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히도벨이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의 조상의 묘에 장사되니라
삼하 17:23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시 149:4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모욕감은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이끈다. 아히도벨은 일만 군사를 내어주면 자신이 다윗을 뒤쫓아 죽일 수 있다고 왕께 고한다. 압살롬이면 들어줄 거였다. 그런데 후새의 말에 밀려 저의 지략은 채택되지 않았다. 이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성경은 알린다.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삼하 17:14).”
곧 오늘 이 모든 전쟁 같은 삶은 영적 싸움인 것을 알게 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어떤 일을 두고, 무슨 결정에 앞서 이 생각 저 생각이 다투며 더 나은 쪽을 선택하려 할 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우리 주님은 기도를 당부하셨다. 이는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4).” 어느 순간 잠시 한 눈을 팔 때 아차, 하면 이미 늦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
오늘 아히도벨의 결국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나약하고 한심한 존재인지. “아히도벨이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의 조상의 묘에 장사되니라(삼하 17:23).” 주의 뜻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증인으로 산다는 일이 얼마나 두렵고 힘에 겨운 일인지, 헨리 나우웬의 표현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바지랑대를 치우심’으로 우리로 주만 바라고 의지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8:10-11).”
이를 저가 알았더라면 그와 같은 모략도 그에 따른 좌절에 일체 주가 이루시고 다스리심을 알았을 터인데,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6).” 그야말로 요즘 같이 모든 게 그럴듯할 때이면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한다. 누가 나더러 유뷰브 개인방송을 권하였다. 좋게는 더 나은(?) 쪽으로의 권면일 텐데, 나는 일체 마음을 두지 않았다. 또 누구는 책을 내자하고 심지어 어떤 이의 ‘명리학 강의와 상담’ 채널을 알려주며 권하는데…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그야말로 요즘은 저마다의 명분이 넘쳐나고 나름의 신념으로 누군 이를 위해 싸우고 누군 저를 위해 싸운다. 누군 이이를 지지하고 누구는 저이를 지지한다. 마치 오늘 압살롬 앞에 둘러선, 당대의 내로라하는 장로들의 꾀와 아히도벨과 후새의 설왕설래를 보는 듯하다. 그러니 우린 무엇으로 싸울 것인지! 사사시대와 같이 우후죽순 오합지졸들 같이 이리저리 쓸려다닐 때도 하나님의 영이 힘 있게 붙드신 사람들은 있었다. 옷니엘이 그러했고,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삿 3:10).” 기드온이 그러했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6:34).”
시대가 아무리 어지럽고 세상이 어떠하다 해도, 입다에게는 주의 영이 임하셨고,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11:29).” 삼손의 거듭되는 그릇 행함에도 주의 영은 움직이셨다.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13:25).”,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으나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더라(14:6).”
앞서도 이사야의 증언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위해 싸우신다.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8:11).” 이를 안다면 조급할 거 없다. 나는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말이 오갈 때 그러려니 하고 듣고 말았다. 분명히 성경은 우리 사람의 길이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알리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나는 시험에 앞서 아이에게 권면하고 기도할 때에 그 결과를 두고 씨름할 일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중심을 두고 오늘 주신 이와 같은 시간을 최선을 다하는 것뿐임을. 결국 이히도벨의 최후가 이를 증거하고 있다. 우리의 담대함은 우리의 강인함으로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여기서 ‘모든’을 자칫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 앞에 선 자들은 주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이었다. 저들은 주를 떠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들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그런 자들 가운데 ‘모두’다. 하면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렘 32:27).” 우리가 보기에 서로 상대적으로 세상을 보니, 좌절도 절망도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지 실제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 그러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이는 믿음이 아니고 실제다. 일상이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게 사실이나 그렇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타협해야 할 일도 아니다.
우리 스스로 표준을 낮추면 망한다. 사람들이 이렇게 하더라. 다른 교회 목사들도 그러더라. 누가 그러는데… 하는 것들을 두고 나에게 적용하려 할 때 나는 경계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바울의 이와 같은 시건방진 말은 자신을 높이는 교만의 뜻이 아니다. 저에게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외에 다른 관심은 없었다. 저야말로 나름의 궁리를 더했다면 할 수 있는 게 누구보다 많았다. 저의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도, 또는 자신이 수학한 가말리엘 서원을 등지고, 인맥을 쌓고… 누구 말처럼 하나님의 일을 마치 비즈니스적으로 교회도 운영이 필요하고, 이 시대에는 남다른(?) 요령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말의 대부분이 그리하여 알려진 사람들의 유명세를 들고 있었다. 차마 뭐라 면박을 줄 수도 없어 그저 그러려니, 어찌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이에게는 할 말이 없다.
우리가 주를 경외한다는 것,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 3:7).” 이는 경계할 대상이 누구인지 분별하고 어떤 결정에 앞서 하나님의 능력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왕상 18:46).” 엘리야는 그럼 완전한 자였나? 당시 서슬 퍼런 이세벨을 상대하던 그가,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 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19:4).” 그러니 우린 다들 고만고만 할 따름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교회를 이루고 살리는 줄 아는데, 부흥 때는 늘 혹독한 시련의 시기였고, 침체기는 언제나 흥하였던 때이었다. 이는 교회사에도 나오는 역사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곧 성령으로가 아니면 모든 게 허사다. 잘 모르겠거든 묵묵히 주신 바 오늘을 준행하는 게 지혜이다. 곧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굳이 들리지 않는 귀에 대고 떠들어대는 일은 허무할 따름이다.
아히도벨의 최후와 가룟인 유다의 최후가 주는 교훈은 나름의 신념이나 이상은 개똥만도 못하다는 것이다. 결국 저들의 선택은 모멸감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었다. 부디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모르겠다, 나는. 누구와의 대화에서도 저의 권면이나 어떤 추천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지도, 그의 권면에 호응하지도 않은 것은 나는 ‘젖 뗀 어린아이 같이 엄마 품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처럼’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131:1-2).
하여 나는 바울 사도의 설교 중에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이 말씀을 자주 음미하고 되새긴다. 좋게 여겨 이 일 저 일 권하는 것으로 알지만,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이루게 하실 터. 나는 다만 오늘 주어진 사명으로 저 아이를 사랑하는 일에, 누구와의 만남이나 저의 이런저런 사연을 듣는 일로 족하다. 나는 내가 얼마나 감성적인 인간인지 잘 안다. 이래저래 해서 어제 오후에는 혼자 집에 있었는데, 자꾸 눈물이 나고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런데 실은 별 것도 아니었다. 점심을 먹고 누가 사준 무슨 크림이 잔뜩 올려진 커피를 아들에게 올려다 주려고 갔는데, 녀석이 점심을 혼자 먹고 소파에 모로 누워 잠이 들었다가 화들짝 놀라 깬 것이다. 더 자라고 이르고 슬그머니 나오는데, 그렇게 안쓰럽고 가슴이 아플 수가 없었다.
충분히 나는 나의 감정도 추스르지 못하고 사는 위인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려 엄두도 내지 않는다. 내게 두신 것,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하나님은 내게 어떤 위대한 일을 맡기심인데, 이는 세상이 기준하는 그런 천박한 것과는 다르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사 28:29).” 이를 인정함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 “내게는 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모든 의로운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잠 8:14:16-18).” 그럼 주는 누구신가?
“주는 책략에 크시며 하시는 일에 능하시며 인류의 모든 길을 주목하시며 그의 길과 그의 행위의 열매대로 보응하시나이다(렘 32:19).” 비록 뒤에 앉아 남몰래 울고 가슴을 쓰러가며 답답함을 주께 호소하는 일이 전부이나, 그래서도 저의 일을 주께 아뢴다. 누구의 말 못할 사연을 듣고 나는 감당할 수 없어 주만 부른다. 나의 나 된 것으로 힘에 부쳐서도 주를 찾는다. 젖 뗀 아이와 같이 주의 품에서만 안식할 뿐이다.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149:1).
시편을 보면 이와 같은 찬송은 필연적인 개인의 소임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아, 이 놀라운 사실, 나를 '하늘에 간직하신' 주의 긍휼하심으로 나는 오늘도 하루를 맡은 것이다. 고로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지어다
(2).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에 속한 자인가를 아는 것, “주는 은혜를 천만인에게 베푸시며 아버지의 죄악을 그 후손의 품에 갚으시오니 크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이시요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이다(렘 32:18).” 하면,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90:2).
이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그러므로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1:16).” 내가 아무리 모자라고 어줍고 한심하다 해도 주가 끝까지 이루실 것이다. 그러므로,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149:3).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
(86:12-13).
나는 누구보다 이를 인정하며 살고 싶다. 아니었으면 나는 아직도 내가 좋아하는 이들과 하나님을 꺼려하지도 두려워할 줄도 모르고 나 좋을 대로 살았을 터인데,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5).” 나의 하루가 기도와 찬송으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그러하기를.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149:4).
이는 하나님의 즐거움이다. 기뻐하심이고 주의 영광이다. 하여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곧 오늘의 나로 주 앞에 서는 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주가 이루시는 일에 있어 질그릇으로나마 그 쓰임에 합당한 자로 살 수 있다면…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이것으로 뭇 나라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그들의 왕들은 사슬로,
그들의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5-9).
오늘 시편은 오늘 나의 일을 되새기게 한다. 곧 내 안에 두시는 주의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다음은 나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하루의 날로 족한 것이다. 하면 나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다.’ 또한 나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다.’ 아닌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아닌 것이다. ‘이것으로 뭇 나라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그들의 왕들은 사슬로, 그들의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다들 몰려가 좋다 하는 것들에 대하여 경계태세를 갖는다. 하물며 목사에게 명리학을 공부해보면 어떻겠냐느니! 사주관상 풀이가 가당키는 한지….
믿음이 희석되고 신앙이 모호한 시대를 살면서,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롬 16:19).” 우리는 진리와 은혜에 지혜롭고, 세상적인 성공과 그 발판에는 미련한 자로 사는 것이 옳았다. 이는 곧 믿음의 선한 싸움이기도 하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게 능력이었다.
일련의 이런저런 나름의 권면과 사업계획을 두고 나는 뭐라 하지 않는다. 들을 귀 없는 자에게는 침묵도 말이다. 다만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그러므로 오늘 시편에서 우리의 영광을 두고 묵상하게 된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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