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전봉석 2022. 6. 30. 05:20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었더라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

삼하 20:1-2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시 2:11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은 하나 되기가 어렵다. 오늘 본문 초입은 19장 40절에서 이어지는 내용으로, 이스라엘은 다윗의 환궁을 두고 유다 지파가 단독으로 추진하는 것에 분열이 일어난다. 이를 다윗이 바로 잡거나 유다가 화합을 도모하려 하였다면 서로의 골이 깊어지지 않았을 텐데, 유다는 단독으로라도 일을 진행하였고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반발을 불러온다. “이스라엘 사람이 유다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하여 열 몫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 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19:43).”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베냐민 지파의 세바가 사람들을 선동하여 다윗에 대해 반란을 일으킬 조짐이다. 성경은 저를 ‘불량배 하나’로 기술하며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저가 나팔을 불며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하고 선동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의 말을 따라,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20:1).” 그렇게 서로의 감정은 골이 깊어지고 각기 분열하며 다시 다윗 왕국의 위기가 닥친다.

 

여기서 드는 생각이 저들이 각각 자신들의 공로를 인정 받으려는 데서 이와 같은 문제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룬 무엇을 두고 자신들의 수고와 그에 따른 업적을 붙들면 이분 오열 분란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는 우리가 주 앞에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는, 이 모든 것이 주의 은혜임을 잊을 때는 영락없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43).” 이때 의인이라 할 사람이 누구인가? 주가 의롭다 하실 뿐이지 우리의 어떤 남다른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구보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이가 바울이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어제도 누구와의 대화에서 ‘나 같은 죄인’도 이처럼 주가 쓰시고자 하면 그 쓰임을 다할 뿐이지, 내가 무얼 잘 하고 어떤 일에 능하여 사용하시는 게 아니라는 데 고백은 이루어졌다. 곧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나의 치부는 나를 부끄럽게 할 뿐이고, 나의 부끄러움은 나로 주 앞에 더욱 송구하게 할 따름이다. 이는 내가 하네, 못 하네 하는 나의 주장을 내세우지 못하게 한다. 오늘의 나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이 어렵다. 그야말로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8).”

 

지나온 나의 이야기를 할 때 부끄러움이 앞서면서도 오늘의 나 된 것에 감사하게 되는 것은 전적인 주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때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나로 참고 인내하게 하심 또한 주의 긍휼하심으로 가능하지 내가 남다른 참음과 수고가 있어서도 아니다. 분명히 성경은 강조하시길,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7-8).” 고로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는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함이었다.

 

이와 같은 마음을 잃으면 유다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서로가 자신들의 주장이나 분함에 함몰한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하는 자아도취에 빠져버리면 이는 늪과 같아서 헤어 나올 길이 없다. 실은 자기비하도 같은 맥락이다. 이에 바울은 나무라듯 서신에 썼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골 2:20-22).” 그런 거 보면 가로 막는 사탄의 전략도 참 가지가지다. 졸지에 사람을 옭아매듯 묶어버린다. 저가 한 발짝 더 주의 사역에 나서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을 풀어 어처구니없게 주저앉힌다.

 

누구는 말을 하다 숨을 고르면서 정신과 약을 먹었다. 나는 저의 심정을 알 수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생각은 몸을 지배하고 몸은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마음은 있으나 몸의 반응이 어렵게 하고, 몸으로 느끼는 체감도가 생각을 자꾸 고쳐먹게 한다. 그러는 동안 사탄의 전술은 전방위적으로 공격한다. 아이 일로 씨름하고, 친정 일에, 남편 문제까지… 저들을 포위하고 있는 것이 실은 자신들의 주저하고 안일함 때문이다. 거기에 대응하는 몸의 방식은 늘어지는 것이다. 자꾸 기운이 없고 어디가 아픈 것 같고(실제 아파진다) 그 이유로 은둔형외톨이를 자행한다. 그러니 몸집은 비대해지고 어디 안 아픈 곳이 없고, 실제 피부병부터 이런저런 병치레도 생겨난다. 나는 저의 말에 하도 답답하여 평소 내가 들고 다니는 필통을 꺼내보였다. 그 속에는 위장약부터 온갖 진통제와 함께 종류가 다른 안정제까지… 그것은 몸을 이기지 못하면 마음을 잡을 수가 없고 마음이 붙들리면 올곧은 생각은 흐지부지 되어 흔들리게 되어 있다.

 

그렇게 말씀은 멀고 현실은 몸을 지배하니, 영혼을 길들이고 다스리지 않으면 헤어날 길이 없다. 이처럼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 나의 몸은 통증을 호소한다. 슬슬 요령을 부린다. 좀 더 눕고 싶고 찜질을 하고 늘어져 늦게까지 자고 싶다. 하지만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규칙적인 시간에 따라 내 몸을 무시한다(해야 한다). 힘들다고 아우성이면 진통제를 먹이고, 고약하게 마음을 어지럽히면 안정제라도 삼키면서라도, 나는 일단 몸을 이겨낸다. 저에게도 말하길, 그러다 죽으면 영광이지 않겠나? 그러니 주의 일을 감당하는 데 몸을 쳐 복종시키는 것이다. 잘하고 못하고는 없다. 다만 주가 오늘을 다시 허락하셨으니, 감당해야 할 하루의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누굴 만나고, 설교문을 작성하고, 누구와 통화를 하거나 줌으로 연결해서 이런저런 일을 살피고 같이 기도하는… 우리에게 맡기신 게 그런 것 아닌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실 때, 과연 우린 ‘네!’ 하고 대답한 사명자들이 아니던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말씀드리면 영락없이 돌아오는 말씀이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내 양을 치라.” … “내 양을 먹이라.” 주는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과 당부를 하심인데, 그 대답은 실천으로 가능하였다(요 21:15-17).

 

나는 어제 누구와의 만남에서 이를 알게 하고 싶었다. 자주 들어 남의 이야기로나 들리면 할 말이 없지만, 나에게 던지시는 질문과 그에 따른 답이라면, 이에 나는 나의 몸이 나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규칙적인 시간과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정도보다 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여기서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간격은 애매하게 멀고도 가깝다. 누구에게 물으면 저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된다는 주장인데, 나는 이제 그보다 앞세워 ‘해야 할 일’을 우선에 둔다. 이는 전적으로 개인적 나의 문제라 해도 할 말은 없다. 다만 나는 내가 알기로 ‘할 수 있는 걸 해’ 하면 점점 그 범위를 축소하려 든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음을 수시로 드밀며 사탄은 속삭인다. ‘그래도 할래? 이런데도 할 수 있겠어?’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때 나는 몇 번 주저해보고 알았다.

 

사람은 자고로 자신을 이길 수 없다. 그때 붙든 게 규칙적인 삶이다. 누가 오든 안 오든, 해야 하든 말아야 하든, 할 수 있든 없든,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우선하여 ‘내가 해야 할 일’을 우선하는 것이다. 누가 보든 안 보든 나는 묵상글을 쓴다. 그것도 아무 때나 해봤더니 것도 아니다. 가장 이른 시간, 내가 처음 눈을 뜨고, 그러면서 나의 새벽 묵상은 ‘습관’이 되었다. 묵상글을 쓰면 교회로 나간다. 누가 오든 안 오든, 할 일이 있든 없든, 그런저런 게 아무런 걸림이 되지 않는다. 그럴 때 어디가 아프다, 오늘은 어디 어떻게 하는 따위에 나를 놓아두지 않는다. 두통약부터 위경련약까지 나는 내 몸의 요구에 굴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몸의 요구는 항상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 6:10-11).” 이로써 몸도 상하고 마음도 심령도 병들게 돼 있다. 우리 영혼의 곤핍은 자신이 허용한 정도이다.

 

오늘 일련의 사태를 보며,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존심이나 유다 지파의 자만심이나 결국은 서로를 적대시하고 공격하는 것 외에 달리 해결이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2-3).” 그의 안에 무엇보다 신랑을 싫어하고 거부하는 마음이 그처럼 강하니, 또 이를 본능적으로 느끼고 저의 남편은 없던 병도 끌어들여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응석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니. 나는 저로 주 앞에 서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의 본질을 당부하는 것밖에 없었다. 들어보면 다들, ‘그럴 수밖에 없는’ 수천가지의 이유로 온 몸을 감싸고 자신이 자신을 보호하는 데 급급할 따름이다.

 

그런 우리에게는 말씀이 있지 않나!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하여, 요번에 남의 줌 아이디를 빌려 쓰다 월정액을 내고 우리 교회 것을 만든 김에 두 부부가 나와 같이 묵상을 나누고 성경을 나누겠나? 하고 권하였다. 하고 안 하고는 내 몫은 아닐 테고, 오늘 오는 새로운 누구로 인해 어제부터 긴장을 하고 초조감을 느끼기도 하면서, 고질적인 반응인 부담이 나를 또 못 살게 굴지만… 그런 것이다. 사탄은 늘 미루고 ‘다음에’ 하고 속삭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증상을 가져다 몸을 흔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또한 주의 일인 것을 직감할 수 있다. 딱 보면, 몸이 주저하고 마음이 어려워지면 영락없다. 우리의 약점을 교묘하게 쥐고 흔든다.

 

결국은 겸손으로밖에는 이 길을 내딛을 힘이 없다. 겸손은 나를 낮추는 일인데, 나는 지나온 날을 돌아보며 고개를 숙인다.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0-11).” 하면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이에 오늘 시편은, 소란스럽게 허사를 꾸미는 세상의 정체, 우리 몸의 반응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2:1-3).

 

사역을 감당했으면 하는데, 뜬금없이 요양사를 따고 다음은 간호조무사자격증을 따야 한다고 하는 말에 나는 뜨악하였다. 회피는 무턱대고 도리질 치는 게 아니라, 참으로 합리적인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돌아서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따르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삼상 12:21).” 이를 누가 이른들, 자신이 결심한들 되겠나? 굳이 그럼 사명자로서의 삶을 고집할 것은 아닐 테고,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 6:27).” 우리 나름의 방향이 하나님이 지목하시는 곳이면 참 좋겠는데,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난들 나은 게 있어서 누구더러 권하겠나? 누구보다 못한 위인인 것을 내가 날 더 잘 아니까,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그야말로 나를 쳐 복종하게 함인데,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나는 가끔 지금의 내가 가장 쉽다. 오는 이나 가는 이에 대해 연연해하지 않고, 무슨 일을 하되 그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고, 심지어는 나의 옹색함이나 옹졸함으로 실수를 했다 해도 연연해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는 것은,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4).” 주가 다 알아서 하실 것임을 믿는다. 다만 나는 어줍어도, 빙충맞아도, 보잘것없어도 주만 바라며….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4-6).

 

주가 이루실 것이다. 나는 개떡 같이 하는데 주가 찰떡 같이 빚으실 것이다. 나는 엉터리지만 주의 뒤로 숨을 뿐이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2-33).” 그러므로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계 11:15).” 주가 다 책임지실 것을 나는 이제 확신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7-9).

 

그러니 우리를 망치는 것은 우리의 고집 때문이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나는 다만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그렇다면 이제 어찌해야 할까?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10-12).

 

말씀만 의지하며,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나는 이제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음으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어차피 두려움은 따라다니는 것이고, 그래서 숨이 막힐 정도이면 주께 호소하면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주만 바라며 하루 또 한 발 앞으로 나아갈 따름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하심처럼,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 1:22).”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