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전봉석 2022. 7. 7. 05:12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왕상 3:9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 9:10

 

 

솔로몬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첫 구절이 마음에 걸린다. 저는 정략적으로 애굽 바로의 딸과 결혼을 한다. 애굽 21대 왕조 마지막 왕인 프수센네스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35년간 애굽을 다스렸다. 당시 근동 최강국인 애굽을 먼저 선택한 것이다(1-3). 본문의 다음 기사는 아직 성전이 없어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다는 내용이다. 물론 산당에서라도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것을 주목할 수 있으나 이 글의 저자는 의도적으로 애굽과의 정략적인 혼인관계를 지면 앞부분으로 설정하는 것과 아직 성전을 지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산당에서 제사하였던 내용을 이어서 썼다. 어떤 숨은 의도가 느껴진다.

 

이어지는 내용은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다는 것과 하나님은 저를 찾아오셔서 무엇을 원하는지. 이에 저는 자신의 안위와 부귀영화를 구하지 않고 주의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구하였다는 것. 후반부에 실은 이 사실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다. 그로 인해 하나님 놀라운 지혜와 축복을 더하셨다(4-15). 그리고 이어지는 에피소드는 두 여인이 한 아이가 죽자 서로 자기 아이라 주장하는 내용에 대한 기사다. 이를 지혜롭게 판결하여 결국 아이를 모친에게 돌려주는 내용인데, 저 두 여인이 창기였다는 데 또한 저자의 숨은 의도가 있을 것 같다. “그 때에 창기 두 여자가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13).” 이와 같은 심리로 백성들은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음을 두려워한다.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28).”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였고, 그 숨은 뜻은 성령의 감동으로만 읽고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항상 하나님의 시각으로 읽어야 하고 그 의도를 묵상해야 한다. 곧 솔로몬의 첫 기사가 주는 맥락이 훗날 저의 노년에 저지를 일들과 무관하지 않게 여겨진다. 마치 오늘 한 장의 내용은 저의 일생을 단숨에 압축하고 있는 것 같다. ‘솔로몬이 애굽 바로의 딸과 결혼 동맹을 맺었다.’ 물론 근동 최강국의 사위가 되었다는 데서 이스라엘의 위상이 어떠한지 짐작된다. 애굽과 이스라엘 사이에 대적 바벨론이 있다. 주변 강대국과의 정략적인 관계가 적국을 고립시킬 수 있는 전략인 것은 분명하다. 한데 이를 시작으로 저는 주변 안 믿는 이방국가의 왕족들을 후비와 빈장들로 들여서 일천 명의 처를 둔다. 결국 이는 저의 노년에 그 마음이 흐려져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화근이 된다. 일천번제와 일천 명의 후궁이라… 다소 어폐가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다윗도 늘 사울에게 쫓기던 때에 한 번은 적국 블레셋 아기스 왕에게 망명하여 1년 4개월을 은신한 적이 있다.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삼상 27:4).” 그 일로 안전은 도모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도우심과 함께 하심을 잃고 스스로 미친 체 하며 구걸하는 듯 사는 수모를 겪었다. 이를 보면 우리 역시 누구라도 완전할 수 없고, 자긍해서는 안 된다. 앞서 왜 두 여인을 창기라 표현하였을까, 묵상하면 우리의 옳고 그름을 떠나 모두는 왕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성경은 일러 이는 모두 스스로가 자처한 일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너희는 너희를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너희의 하나님을 오늘 버리고 이르기를 우리 위에 왕을 세우라 하는도다 그런즉 이제 너희의 지파대로 천 명씩 여호와 앞에 나아오라 하고(삼상 10:19).”

 

성경은 우리의 표준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적이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다. 번역이 어떻고 시대적으로 언어가 어떻고 하는 소리는 부수적일 뿐이다. 본질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이 모든 사실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것이고, 천하의 두 인물 다윗과 솔로몬 역시 결코 저들은 완전할 수 없었고, 비천한 중에 하나님이 항상 먼저 찾으시고 돌보시었다는 데 초점을 맞추게 한다.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 3:5).” 곧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적이며 절대적으로 그가 예정하시고 택하신 자를 두고 향한다.

 

바울은 이를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앱 1:4-5).” 칼빈은 이를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하였다. 하여 우리의 영적인 구심점이 필요하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결코 누구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지 않다. 그 속에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하여 여러 꾀를 낼 뿐 저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왜냐하면 싫은 것이다. 나름 주도적인 삶을 추구하고 그에 얻는 자긍심을 사랑한다.

 

늦었지만 저는 꿈을 이뤄 자기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땄고, 모교에서 아직은 강사신분이나 교수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여러 사회적 활동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이제 세 번째 학기로 아이들 성적을 내고 이의제기를 받는데, 나름 타당하지 않는 이의와 그에 따른 불만이 몇 개 터져 나왔다. 이를 학과장이 막아주고 무마하여 별의 별 학생들이 다 있다는 쪽으로 저를 인정하고 모든 절차에 문제가 없었음을 인정하였다. 한데 저는 이를 수용하기가 어려웠다. 급기야 전에 왔던 공황이 다시 왔고, 운전 중에 안정제를 물도 없이 씹어 삼키며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저는 전화를 하여 이 모든 것을 머리로는 이해가 가고 가슴으로도 아이들을 사랑하는 게 확실한데, 자기 스스로 완벽하게 일처리를 하지 못한 것 같아 괴로워했다. 생각보다 심각하여 이는 자존심의 문제로 그 일이 해결되었는데도 수차례 오류가 있었나 검토하였고, 자신은 딱히 자신은 그와 같은 이의를 받을 만한 실수를 한 데 없다는 결론과 그 아이는 엄마를 앞세워 익명으로 학교 게시판에 이와 같은 문제제기를 하였는데, 익명이라 하나 그 학생이 누군지 눈치껏 다 알겠고, 그러니 다음 학기에 저를 어찌 대해야 할지… 난감해하며 내게 물었다.

 

나는 그때 바울 서신의 모든 서두가 기도로 시작하였고, 저들을 축복하는 것으로 글의 전개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였다. 가령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빌 1:1-2).” 앞서 누구의 예처럼 즉 우리는 인생의 잘잘못을 떠나 온갖 문제의 연속이란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곧 우린 모두 창기와 다를 바 없는 죄인들이다. 한데 사람 관계나 자기 자부심의 문제는 죽을 때까지 해결이 안 난다. 이는 내가 저보다 낫다는 자긍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할 때 이 모든 것을 낱낱이 주께 고하는 것. C. S. 루이스의 말처럼 ‘문제를 가지고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그 문제를 다 해결해주시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문제로 기도를 하는 것은 주께서 뜻을 바꾸시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우리의 판단과 생각이 바뀌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는 것은 그게 필요해서이다. 또는 필요 없는 문제여서이다.

 

극단적으로 IS에 잡혀간 선교사와 복음 전하는 이들을 두고 전세계가 기도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저들은 목에 칼을 그어 무참히 살해하였고 이를 중계하였다. 그때도 하나님은 저들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나았다. 도대체 우린 하나님의 섭리나 경륜을 알 수 없다. 이해는커녕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그것까지도 성령으로가 아니면 기도도 할 수 없다. 누구보다 바울은 이를 잘 알았고, 저는 모든 일에 앞서 기도로 주의 은혜를 먼저 구하였고 이를 축복하였다. 정리하면 우리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들어주실 수고 있고 들어주지 않으실 수도 있다. 문제를 안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로서는 숙명이다. 한데 들어주지 않는 기도는 그만한 뜻이 있으셔서이다. 이를 알면서도 그 문제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길 바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뜻을 바꾸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함이다. 

 

때론 기도 가운데도 삶은 위축된다. 앞서 모 교수는 기도하는 사람이다. 여러 자신의 문제뿐 아니라 중보를 안고 교회에 마련되어진 개인기도실을 찾기도 한다. 기도 굴속에 앉아 하염없이 울기도 하고, 간절함으로 바라고 또 구한다. 일련의 사태는 저로서 납득이 안 된다. 스스로 결론을 내린 바, 자신의 교만 때문이란 것도 안다. 자긍함과 자부심을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스스로 이를 인정하기가 그처럼 어려운 것이다. 나는 이른 아침 저와 통화하며 성경을 뒤적였다. 다음은 베드로의 전언이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곧 경건한 자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시는데, 어떤 시험인가 하면,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곧 불의하고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는 자들의 것(벧후 2:9-10)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한 것이다. 자긍은 스스로 가지고 사는 긍지다. 긍지는 자기 능력을 믿는 당당함이다. 오늘 이 사회가 바라는 것이니 성경과 배치된다.

 

저는 아직 미숙하였든지, 경험이 부족해서였든지, 학생들의 성적에 대한 이의제기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하여 학과장이 나서서 일을 무마하고 수습하였고, 거기에서 구겨진 자존심으로 종종 끼치던 공황이 것도 운전 중에 훅하고 들어와 알프람 0.5를 맨입으로 씹어 삼키며 억울함을 호소한 것이다. 나는 저의 말을 듣다, 다시 바울의 기도로 초점을 맞추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빌 1:2).” 곧 우리의 기도는 어떤 개인적인 문제를 안고 씨름하는 게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이고, 이는 우리가 주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먼저 구하여 기도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의 ‘은혜와 평강’을 말이다.

 

문제없는 인생은 없다. 오늘 솔로몬의 첫 통치 기사에서 첫 구절은 이를 내포한다. 저가 한 일은 먼저 애굽과의 정략적인 혼인관계이다. 다윗도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저를 두고 하나님은 그 마음에 합한 자라고 인정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자는 이를 안다. 그의 사랑은,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7-8).” 이를 마음에 담고 사는 일은 ‘은혜와 평강’의 상관관계를 잘 안다.

 

은혜 없이 믿음도 없고, 은혜 없이는 구원도 없다. 전적으로 우리가 사는 모든 범사의 일은 은혜 가운데 이루어진다. 심지어 IS의 손에 목이 베임을 당해 죽는 선교사와 그 일행의 억울한 죽음도 하나님의 뜻에 합한, ‘그만하면 됐다’ 하시는 주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했고, 저들을 세상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8).” 곧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이해 받고 인정받으려는 사람들이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안정제까지 삼키고 전화를 한 누구에게 나의 이 말씀을 전함이 옳은 것인가는 나도 모른다. 그랬구나, 하고 위로 받고 싶었겠으나, 누구보다 바울은 그런 자신과의 싸움에 치를 떨었던 사람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누가 저의 절규에 동감한다면, 우린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곧 우린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이와 같은 고군분투에서 별개일 수 없다. 물론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꺼려하는 사람에게는 이 말이 너무 과하다. 한술 더 떠서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21:1).”

 

육신의 일로 씨름하는데 이를 주께 예배로 바치라니! 누가 주의 사역을 두고 사람을 두려워하여 주저하면서 여전히 미루고 또 뭉개고 있는 터에, 축복은 인내를 통해 온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 누군들 환난을 즐거워할까. 그러나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나는 종종 나의 숨긴 패를 다 까듯이 안정제 두 종류와 가슴 두근거리며 호흡 곤란으로 빈맥을 잡기 위해 정신과 약을 먹으면서, 사람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고 그게 여의치 않을 때 마음이 어렵다가 결국 또 약을 삼킨다.

 

이어서 온 모처럼 만의 편한 친구와의 통화였다. 이런저런 사소한 이야기로는 그런가보다, 하고 만다. 한데 저가 안수집사가 되었는데도 술, 담배를 의지하고 여전히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사는 데 대해 듣기만 할 수는 없었다. 것도 그리 일방적으로 결정이 된 교회를 탓하며 조용히 믿고 싶은(?) 자신의 뜻을 피력하는 것이다. 나는 대뜸 저가 하나님을 믿기는 하는지? 신앙이 무어라 생각하는지? 왜 겁 없이 주의 일을 두고 그리 여기는가? 하고. 차라리 안수집사 직분을 거절하던가, 그리 교회 운영이나 설교가 못마땅하면 교회를 옮기든가…. 이어지는 나의 말에 저는 굳이 듣고 싶어 하지 않았고, 뜨악한 듯하여 말하다 말았다. 가장 친했고, 뭐든 다 우린 철들지 않고 낄낄거리며 놀던 때도 있었다. 통화를 끊고는 내심 마음이 어려웠고, 가장 잘 어울리던 사람들과 가장 어려운 사이가 된 것에 대해 나 역시 그야말로 공황이 오는 듯하였다. 그때 말씀이 붙드신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어떠하든지 우린 앞으로 나아간다. 여전히 자신 고집과 자긍함으로 이를 포기하지 못해 목회를 미루고, 또는 죽어라 하고 문제만 갖고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그런 데서 오는 불만과 시행착오로 주를 실망하면서… 늘 그 자리를 맴돌듯 광야를 벗어나지 못하는 성도들도 수두룩하다. 아,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사 43:2-3).” 곧 주의 ‘은혜와 평강’이 아니면 살 수가 없다. 그러니 다들 자기 나름의 만족을 찾아 기를 쓰고 산다고 사는데, 사는 게 지옥이라. 하나님만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별 수 없는 노릇이라, 내가 입씨름을 하듯 친구와 통화를 하고 서로 만나 무슨 말을 한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2-13).” 나 역시 주의 영이 아니시면 어림도 없을 은혜와 평강인 것을. 누구를 나무란다고 될 일도, 스스로 구한다고 얻어질 것도 아닌 것을. 아무리 구하여도 주시지 않는 덴 이미 충분하여서다. 혹은 잘못 구하여서다. 이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하면 우리 기도의 제일은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성취되기를.’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우선이 전부였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나머진 저절로 해결된다. 숲을 못 보는 것은 당장 코를 박고 있는 나무만 보기 때문이다. 문제로 문제 삼으면 정작 문제가 뭔지도 모른다.

 

기도는 우리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설정하게 한다. 오늘 솔로몬을 두고 저가 구한 바,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하는 저의 기도가 “… 주의 마음에 든지라(10).” 나머지는 문제도 아니었다.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11-12).” 하시며 저에게 부귀와 영화도 더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든다는 것,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시 9:1).

 

오늘 시편은 이 한 구절로 주의 마음을 붙든다. 전심(全心)으로란 온전한 마음으로다. 곧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우리가 서로를 생각하는 수평적인 평안은 앞서 내가 주를 생각함으로 범사에 우리 주의 이름으로 얻은 수직적인 은혜로 가능하다. 곧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이로써,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2-3).

 

내 원수, 저는 먼저 나 자신이고 그것이 자긍심이든 자존심이든, 그것으로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누구는 주 앞에서, 누구는 주를 등지고, 누구는 오히려 찬송으로, 누구는 마땅히 원망함으로… 감사를 얻거나 잃거나.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신 8:10).” 우리의 만족함은 주의 말씀으로밖에는 없다. 나는 이어지던 가까운 친구의 앞날을 두고 저의 이런저런 구상을 들으며 뭐라 말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상하고 답답하였다. 제2의 인생을 운운하며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는데, 그 어느 부분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은 찾을 길이 없었으니. 아, 안수집사의 그 막중한 사명에 대하여 나는 말하고 싶어 하다, 결국은 저가 나가봐야 한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어쩌겠나? 누구는 감사를 누구는 이내…. 부디,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2).”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4-6).

 

마음은 어려웠고 속상하였으나 그것으로 주를 부르며 저를 생각하는 것이 나로서는 전부였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풀을 먹을 것이요 유리하는 자들이 부자의 버려진 밭에서 먹으리라(사 5:16-17).” 주가 이루실 것을.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빼앗으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렘 11:19-20).”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18).

 

우린 결국 주의 은혜와 평강이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다. 우리는 주께 아뢰며 기도하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심판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의 행위대로 그의 머리에 돌리시고 공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 의로운 대로 갚으시옵소서(대하 6:23).” 그러므로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이를 앎으로 우린 부요한 자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

(19-20).

 

결국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고로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아멘.