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전봉석 2022. 6. 23. 05:16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삼하 13:21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시 145:8

 

 

다윗의 장남 암논이 이복 누이 다말을 강간하고 모욕하며 쫓아내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를 알고 다윗은 노하였으나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2년 후 다말의 친 오라비 압살롬이 암논을 죽인다. 이 일로 다윗과 온 형제들이 슬퍼하며 통곡한다. 그 곁에 요나답이라는 사촌이 있고 저의 악한 꾀로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일련의 사태를 보며 모든 악의 총체가 이 한 장에 기술된 듯하다. 먼저 성적욕구를 다스리기 위해서도 일부일처, 결혼이란 제도를 하나님이 세우셨음을 되새기게 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이외 축첩은 사람들의 관계에서다.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잠 5:18).” 이를 지켜야 하고 다스려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일이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 19:16).” 이에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 13:4).”

 

한데 오늘 날 이와 같은 말씀은 적용이 어렵다. 사람의 욕구가 하나님의 신성하신 결혼을 묵살한지 오래다. 그럴 수밖에 없는 다양한 이유가 있듯이 음행과 간음에도 나름의 그렇게 된 계기들은 있다. 암논은 이를 무시하였고, 자신의 성적인 욕구를 사랑이라 여겨 시달림을 당했다. 이때 하필 그의 곁에는 간교한 요나답이 있었다. 저는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했고, 그의 꾀로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살인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잠 13:20, 27:6).” 곧 바른 친구 하나가 얼마나 우리 삶에 유익한지를 되새기게 한다.

 

곧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11).” 어떤 자와 어울리고 사귀는가에 따라 그의 영적인 삶에도 영향을 끼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3-14).” 예수를 나의 친구로 모시고 사는 삶이 복되다. 이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저를 보면 나를 알 수 있다.

 

바울은 여러 번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였다. 한데 가만히 살피면 모두가 자신은 십자가로 가까이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4:16).” 곧 저는 예수를 본받는 자로 살기 위해 몸부림 쳤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를 위해 저는 낮아지고 비워내고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였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결국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살전 1:6).” 이는 우리 믿는 자의 가장 귀한 유익이다.

 

이러한 말씀 앞에서 나는 좌절한다. 누구에게도 나를 본받으라 말할 수 없다. 가족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가끔은 오히려 왜 나 같은 자를 주의 종으로 세우시고, 이 귀한 말씀을 전하는 자로 세우셨을까? 하는 괴로움에 시달리기도 한다. 왜 하필 질그릇에 이 귀한 보물을 담으셨는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차라리 강철 그릇이나 금 그릇에 담으셨으면 좀 더 쓸모 있고 근사하게 주의 일을 감당하였을 텐데. 나는 과연 말씀을 바로 알고자 얼마나 애쓰고 수고하는지. 누구는 깨우침을 얻고자 하여 면벽수도를 하고, 실제 내가 목사가 되는 것을 나서서 반대하던 이는 목사를 그만두고 어디 산속에 암자인지 기도원인지를 짓고 혼자 들어앉은 지 수십 년인데. 모 중은 절간 앞 큰 바위만 40년 바라보며 수행을 하였다 하고….

 

그러니 감히 나는 누구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할 수 있을까? 감히 자식들에게조차 그런 말 할 자격이 없는데, 그런 자가 말씀을 전하고 누구의 일에 권면을 하고 주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증거한다는 일이 여간 낯부끄러운 게 아니다. 그러니 고민 없는 질그릇이 어디 있겠으며, 부끄럽지 않아 자기부인을 하지 않을 질그릇이 어디 있겠나? 왜 이 귀한 것을 하필이면 질그릇보다 못한 내게 맡기셨는지 알 것도 같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이게 어디 쉬운 일이겠나?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 3:17-18).” 날마다 내가 십자가 앞으로 가까이 하지 않으면, 영락없이 내 안에 암논이 또는 요나답이 들고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일과 같다. 이혼이 일반화되어 더는 흉도 아닌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그렇고 그런 감정이 사랑으로 둔갑하여 서로를 정욕에 따라 취하는 세상이니.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은 이 사실을 알고 다윗이 노하였다. 그리고 저는 아버지로서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다말을 위로하지도, 암논을 꾸짖어 벌하지도, 분노하는 압살롬을 달래며 경계하지도 않았다. 성경은 이를 두고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 13:24, 29:15).” 곧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이는 우리에게 맡기신 기업을 맡은 자로서의 엄중한 의무다. 그런데 오늘 다윗은 이 모든 사실을 듣고 분노하였으나 더는 아무 일도 행하지 않음으로 더욱 끔찍한, 나중에는 자신에게 화가 미쳐 압살롬에게 왕권을 잃는 결과에까지 이른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그러니 오늘 날 우리 사회의 폐단이 이 두 사실을 망각한데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이 정하신 혼약의 신성함을 상실하였고, 다른 하나는 자식을 훈계하고 교육하는 일에 모두가 무기력해졌다. 마치 매를 드는 것이 야만적인 일로 여겨지면서, 언제부턴가 사람의 가장 큰 위험은 스스로에 대한 자기 확신이다. 어찌하다 보면 될 줄 아는, 하면 된다는 정신이 기형적인 결과를 낳고 있는 셈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자신을 신뢰하는 마음을 두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모순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 3:7).”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는 일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은 서로 같이 할 수 없다. 다들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마치 사사시대를 살듯 그때마다 임시변통으로 사는 것 같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성경의 경고는 괜한 말씀이 아니다. 자신을 보면 악을 알 수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잠 8:13).” 스스로 할 수 있다 여기는 교만과 거만이 학한 행실로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멀리하게 한다. 이에 지혜서는 누누이 강조하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9:1).” 주를 아는 것이 명철이고,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여기에 장수가 있고,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수명은 짧아지느니라(잠 10:27).” 정직이 있어 패역을 멀리하게 한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하느니라(14:2).” 곧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일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한 걸음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27).”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 사망의 그물이 되는데, 주를 경외함으로 생명의 샘을 얻는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오늘 다윗 일가의 슬픔을 보면서 이를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잠 10:12).” 그러므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우리의 어쩔 수 없음 앞에 짙은 한숨만 나온다.

 

이에 오늘 시편이 위로가 된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145:1).

 

주의 다스리심과 통치가 없이는 단 한순간도 온전할 수가 없다. 곧 우리로 자신을 낮추게 하시려고 이 모든 귀한 보물을 나 같이 천한 질그릇에 담으셨다. 나는 자랑할 수도 내세울 것도 없는 자로,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이는 그저 막연한 겸양이 아니다. 무능함이니 의기소침함도 아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오직 주께 맡김으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고,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2-3).

 

이는 삶에서 얻는 경험으로 난다. 누구에게 들어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니다. 자신과의 다툼으로, 어떤 불의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철저하게 느끼면서, “ 나를 원수들에게서 이끌어 내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높이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삼하 22:49-50).” 주가 아니시면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을,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대상 29:13).” 성경의 많은 위대한 사람들은 그와 같이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이를 몸소 깨달았던 것이다.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권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

 

그들이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4-7).

 

은혜는 그 책임이 따름으로 빛을 더한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저마다의 헌신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결국 하나님의 확실하신 통치와 권능이 아니면 우리 삶은 속수무책으로 금이 가고 깨지고 쓸모없는 질그릇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33:8-9).

 

주를 경외함을 상실하면 자신을 신뢰하게 되어 있고, 자신을 믿음으로 그릇된 길도 옳은 길로 여기게 돼 있다. 사람들을 보게 되고 저들과 평준화하는 것으로 삶의 질을 따지는 것이다.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하신 절대적인 사랑을 우리는 스스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상대적인 것으로 전락시킨다. 이에,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145:8-9).

 

곧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아니시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이 사실을 망각할 때,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

(104:10-12).

 

우리가 하는 게 없다. 오직 주를 경외하는 것 외에. 이에,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107:9).

 

오늘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인류가 생존하면서 자행된 모든 죄의 원인과 결과는 주의 통치를 벗어날 때였다는 것. 고로,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

그들이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업적을 일러서

주의 업적과 주의 나라의 위엄 있는 영광을

인생들에게 알게 하리이다

(145:10-12).

 

한 구절 한 구절의 말씀이 우리로 거울 앞에 세우시는 듯하다. 거울 속에 괴물이 있다. 죄의 덩어리가 노려보듯 나를 쳐다보고 있다. 다른 누굴 탓할 게 아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이와 같은 바울의 절절한 설교가 귀에 들어온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13-16).

 

주의 나라, 주의 통치. 이를 몸소 삶으로 예배하지 못하는 삶이란 거룩과 상관이 없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 34:6).” 오늘도 참고 또 기다리시는 주의 은혜가 아니면,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계 17:14).” 곧 말씀 앞에 승복하는 삶이 복이다.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

(17).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18-19).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께 아뢰고 또 고하는 것뿐.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이는 곧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

(20).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하여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9).” 곧 있을 우리의 영원한 삶을 위하여,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원히 송축할지로다

(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