겸손이 견고하여질 때 감사는 일상이 된다.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7).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즐거움이요, 기쁨이 된다는 것을.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8:12).” 하긴 예전의 나로 오늘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면, 나는 알곡 속에 감추어진 피와 같이 같은 색으로 자라지만 실은 그 속에 열매가 없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마 13:24-25).” 행여 나로 열매 없는 자 같이 가라지로 덧뿌려져 살까 하고. 나는 종종 주제 넘치는 생각도 한다. 행여 목사나 교회 지도자가 실은 가라지이면 이를 분간하지 못할 때 교회는 와해되고 말씀은 시들기 마련이다. 실제 얼마나 자주 그런 일을 겪거나 듣고는 하는지. 어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를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솎아낼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29).”
아, 내가 주 앞에 바로 선다는 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주의 응답에서 보다 침묵에서 주의 뜻이 심오하심을 깨닫곤 한다.
그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8-11).
주가 이루시는 일, 내가 하고자 하는 욕구. 이 둘의 충돌이 오히려 주의 사랑을 더욱 바라게 한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사 31:1).” 그런들 그 결과가 오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일 수도 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 하여 나로 하여금 사람을 따르고 저들을 예전처럼 구하지 않게 하시려고…….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12, 18).
주의 말씀으로 주의 성령이 이끄시는 것이 복이었다. 때론 내 뜻과 너무 달라서 내 안에 서러움이 어떤 복잡한 억울함이 나를 짓누르듯 옥죈다 해도,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모든 것이 주의 것이라는 것, 오늘의 이 슬픔도 역경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의 것으로 나를 보호하심이란 것을.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하면 반드시 주의 소용에 따라 사용하실 것이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7-28).” 그러므로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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