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워 다윗 성에 장사되니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십 년이라 헤브론에서 칠 년 동안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다스렸더라
왕상 2:10-1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시 8:1
다윗의 업적이 어떠하든지 그의 생을 정리하면 서너 줄에 족하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살았다는 므두셀라 역시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라(창 5:25-27).” 하는 말로 정리가 된다. 어찌 살고 어떤 업적을 남겼든지, 인생은 그리하여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하는 솔로몬의 정의가 유익하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3).” 결국은 죽고, 죽음으로 주 앞에 서야 하는 일인데,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4).”
오늘 다윗의 죽음을 기술한 내용이 기타 여러 구술된 내용보다 마음에 남는 것도,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5-7).” 만물은 그 순리를 따를 뿐이었다. 여기서 바울의 설교 중 가장 마음을 두게 되는 구절 가운데,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곧 우리 인생의 위대함이 무엇이고 그 중요한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천하의 다윗도 그 인생을 정리하니 “다윗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워 다윗 성에 장사되니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십 년이라 헤브론에서 칠 년 동안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다스렸더라(왕상 2:10-11).” 하는 서너 줄이면 족하였다.
이때 저의 오늘 시편이 마음을 오래 붙든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시 8:1).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데 있어 몇 년을 살든지,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73:24-26).
이와 같은 마음과 고백으로 산다면 그보다 더 값진 삶이 있을까? 영국이 사랑한 희극배우이며 극작가인 버나드 쇼가 죽으면서 저의 묘비명으로 남겼다는 말,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하는 위트 있는 말이 여운을 주는 것도 그래서다. 마치 앞으로 잘하면 될 일처럼, 천년만년은 더 살 사람처럼 누리고 소유하기를 바라나 어떤 이는 터무니없는 나이에 죽음을 맞는가하면 어떤 이는 구십수를 넘겨 살다 가는 경우도 있어, 누군 이를 호상(好喪)이라 한다. 그러나 모든 죽음에 호상이 웬 말이겠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며 그 수(壽)를 누린 뒤에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우리에게는 죽음 너머의 나라, 다윗이 바라보고 있는 길로 간다. 오늘 본문 2절에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말한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왕상 2:2).” 아무도 이를 피할 수 없고 무시한다고 찾아오지 않는 길도 아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 14:32).” 이 또한 솔로몬의 격언이다.
그러므로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1).” 이는 모든 산 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죽음 너머의 생을 준비하고 소망하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경우다. 하여 저는 부르심에 합한 자가 되어 말하기를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하고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22).” 곧 우리가 이 땅을 살며 생을 붙들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럼에도 크게 미련을 두지 않는 까닭은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리 걸어간 길이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 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이를 붙들고 산다는 일,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는 것은 이를 힘써 지키는 일이었다.
다윗의 생은 이를 보여주고 압축된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구구절절한 내용이 가득하나 그 또한 정해진 연한 속에서의 일이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노인 바울의 마음은 주를 더욱 바라게 한다. 고로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 6:11-12).”
하면 우리가 남겨줄 수 있는 유산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무언가?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이른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 2:3).” 돌아보면 나의 형제들에게 가장 값진 것은 모두가 부모의 신앙을 계승하는 것은 물론 고스란히 그와 같이 주의 길을 가는 것이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면 모두가 이를 부러워하는 것은 만세수를 누리며 금은보화로 장식하고 산다한들, 죽음을 앞두고는 모두 하나의 얼굴로 일그러질 따름이다.
이에 나의 기도제목도 우리 아이들이 모두 주의 쓰임에 합당하기를 구한다. 회계사가 되겠다고 열을 올리고 공부하는 아들에게도 은연중에 나는 가족예배를 드리면서 기도로 말씀으로 부탁한다. 무엇을 하고 어떤 자리에서 살든지 주를 경외함으로 그 일의 가치를 주의 영광을 위해 하기를. 비록 세상에서 세상일을 수행하며 사는 직업이라 해도 다니엘과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이 이방나라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으나 저들의 정치 권력 한 가운데서도 당당히 그 신앙을 지키고 살았던 것처럼, 오바댜나 요셉과 같이 주의 뜻에 합한 자로 얼마든지 이방나라에서 그 신앙을 지키며 주의 쓰임에 합당할 수 있다.
우리 교회를 후원하는 어느 집사 내외가 있다. 아내는 약사이며 겸임교수로 일하면서 주일이면 주일학교 교사를 감당하고 늘 그 중심에 하나님을 두고 산다. 남편은 소위 상위 1%의 연봉자로 대기업을 두루 섭렵하고 얼마 전에는 카카오로 옮겼다. 저는 교회에서 청년부 교사를 자청하여 손수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 대접하기를 좋아한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 데 있어 직분과 자리가 문제가 아닌 것이다. 시대나 삶의 질고 또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같은 처지의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고도 누구는 그의 안에 주를 경외함으로 보내신 자리에서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이다.
오늘 다윗은 먼저 아들 솔로몬에게 당부하는 것도 그것이다. 믿음의 계승과 신앙의 유산보다 더 귀한 것이 또 있을까? 자식들 명의로 아파트 한 채씩을 남기고, 저들 살만한 재산을 어느 정도 남기고들 가는 게 꿈이라 하나, 그런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 이제 나는 누가 찾아오고 어떤 일로 곁을 같이 하게 될 때, 저에게 바라는 한 가지 주의 자녀로 누리게 될 이 세상 너머의 일을 두고 씨름하고 싶다. 나도 안다. 원하는 마음은 있으나 육신은 약하여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보면 내가 어쩔 수 없는 이에 대하여는 애쓰지 않는다. 나도 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5).”
이와 같은 고뇌와 갈등을 겪으면서 우리의 겉사람은 늙어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을 감사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그런데 세상이 참 좋다. 당장 좋은 게 전부인 것 같다. 그것만 있으면, 그 사람으로만 자신은 모든 걸 잃어도 좋을 줄을 안다.
가끔 생각나는 누구도 교회를 등지면서 하는 말이 자신만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에 가면 무엇이 행복하겠나?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들은 모두 지옥으로 간다면… 하였다. 그리고 십여 년쯤 흘렀을까? 얼마 전 모처럼 안부전화가 와서 어찌 지내는가? 하고 물었더니 부친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같이 어디 외곽에 나가 산다는 말을 하였다. 나는 놀라서 남편은? 하고 물었더니 이혼소송 중이고, 아들은 벌써 군대에 갔는데 아버지 쪽을 택하였고, 딸애가 자기 곁에 남아 같이 무슨 가게를 한다나. 그러니 고작 10년이었다. 나는 뭐라 말을 더할까 하다 조만간 찾아오겠다고 하여 더는 말을 접었다.
부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우리가 생을 마치면서 사랑하는 남은 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말 중에 가장 귀한 게 아닐까? 우리는 말씀으로 전생애를 걸었다. 누가 비아냥거리듯 말한 것처럼 성경이 다 거짓이고 사람의 창작에 불과했으며 정작 죽었는데 하나님이나 천국 따위는 없다면 어쩌겠나? 나는 그때 말했다. 있는 줄 믿고 준비하며 살다 간 나와, 없다고 여기며 살다가는 네가 죽음 너머에서 같이 만났다면 어떤 게 더 황당할까? 모든 게 거짓이라 여겨 믿지 않고 살다 왔는데 하나님도 천국도 사실이라면? 그때 넌 어쩌겠나? 하지만 만일 네 말마따나 아무 것도 없이 무로 돌아간다면 너나 나나 다를 게 없으니 서로 또한 억울할 것도 없지 않겠나?!
여기서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말씀이 적합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4-27).” 죽음으로 모든 게 끝이라면 내남없이 그저 끝이다. 없을 무(無) 자 안에서는 억울할 것도 충만할 것도 없다. 그저 없음은 의미조차 없다. 그러나 말씀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16:8).
그래서 믿음과 신념은 다르고, 이상은 현실과 다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삶을 사랑하고 배우며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것은 이 땅의 것으로 족하다. 내가 아는 어느 젊은 의사는 병원을 그만두고 죽음을 연구하며 사후생에 몰두한다. 저의 첫 번째 과업은 어떻게 하면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너머의 세계는 어떤 것으로 대비해야 할까? 하는 것이다. 죽음에 좋은 죽음, 나쁜 죽음이 따로 있다는 전제로 연구하는 저의 연구가 가소롭고, 성경을 부인하면서 사후생을 운운하는 것이 또한 어이없다. 그러니 저의 연구는 공허하고 그 주장은 허무할 따름이다. 세상에 호상은 없고, 죽음은 오롯이 그 당사자의 몫이다. 이를 또 누구는 안락사를 운운하며 죽음의 고통을 피해보려 하는데, 죽음의 질은 이 땅의 덧없음이고 사후생의 결정은 전적인 전능자의 주권이다. 죽겠다, 죽겠다 하면서도 기를 쓰고 살고, 하루라도 더 살고자 하여 이승의 개똥밭이 저승보다 낫다고 여기는 게 인간이고 보면, 생에 대한 집착은 백수를 누렸다 하여 호상일 수 없다.
오늘 본문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람들 이야기는 마치 인과응보와 같아서 뭐라 거론할 마음은 없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질 새로운 내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6-7).” 이에 바울은 간절한 것이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이를 그대로 오늘 시편의 찬송으로 이어보면,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8:1-2).
하여 하나님은 질그릇 같은 우리로 이 보물을 담고 살게 하셨으니 겸손을 더하신 것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하여 질그릇은 쉬 깨지고 금 가기 일쑤여서 남들보기엔 그 속에 담긴 보화도 하찮게 여겨질 것인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6:8-10).” 이는 나름 가졌다고 자부하고 이루었다고 자부하는 자들로 알게 하려 하심이다.
고로 우리는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 중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로다(사 44:23).” 이는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그러므로 하나님은 일부러 나 같은 자로 주의 일을 감당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8).” 누가 주 앞에서 자랑하며 자부하고 살겠나? 앞서 어느 부인의 고백처럼 십년도 못 갈 사랑을 가지고 천국 가는 것을 운운하며 교회를 떠나서라도 기꺼이 자기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같이 지옥으로 가겠다니, 몰라도 너무 모른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그러니 누구는 의지가 약하고 기댈 데 없는 자들이 신앙을 붙들고 사는 것이라 오해하는데, 저들의 용기가 가상할 뿐이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 40:26).” 그러므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3-4).
그럼에도 주의 인간사랑은 참으로 눈물겹다. 이에 솔로몬은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저의 격언이다. “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6-8).
만물의 영장이라 하고 지음 바는 소임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그야말로 그의 사후생은 눈에 선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임하신 날들이다.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창 9:2).” 오늘 우리에게 더하시는 날의 이유다. 살아야 하는 생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액 3:7-8).” 부디 스스로 자기 혀를 다스려 입에 물고 찬양하기를,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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